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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경계의 연결, 균열의 응시, 김연우 평론가의 <너는 나를 불태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김연우 2025-09-10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의 <너는 나를 불태워>는 일단 극영화다.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와 신화 속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 <바다 거품(파도 거품)>의 각색이지만, 두 배우가 마주보고 연기하는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원작의 대화가 영화 전체에 걸쳐 재생되는 가운데 여러 인용과 서술, 책 페이지를 비롯한 각종 요소가 나뉘고 섞이고 겹친다. 전부 분리해 재조립하려는 듯한 연출의 초점은 파편들의 연결에 있어 보인다. 조희영 감독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에서도 분리 후 재구성이 발견되는데, 그 조각은 인물이 현존하거나 기억하는 시공간의 덩어리들이다. 현장에서 감각되지 않는 것은 해석이 불가한 것으로 남고, 가시화된 균열은 메워지지 않는다. 이토록 다른 두 영화의 유사성을 짚어내 범주화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 글쓰기는 양쪽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조각냄으로써 잇다

<너는 나를 불태워>

<바다 거품>은 각자의 이야기에서 끝을 맞이한 두 존재를 허구의 대화로 불러낸다. 일종의 유령화를 통한 재해석이다. 여기서 ‘유령화’는 비가시화(되었다)가 아닌, 서사가 완결된 인물들을 현실적 시공간과 동떨어진 영역에 소환하는 행위를 뜻한다. 시간과 사건의 전개 없이 생각과 감정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텍스트. 피녜이로는 <너는 나를 불태워>가 죽은 자들을 다루므로 ‘유령영화’라고 했다.(<필름 코멘트> 2025년 3월17일) 한편으로 이 영화는 유령을 닮은 원작의 속성을 변형해 공유한다. 파베세가 사포를 유령으로 소환해 대화를 창작했다면 영화는 사포의 목소리를 극에서 꺼내 경계를 넘나들게 한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피녜이로는 영화 속 해변 신의 파도, 절벽, 그림자를 각각 다른 지역에서 촬영했다고 전한다. 방점은 쪼개기보단 ‘잇기’에 찍힌다. 최근 그가 한 말, “영화는 유령처럼 그들과 공명해야 했다”(<씨네21> 1521호)의 의미가 이와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영화 속 유령들의 대화는 가상의 영역에 정체하기보단 실제의 ‘장소들’을 부유하는 듯 느껴진다. 그 장소에는 여러 지역, 책 페이지, 핸드폰 화면, 내레이터의 기억까지 포함된다. 부유하는 목소리들은 그 이미지들을 잇거나 재의미화하며 허구와 현실의 구분을 흐린다.

허구의 인물인 감독/내레이터는 자주 카메라 뒤에서 설명한다. 현실에서 피녜이로와 꾸준히 작업한 두 배우, 가브리엘라 사이돈마리아 비샤르가 각각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 역을 맡아 대사를 읊지만,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은 역할이 아닌 배우 자신들처럼 보인다. 핸드폰에 저장된 상대의 이름을 역할명으로 수정하며 시작되는 대화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행위보단 목소리를 빌려주는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사이돈이 음악 장비를 만지는 모습에 사포의 대사가 오버랩되면, 그 음성이 사포의 것인지 사이돈의 것인지도 불분명해진다. 여기에도 비치듯, 또한 구분되지 않는 것은 읽기(번역, 해석)와 쓰기(창작)이며, 창작의 과정과 결과다. 사포의 시구가 이미지의 나열로 치환되는 두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이미지들은 영화의 다른 위치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나를’(me)에 대응되는, 공동 현관 호출 컷은 (아마도 전 연인의 집 앞에 선) 내레이터의 장면에서 추출됐다. 그런가 하면 ‘불태워’(abrasas)에 대응되는 개수대 컷의 경우 두 배우가 물을 트는 장면에서 행한 촬영의 결과물로 보인다. 전자에서는 극 중 개인의 사연이, 후자에서는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이 읽힌다. 이는 개인의 정서와 관점을 반영해 시를 기꺼이 ‘틀리게’ 번역하는 예시이자, 그 과정 자체가 결괏값에 드러나는 영상-시다. 조금씩 달리 번역된 사포의 시, 후대 작가들이 지어냈다는 사포의 죽음, 그 전설을 바탕으로 쓰인 <바다 거품>, 파베세의 삶에 관한 코멘트들, 그리고 <너는 나를 불태워>가 있다. 영화는 다양한 언어를 빌리고 엮어 해석-창작의 비선형적 계보를 느슨하게 그리며, 스스로도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 시가 되고자 한다.

