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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소스타인 베블런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이다. 그런데 이 두 천재가 21세기 인류의 경제생활에 대해 완전히 엇갈리는 예견을 내놓은 지점이 있다. 여가와 소비 중 과연 어느 쪽이 늘어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생산력 증대에 착목했고, 그리하여 자신의 손자손녀 세대인 21세기가 되면 노동시간이 하루 서너 시간으로 단축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인류는 이제 먹고살기 위한 필요에서 해방돼 펑펑 남아도는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최고의 고민거리로 여기며 살아갈 것이라고 보았다. 최근의 경제학자들의 논평에 따르면 케인스가 예측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증대는 대략 예측한 대로 들어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대다수의 근로 대중에게 있어 하루의 노동시간이 서너 시간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에 견주어볼 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어째서 이런 괴리가 발생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베블런
[홍기빈의 클로징] 케인스가 틀리고 베블런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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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인연’이란 단어를 입에 자주 올린다.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사람끼리의 관계를 일컫는 사전적 의미 너머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안과 밖의 연결로서의 인(因)과 연(緣)을 생각한다. 영화에도 인연이 있다. 어떤 영화인지 설명하는 내적분석만큼 중요한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 영화를 접했는지, 바깥으로부터의 연결 과정이다. 어떤 이유로 그 영화를 보기로 결심하고, 어떤 상영관에서 언제 관람을 하고, 보고 나와서 피어난 생각들을 정리하기에 이르는 맥락들. 얽혀서 다다르는 경로가 결국 영화와 나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지난 4월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셨다는 뉴스를 접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콘클라베>가 떠올랐다. 곧이어 <씨네21> 1497호에 구본석 신부님이 써주신 <콘클라베>에 관한 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가 생각이 났다. 신부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글을 통해 또 다른 영화 <요한 23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인과 연, 잇는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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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 흔히 쓰는 말이어서 굳이 우리말로 옮길 필요는 없겠지만, 직업적 전문성 정도의 뜻이다. 전문성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다른 영어 표현(specialist, expertise)도 많아서 앞에 직업적이란 수식어구를 붙였다.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기술이 뛰어나 능히 하나의 직업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도 되고, 특정 직업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갖췄다는 뜻도 된다.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을 염두에 두어 ‘전문직주의’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ism’이 붙었다고 죄다 ‘-주의’로 옮기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서두를 길게 끈 이유는 이렇다. 미디어에 요구되는 ‘프로페셔널리즘’이 무언지 고민하고 있어서다. 전에는 그럭저럭 뚜렷해 보였다. ‘기자’라고 하면 무엇보다 글을 바르고 간결하게 잘 써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취재 역량이 중요하다. ‘피디‘라는 직종은 기자에 비해 좀더 복합적이어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
[정준희의 클로징] 그 인기와 경쟁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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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경 STORY UP SHORTS 상영회에서 관객과의 대화 진행을 맡은 적이 있다. 2022
년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잠시 우리 곁을 떠나간 후, 한동안 단편영화를 접할 창구가 마땅치 않았던 터라 오랜만에 접한 작품 한편 한편이 신선하고 행복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작품, 이종훈 감독의 <건축가 A>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2023년 가톨릭영화제 대상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작품이니, 2024년 9월에 와서 이 작품을 좋다고 떠드는 건 영화잡지 편집장으로서 게으름을 고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추천하며 호들갑을 떨고 싶을 만큼 좋았다. 2024년 봤던 영화 목록을 전부 되돌아봐도 가장 오래, 마음 귀퉁이에 따뜻하게 둥지를 튼 한편이었다.
