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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언어의 거울에는 종종 속내가 거꾸로 투영된다. 소리 높여 정의를 부르짖는 자들이 대체로 불의에 길들여 있고, 애국과 전쟁을 말하는 이들이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치는 법이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9월26일 화상 기자회견에서 “1편의 반응이 2편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의식해서 만들진 않았다”고
말할 때부터 어딘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커: 폴리 아 되>는 전작 <조커>를 둘러싼 부정적 평가와 우려에 대한 화답 같은 영화였다.
자기반성은 대체로 건강함의 증거지만 창작의 영역에선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속편이니까 전작에서 이어지는 답변을 내어놓는 게 당연하지만 뭐든 과하면 곤란하다. 걱정 가득한 반성문은 (전작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이들의) 눈치를 보다 길을 잃은 건지 점점 수다스러워지더니 어느새 (보편타당하고 안전한) 올바름에 안착해 (지적)각성을 강요한다. 그렇게 카메라 초점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의미와 재미 사이, 속편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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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이미 1958년에 능력주의(meritocracy) 사회가 어떤 디스토피아로 이어질 것인지를 절절히 경고했다. 부와 권력과 명예 등 사람들이 원하는 것의 분배가 철저히 각 개인이 가진 ‘능력’에 비례하여 돌아가도록 하자는 것이 능력주의 사회의 이상이다. ‘공정한’ 사회일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행복한 사회는 아닐 것이다. 이제부터 ‘없는 자들’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어서 서러운 것에 끝나는 게 아니라 그 꼴로 사는 책임은 모조리 자신이 못난 탓이라는 모욕까지 뒤집어쓰게 되기 때문이다. 게임과 경쟁에서 밀렸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더더욱 불만이 쌓여간다. 마이클 영의 이야기는 결국 이 ‘없는 자들’의 폭동으로 사회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오래전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술집 지하 화장실에서 본 맥주 광고 포스터는 아직도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 문구는 ‘맥주의 미덕: 못생긴 사람들도 섹스를 할 수 있도록 해준다’였다. 누구나 알고 있지
[홍기빈의 클로징] 능력주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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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에 봤던 신기한 영상이 요즘도 종종 생각난다. ‘딥페이크의 긍정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영상에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활짝 웃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늘 엄숙하고 어딘가 경직된 표정으로 기억되던 독립유공자들의 (상상 속) 미소를 보니 오랜 지인의 새로운 면모를 마주한 것처럼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날 이후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딱딱한 얼굴보다는 수줍은 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퍼진다.
살아 움직이는 영상은 이토록 강력하다. 물론 그게 항상 좋은 쪽으로만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2013) 개봉 후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목소리가 링컨의 목소리로 기억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링컨 대통령의 육성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가 재현한 링컨의 목소리, 동작, 표정은 현실을 덮어씌울 만한 강력한 힘이 있다. 중요한 건 정보의 진위가 아니다. 그걸 진짜라고 느낄 만한 감각이 때론 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얼굴의 스펙터클,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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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한가위다. 두 단어로만 이뤄진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내 연식과 문화적 배경이 드러날 테다. ‘바야흐로’라는, 시의적절한 뉘앙스에 발음마저 유려한 이 단어는 구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문어체로도 잘 쓰이지 않는다. 한가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여름을 끝내고 가을걷이에 들어간 시절의 풍요와 여유가 배어 있는 이 아름다운 우리말을, 진정성 있게 사용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전통의 고아함을 품지 못하면서도 그 무렵이면 늘 그런 표현을 별 생각 없이 가져다 쓰는,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의 게으른 관습 외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더 진부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 피하게 되는 악순환이다.
말이란 시대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라는 말이 제아무리 예쁘고 여전히 대체할 수 없는 적확한 표현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 시대 언중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결국 쓸쓸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가위’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더이상 농촌 기반 사회에 살고 있지
[정준희의 클로징] 상실의 시대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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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쓸 때 ‘배우의 존재감으로 성립하는…’ 따위의 수사를 간혹 사용한다. 실은 부끄러울 만큼 게으른 표현이다. 영화 글쓰기에서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같은 표현을 다른 영화에 썼을 때 위화감이 없다면 그건 실패한 글쓰기다. 속된 말로 영화 안 보고도 쓸 수 있는 표현. 소심하게 항변하자면 때로 그런 표현들은 불가항력을 마주한 일종의 항복 선언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는 대상은 언어로도 포획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다름 아닌 배우다.