조각난 것을 바라보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바다 거품>에는 헬레네의 삶을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파베세는 묘사를 마친 후에 이름을 공개함으로써 독자가 선입견 없이 재해석을 접하게 한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의 엔딩에서 드러나는 유정의 전 연인, 동명이인 정호의 얼굴은 헬레네의 이름과 반대 효과를 가져온다. 낯선 얼굴의 정호는 수진과 인주가 알던 정호와 구별되고, 짐작되고 해석됐던 존재에서 실물의 인간으로 나타난다. 이로써 수진과 인주가 알던 정호는 완전히 증발한다. 오프닝 정호의 작업실, 카메라는 패닝해 빈 액자 둘에 반사된 정호의 실루엣을 차례로 지나 창가에 선 뒷모습에서 멎는다. 그는 허상이거나 표정이 안 보이는 자, 정호가 등장하는 이야기에 비친 것은 그가 아닌 주변인들이다. 정호는 캔버스에서 뜯어낸 그림과 함께 사라졌다. 현장에서 본 것마저 모르게 되는 영화, 작품과 기록이 부재하는 예술가는 해석의 시도부터 불가능한 자가 된다.

영화는 장면들을 쪼개 재배치한다. 전반부에 나열된 사건들로 그린 지도는, 거기서 잘라냈던 시공간들이 후반부에 재생되며 미로로 바뀐다. 어쩌면 이미 있었던 균열의 가시화다. 영화는 각자의 진실이 다름을 설파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보단 깨진 형태를 응시하려 한다. 미로는 풀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도착지에는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깨달음이 있다. 영화는 ‘아무도 모르지’라는 진실을 설득하는 은유와 일화들을 언급하고, 무지를 인지하는 순간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영화 초반 인주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과 영화의 끝 그림이 파손된 상태로 전시된 장면 사이, 운반 기사가 그림을 놓치는 숏과 직전 계단을 오르는 숏이 서로 동떨어진 시점에 삽입되었음을 떠올린다. 인주가 만들고자 한 것과 만들어진 것,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그림 파편들 사이 무의미해 보이는 간격, 인주는 그 틈을 그대로 둔다. 수진은 영화의 중간 즈음 훈성의 에세이를, 영화가 마무리될 즈음 인주의 편지를 읽는다.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말들과 당신을 향한 내 감정은 이렇다고 하는 말들이 배치된 자리에, 작품이 바라보는 곳이 어렴풋이 비친다. 수진이 훈성의 에세이를 읽는 부분은 (이 영화에서) 드물게 상황에서 소리와 이미지가 모두 분리된 장면이다. 훈성의 음성이 오버랩되는 가운데 정호는 내용을 증명하듯 움직이다 균형을 잃는다. 하지만 불일치는 불일치로 남고 세 사람은 갈라진다. 인주의 편지를 읽는 수진 앞에는 실물의 인주가 나타난다. 그들이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있는 뒷모습에, 수진과 인주의 얼굴에 번갈아 초점을 두는 숏이 이어진다. 영화는 어쩌면 찰나 연결되었을지 모르는, 두 사람 사이 간극을 응시한다. 나는 내 마음만을 겨우 알 수 있을 따름임을, 주장하기보다는 촘촘히 그리고 서서히 감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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