건축가 A는 지나온 삶의 궤적을 바탕으로 집을 짓는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기억을 재료 삼아 의뢰인에게 딱 맞는 집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전개는 익숙하고 상투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짧은 영화, 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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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부터 SNS를 가득 채운 풍경이 있었다. 챗지피티가 만들어준 지브리 스타일의 사진들. 처음에는 누군가 올린 이미지를 보고 ‘오, 진짜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네’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데 어느새 타임라인에 지브리풍 이미지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지브리풍의 따뜻한 색감 속에서 사랑스러운 인물로 다시 태어난 자신을 대체로 마음에 들어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노래처럼,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한순간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는 모습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네달 가깝게 이어진 현실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바라보는 지브리 세상은 유독 더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왜 자기 사진을 AI에게 주고 바꿔 달라고 하고 그것을 SNS에 공유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브리 스타일을 좋아하는 걸까? 그러다가 질문이 바뀌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른 이들의 지브리 스타일
[임소연의 클로징] AI블루와 파면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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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길지만 한달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시간의 무상함을 읊조리는 관습적 표현인데, 요즘엔 거꾸로 써야 할 것 같다.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이걸 한달 내내 반복하고 버티려니 너무 길다. 또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몰라 겁이 난다. 가깝게는 급변하는 정세에 ‘다이내믹 코리아!’를 외치지 않을 도리가 없고 멀리 둘러봐도 세계질서가 바뀌고 있는 순간이라는 게 피부에 와닿는 요즘이다. 좌와 우, 안과 밖, 망원경과 현미경, 과거와 미래까지 모든 것이 맹렬하게 진동 중이다. 다시 만난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매주 그렇듯) 목요일 마감 후 금요일 반나절 행복했다. 4월4일 금요일 윤석열씨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이제야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바로 다음날 (역사적으로 수차례 검증된) 이른바 ‘국회의장병’이 창궐하여 개헌 이야기로 속을 뒤집어놓는다. 내란 세력 척결 국면이 시간을 잘못 맞춘 개헌 논의에 흐려지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곧이어 숨 쉴 때마다 위헌 중인 대통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그해 봄의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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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프랑스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이하 <카이에>) 1호가 세상에 나왔다. 헤드라인 없이 스틸 사진 한장으로 장식된 30쪽짜리 노란 잡지가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거라 짐작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120년 넘는 영화의 역사 속에 수많은 영화잡지들영화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이 명멸했지만 <카이에>의 등장만큼 깊고 묵직한 영향력을 미친 사건은 희귀하다. <카이에>에 완벽한 기사가 실려서가 아니다. <카이에>의 글이 영화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치거나 흥행을 결정짓는 요소도 아니었을뿐더러 알려진 위상에 비해 많은 대중에게 읽히지도 못했다.
<카이에>가 영화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잡지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카이에>는 질문하는 잡지였다. 주류의 가치관과 통념에 저항하고, 숨겨진 걸작들을 발굴하며, 영화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과감한 제언을 멈추지 않았다. 때때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②] 우리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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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만한 아이템은 다 해봤다. 오래된 잡지의 난제 중 하나는 뭔가 새롭고 특별한 걸 시도해야 할 시기에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거다. 올해 내내 <씨네21> 30주년에 어울릴 기사를 준비하면서 머리를 싸맸다.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5주년, 10주년, 15주년, 20주년, 25주년 창간 기념호들을 쭉 돌아봤더니 오히려 선택지가 줄어 더 막막해졌다. 주변에서 너무 힘주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하라며 걱정 어린 조언을 건넸지만 막상 욕심을 내려놓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4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영화기자가 된 뒤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매주 (사고 없이) 마감하는 특별한 요령이 있냐고. 처음엔 그런 건 없다고 했지만 요즘은 이렇게 답한다. 마감은 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거라고. 마감을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언제 하는지는 명확하게 안다고. 같은 마음가짐으로 복잡한 생각들을 지우고 몸이 기억하는 대로 30주년 창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①] 30주년, 이렇게 준비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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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사회주의가 실패한 시점은 언제인가. 소련 공산당에 향수가 있는 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지목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레닌 때는 좋았는데 스탈린이 파괴했다”고 한다. 김규항씨 같은 원칙적 사회주의자는 레닌 시절 이미 권력이 소비에트에서 공산당으로 넘어가면서 소련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짚었다. 여기에 얼마간 동조하면서도 내가 가리키는 시점은 다르다.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망해 있었다.” 봉기한 인민들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은 혁명이었을 것이다. 다만 혁명 직전 러시아에 민주주의의 씨앗과 산업 기반이 부족했던 것은 혁명 이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러시아가 자행하는 전쟁 범죄도 소련 시절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탓이다. 사건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사건 이후를 기속한다. 이 글을 쓰고 넘기기까지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점에 깔리고 인터넷에 걸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걱정하지는 않는다.
[김수민의 클로징]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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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린다. 가벼운 졸음이 눈꺼풀 위로 살짝 내린다. 포근하고 촉촉한 습기가 반가우면서도, 전국을 삼킨 산불을 진정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라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못내 야속하다. 헌법재판소 판결은 여전히 나올 줄 모르고 어수선한 정국 따라 마음도 번잡스러워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어본다). 따뜻하고, 나른하고, 심란하고, 마음이 고된 3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이 그렇게 지나가는 중이다. 맥 빠지는 상황에 잠시 넋을 놓은 듯. 적어도 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이 흘러간다.