영화의 서사나 구성, 감독의 연출이나 의도 바깥에서 기이한 활력을 뿜어내는 존재들이 있다. 찍을 수는 있지만 의미를 고정할 수 없는 대상들. 배우의 몸짓, 배우의 동선, 배우의 실루엣, 배우의 육체, 무엇보다 배우의 얼굴이 거기에 해당한다. 어쩌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가르는 기준은 필름이 아니라 배우의 유무일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통제 불가능한 대상인 동시에 영화의 물질적 기반이다. 그 어떤 스펙터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얼굴의 스펙터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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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인터넷 게시물에 유독 ‘대유쾌 마운틴’이라는 밈이 자주 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로봇공학 분야의 오래된 이론인 ‘언캐니 밸리(불쾌한 골짜기) 가설’에 따르면 인공물은 어설프게 인간을 닮으면 오히려 불쾌감을 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가상인간의 이미지가 실제 인간의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잘 만들어져서 더이상 불쾌감을 주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그 표현을 사용했다.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드디어 산 정상에 도착한 이들의 쾌감과 흥분이 느껴졌다.
신나 하는 사람들을 보며 괴로웠었다. 그들이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 속 인간은 거의 대부분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령대, 얼굴과 표정, 몸짓, 그리고 복장 등 모든 것이 비슷비슷한 여성들. 그곳에는 쇼트커트를 한 여자도, 주름진 얼굴로 흰머리를 쓸어 올리는 여자도, 정장 차림을 한 여자도, 땀 흘리며 달리는 여자도, 기골이 장대한 여자도, 중장비를 운전하는 여
[임소연의 클로징] 딥페이크 딥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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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걸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깨달았다. 일요일 아침마다 숙제처럼 찾아오는 중요한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 8시에 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볼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늦잠을 잘 것이냐를 두고 매번 흔들렸다. 사실 뭘 골라도 상관없었다. <디즈니 만화동산>을 선택한 날은 “이번주는 별로네, 잠이나 더 잘걸”이라며 후회했고 늦잠을 택한 날은 놓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시무룩해지는, 예정된 아쉬움의 반복이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던 건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느 쪽을 골라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먼저 떠오르는 ‘후회형 인간’인 나는 지나온 길을 곱씹고 되돌아보는 습관을 기본값으로 장착했다.
간혹 왜 그런 식으로 인생을 낭비하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언해주는 이들도 있다(특히 명절 때만 보는 먼 친척들). 솔직히 고백하자면 걱정해주시는 것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다. 스무살 무렵에는 질척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소년 시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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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인가?” 기사에 적힌 그의 나이가 낯설다.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 지회장. 2015년 아사히글라스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원청은 하청 기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서울에 직장이 잡히면서 내가 구미를 떠나던 무렵이다. 이후 그는 내 머릿속에서 옛날 그 나이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최근 대법원은 원청이 해고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9년 투쟁 끝에 그들은 원청 정규직으로 복귀했다.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태 당시 바로 옆 공장 아사히글라스는 작업을 강행했다. 차헌호는 이를 세상에 알린 제보자였지만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노동자는 서너명이었다. 그 공장은 불량품을 만든 노동자에게 빨간 징벌 조끼를 입히는 곳이었고, 구미 4공단은 민주노조의 불모지였다. 소수 인원으로 노출되면 노조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반면 당시 지방의원이던 나의 활동은 노골적이었다. 집회에서 때로는 노조 간부보다 더한 강경 발언을 해 지역 재계
[김수민의 클로징] 두 세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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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현역 시절 일어난 일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김연아 선수의 한마디를 처음 들었을 때 ‘우문현답’이란 고사성어를 재연드라마로 시청하는 기분이었다. 격언 탄생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마주하며 실력을 갈고닦아 경지에 오른 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저런 걸까 하는 경탄과 다른 사람도 아닌 ‘김연아’의 말이니까 가치를 지니는 거 아니겠냐는 배배 꼬인 심보가 동시에 교차했다. 더위에 지친 탓인지 요즘 부쩍 ‘이걸 꼭 해야 하는 걸까’라는 잡념 속에 피곤한 나날이 이어지는 중이다. 더 편한 길이 있는데 괜히 사서 고생하는 것 같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 바보짓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는다. 그럴 때 문득 ‘그냥 하는 거지’란 말이 떠오르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할 일을 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마감에 허덕이는 목요일, 유튜브 쇼츠로 잠시 도망쳐 이런저런 영상을 뒤적이다가 오래전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법정 스님을 봤다. ‘우리는 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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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한때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었던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파괴, 테러, 방화, 무질서 등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아나키즘은 19세기 이래로 폭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운동의 한 조류로서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도 이를 공산주의 이상으로 과거의 유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유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등 기존의 거의 모든 정치적 이념이 파산하거나 거의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에서 아나키즘은 대단히 매력적인, 아니 어쩌면 거의 유일의 출구가 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나키즘은 그 장구한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은 면모를 띠고 변해온 사상이기 때문에 파괴, 테러, 무질서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나키즘을 정의하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한마디로 ‘소외된 일체의 외적 권위에 대한 거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신도, 주인도 없다’(No God, No Master)라는 간명한 구
[홍기빈의 클로징] 아나키즘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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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지켜줄게. 넌 혼자가 아니야.” 극장 가가 ‘하츄핑’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개봉 3주차 누적 관객 70만명 돌파를 앞둔 국내 애니메 이션의 돌풍은 좋은 기사 거리이긴 하다. 아이들 때문에 갔다가 엄마아빠가 울고 나왔다든지, 공주 분장을 하고 관람하는 아이들이 캐릭터 대사 하나하나에 답하며 스크린과 대화를 나눈다는 에피소드는 건너 듣고 있으면 꽤 재미있다. 다만 ‘하츄핑’ 열풍의 실제 당사자가 되면 강 건너 불 보듯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이 다. 사랑에 빠진 존재 옆에서 동행한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지 마시길. (언론 시사도 제대로 못 챙겨보는 내가 <사랑의 하츄핑>을 이미 2번이나 봤다.)
