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나랑 자려고 하잖아. 하여간 이래서 퀴어들이 싫어. 그냥 친구로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니까.”
영화의 초반, 리(대니얼 크레이그)와 함께 놀던 남자는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뒷담화를 한다. 폭력적인 말을 뒤로한 채 리는 걷는다(이때 스산하던 사운드가 너바나의 <Come as You Are>로 이어지는 순간의 쾌감이 상당하다). 중절모를 눌러쓴 채 흰색 슈트를 입고 휘적휘적 거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유령 같다. 이 걸음의 끝, 그는 유진(드루 스타키)과 마주친다. 첫 만남. 영혼처럼 흐릿하던 리는 그 순간 생생한 인간으로 돌아와 숨을 몰아쉬고 눈을 번뜩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기. 그것은 ‘퀴어’라는 멸칭에 눌려 주변부를 떠돌던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사랑과 마주하며 인생의 중심부로 복귀할 때 튀어 오르는 스파크다.
그런데 여기서 첫 만남의 짜릿함만큼이나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건 이 순간에 드러나는 두 가지 대비되는 영역. 바로 ‘환상’과 ‘현실’이다. 거리를 유령처럼 떠돌던 리(환상)는 생동감 넘치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현실). 거칠게 말하자면, <퀴어>는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리를 따라가는 영화다. 그의 걸음을 쫓을 때 우리는 <퀴어>, 그리고 루카 구아다니노가 진정 닿고자 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환상과 현실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퀴어>를 읽고, 이어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결말을 통해 <퀴어>의 마지막을 다시 들여다볼 것이다.
현실과 환각 사이에서
일상에서 리는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일순간 변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리가 ‘퀴어’를 향한 세상의 벽을 마주하는 때다. 친구 기드리(제이슨 슈워츠먼)는 그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에서) “너무 퀴어”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리는 몸이 굳는다. TV의 치지직대는 소음(리의 머릿속을 표현하는 듯하다)을 배경으로 그는 점점 흐릿해지고 투명해진다. 위에서 처음 설명한 장면에서도 리는 퀴어에 관한 혐오를 받고 나서 유령처럼 배회한다. 퀴어를 세상 밖으로 배격하며 내쫓는 말들. 그 말을 피해 리는 흐릿하고도 환상적인 세계에 들어선다.
이런 연출은 리의 사랑이 장벽에 부딪힐 때도 등장한다. 유진과 데이트할 때, 리의 흐릿한 손이 그의 얼굴을 만진다. 이 손은 리의 육체가 아니다. 유진을 쓰다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리의 마음이 이중 노출로 연출된 것이다. 리가 감춘 마음은 일상 위에 포개어진 옅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드러난다. 그가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문득 자각할 때, 그러나 현실 안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없을 때, 영화는 환상 같은 이미지로 그것을 이루어낸다. 남미의 환상문학처럼 일순간 현실을 틈입하는 환상은 리의 서글픈 도피처다.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 퀴어의 정체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마법이다.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환상을 향한 상태. 이것이 퀴어로서 고백하는 “몸과 정신이 분리된” 상태일 것이다.
한편 리와 달리 유진은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팩트를 다루는 기자다. 또한 그는 공적인 장소에서 여자 친구와 있는 등 헤테로섹슈얼의 규범이 지배하는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남성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잘해낸다. 반대로 리는 마약중독자다. 이는 자꾸만 현실 저 너머로 도피하고픈 리의 열망이 파괴적인 지경에 이르렀음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유진이 처음 리와 함께하며 퀴어 정체성을 표출한 순간, 그는 술에 취해 있다. 유진이 토할 정도로 취한 이후에야 그들의 첫 입맞춤은 이뤄진다. 유진에게 리와 함께하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 환각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일종의 배설(구토)과도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리에게 이것은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환상 안에서만 그를 쓰다듬던 리의 손은 이 순간 스크린 위에서 육감적으로 체화된다. 리의 사랑은 유진의 환각 안에서 성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 뒤에 곧바로 리는 ‘야헤’를 찾는다. 그것이 환각을 주입하는 동시에, (텔레파시를 통해)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전달해줄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우연히 만난 남자는 야헤가 새로운 문이 아니라 ‘거울’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거울은 ‘가상의 상’을 만들어내지만 그 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의 우리일 뿐이다. 이것은 환상을 찾는 리의 시도가 결국 현실로의 귀환으로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야헤를 접하고 환각 안에서 서로를 탐닉하지만, 유진은 더 나아가길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 찾은 물질은 그 사랑을 끝내고야 만다.
그의 마지막(장면)에 대하여
이제 <퀴어>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할 차례다. 리는 아마도 꿈을 꾸는 것 같다. 꿈 안에서 그는 조그만 창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본다. 리가 들어선 방에는 자기 꼬리를 문 뱀이 있다. 리는 자기 꿈에서, 자신을 보고, 뱀은 꼬리를 문다. 몇겹에 거쳐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수렴하는 이런 구조는 지독할 정도로 내면에 꼭꼭 갇힌 채 돌고 도는 운동을 연상하게 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 이런 운동은 처음이 아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비밀스러운 연인은 상대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지 못한 채, 자기 이름을 속삭일 뿐이다. 여기에는 서글픈 회귀 운동이 있다. <본즈 앤 올>(2022)의 마지막은 희귀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연인 사이에 벌어진 비극을 다룬다. 그토록 찾았던 연인은 함께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수렴하고 만다. 루카 구아다니노 작품에서 사랑은 자주 밖을 향해 뻗어가지 못하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내면에서 팽이처럼 돌고 돈다. <퀴어>는 이러한 운동이 한 인간의 내면을 파괴하는 사례이며, 이것이 루카 구아다니노가 생각하는 퀴어에게 강요된 사랑의 형태다. 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방에서 빠져나온다.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연상하게 하는 배경에서 리는 노쇠한 탓인지, 유진에 대한 금단증상 때문인지 몸을 떨다 마지막을 맞는다. 그가 그토록 추구하던 ‘환상’은 결국 리의 요람이 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 중요한 운동은 모두 아픈 현실을 피하기 위하여 이뤄진다. 그 목적지가 환상이든, 자기 내면이든, 일종의 도피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은 낯선 듯하나 실은 익숙한 이야기다. 밖에 꺼내놓지 못하고 안에 가둬두어 숙성 혹은 부패하고야 마는 그 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보통 이것은 지나가는 바람이지만, 이 안에서 일평생 살아가는 남자가 <퀴어>에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의 마지막은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