이른 아침 출근길. 10년 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불현듯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침묵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그 시절 소소한 추억들을 꺼내며 낄낄거렸다. 신나고 재미난 일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대부분 기억이 흐릿했다. 어색하고 아쉬운 통화를 마친 뒤 잠시 혼자 걷다가 문득 그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어느 평범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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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곳적, 여신 여와(女媧)는 사람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처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정성 들여 진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어서 만들었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느리고 복잡했다. 싫증도 나고 마음도 조급해진 여와는 결국 다른 방법을 택했다. 항아리에 진흙과 밧줄을 함께 쑤셔넣은 뒤 밧줄을 확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방에 흩뿌려진 진흙 덩어리들이 저마다 꿈틀거리며 저절로 사람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땅은 금세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하지만 여와가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 사람들과 항아리에서 한꺼번에 만들어진 사람들이 동일할 수는 없었다. 전자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귀족들이 되었고 후자는 평생 흙을 파고 갈아먹고사는 서민들이 되었다. 중국에서 내려오는 창조신화의 한 대목이다. 고대인들 또한 계급사회라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반쯤은 체념으로 반쯤은 슬픔으로 ‘한땀 한땀’ 정성 들여 만든 ‘수제’ 인간들과 항아리와 밧줄을 사용하여 ‘대충 만들어진’ 인간들의 차이로 설명하려고 했던
[홍기빈의 클로징] 태초의 ‘진흙 덩어리’와 미래의 ‘미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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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민 살아진다. 화제작 <폭싹 속았수다>의 여섯 번째 에피소드 제목이 가슴에 콕 박혔다. 내용 자체가 눈물샘 터지는 사연이기도 했지만 슬픔을 덮고 일상을 이어가기 위한 다짐 같은 말이라 더 가슴이 아렸다. 한탄의 말인지, 한숨의 모양인지, 그도 아니면 살고 싶은 해녀의 숨비소리인지 헷갈리는 저 무덤덤한 한마디. 그 아래로 눈물이 스며들어 고여 있다. 족히 바다를 메울 만한 양이다.
때때로 삶이 잔혹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운명이 교통사고처럼 우리를 들이받는 건 버틸 수 있다. 문제는 슬픔의 자리가 그 순간에만 머물지 않고 주변으로, 내일로 번진다는 거다. 삶은 픽션과 다르기에, 비극적인 사건이 지나가고 난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진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괴로워도 밥숟가락은 들어야 하고, 바닥에 잠길 듯 몸이 무거워도 일어나 일터로 나가야 한다. 온전히 슬픔에 잠길 쉼표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강퍅한 시간의 파도가 냉혹하게 우리를 떠민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살민 살아진다 이어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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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 실로 명언에 가깝다고 늘 생각하는 속담이다. 한길이 평균적인 사람 키에 해당하니 열길이면 15m가 넘는 깊이다. 아무리 맑은 물이라 해도 그 정도 깊이면 그냥 수면 위에서 들여다본다고 알 수는 없다. 물 안으로 들어가보거나 그 물길을 수십년은 노 저어 본 경험이 있어야 알 법하다. 쉽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 속은 더 어렵다. 자연과학이 알아내고자 하는 게 ‘열길 물속’이라면 ‘한길 사람 속’은 심리학의 몫이다. 심리학은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적 통찰에 의지한다. 사회과학이 그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인지 대체로 심리학은 사회과학에 속하는 걸로 간주된다. 최근 뇌과학이 거두고 있는 엄청난 성과에서 보듯 사회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의 저울추는 인문학적 통찰보다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훨씬 더 기울어 있다. ‘열길 물속’을 알아내는 수단에 의존하여 ‘한길 사람 속’도 알아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뇌를 들여다볼
[정준희의 클로징] 미디어와 대중(2) - 그들은 정말로 대중적 취향이 뭔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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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오프닝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을 때 불현듯 위화감에 휩싸였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왠지 모르게 개운할 때 엄습하는 불안감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까. 모든 게 제자리에 있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뭔가 비어 있는 기분. 평소와 무엇이 달라진 건지 찬찬히 살펴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3주 만에 처음으로 <미키 17> 관련 원고가 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꾸로 말하자면 그제야 (미리 준비한 기간까지 합쳐) 거의 지난 두달 가까이 온통 ‘봉준호’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가 실렸던 1495호 <미키 17> 특집을 시작으로, 1496호에는 스티븐 연 배우 커버 인터뷰와 <미키 17> 비평, 1497호에는 세 가지 질문으로 풀어본 <미키 17> 기획 기사가 <씨네21>에 실렸다. 미리 자백하자면 이번주만 쉬어갈 뿐 다음주는 물론 그 뒤에도 <미키 17>과 봉준호 감독 관련한 지면은 계속 이어질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봉준호 되기>를 읽으며 생각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