‘애니메이션 애호가’ 입장에서 기분 좋은 소식 사이사이 이상한 포인트로 어그로를 끄는 기사들이 보인다. ‘<리볼버>, <하츄핑>에 참패…’, ‘<하츄핑>, 전도연 이겼다’ 같은 제목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
[송경원 편집장] 이해와 애정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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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오로지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영화 <기적의 시작>이 공영방송 KBS에, 그것도 광복절에 편성된다고 한다. 이 글이 나갈 시점엔 이미 전파를 타고 난 뒷일이 될 듯하지만, 본래 일정표로는 금요일인 <독립영화관>을 하루 앞당겨 추가 편성하면서까지, 제작진이 방송권 구매를 거부하자 담당 국장이 기안하여 전결하는 기괴한 방식으로, 끝끝내 방송을 고집하고 있다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역사에 무지한 광신도들의 기적(奇蹟)을 작위하기 위해 다수가 기함(氣陷)할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로 의도했던 건 실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헛웃음을 자아내는 허구적 코미디가 아닐까 의심케 하는 대목 한 가지. 제작자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독립영화 인증을 신청했지만 영진위는 “객관성 결여와 설득력 있는 논증 제시 부족” 등을 이유로 인정을 거부했다는 것. 그런 영화가 공영방송 KBS의 <독립영화관>에
[정준희의 클로징] 기적의 시작, 파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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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 우울할 때 더 우울함으로 파고들어 바닥을 찍은 후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인 나는, 요즘처럼 현실이 버거울 땐 암울한 다크 판타지의 결정체 <베르세르크>를 종종 꺼내 본다. 여기 시궁창 같은 마을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가 있다. 소녀는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동화처럼 요정과 광전사가 나타난다. 실종되었던 동네 언니가 요정이 되어 나타나자 소녀는 자신을 구원해줄 탈출구라 여기고 쉽게 따라나선다. 하지만 언니는 실은 요정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고, 이때 주인공인 광전사 가츠가 난입하여 괴물을 사냥한다. 그러자 소녀는 이번엔 가츠에게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광전사를 둘러싼 세계 역시 괴물들과 영원한 싸움을 이어가는, 끔찍한 지옥이다. 갈피를 잃은 소녀에게 가츠는 냉혹하게 내뱉는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종종 말의 앞뒤를 잘라 본래 의도와 달리 편의적으로 사용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한국이 싫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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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들른 박물관에서 봤던 개미들을 잊을 수 없다. 한구석에 얕게 물이 채워진 수조가 있고 그 안에 큰 잎사귀가 여럿 달린 나뭇가지가 꽂힌 유리병이 두어개가 놓여 있었다. 그 사이를 다리처럼 연결하고 있는 베이지색 굵은 로프와 함께 거의 모든 잎의 가장자리가 톱니바퀴처럼 뜯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이 전시물이 뭘까 의아해하며 가까이 가보니 수조의 한쪽에 뚫린 구멍을 두고 로프 위를 양방향으로 줄지어 가는 개미들이 보였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같기도 하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동하는 부품 같기도 했다. 잠깐 동안 진짜 개미가 아니라 혹시 ‘로봇 개미’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작동하는 자연을 보여주는 전시에 감탄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영상 촬영을 하다 보니 다른 모습의 개미들이 눈에 띄었다.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 끝쪽에 자기 몸집보다 큰 잎사귀 조각을 물고 모여 있는 개미 무리였다. 가만히 보니
[임소연의 클로징] 언캐니 밸리에 빠진 개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