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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가 최근에 행한 한 인터뷰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파격적인 이야기를 솜씨 좋게 던지는 그답게 이번에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풍요의 시대가 온다. 화폐가 없어질 것이며, 노후 준비 따위는 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오로지 희소한 것은 에너지뿐일 것이다.” 이리저리 재고 따지는 좀스런 학자들과 달리 시원시원하게 지르는 솜씨가 일품이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선 천연자원과 에너지를 제외한(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런 것들까지도!) 모든 것들이 차고 넘치게 되리라는 예언은 이제 망상이 아닌 듯하다. 만약 지금보다 월등한 수준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나온다면, 이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전통적인 생산요소의 구별을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그 자체가 기계 장비일 뿐만 아니라 노동과 마찬가지로 기계 장비의 작동에 관련된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그 작동을 주도하는 성격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말대로 “옵티머스 로
[홍기빈의 클로징] 일론 머스크, 풍요,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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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가에 멜로 로맨스의 불꽃을 지피고 있는 <만약에 우리>의 원작 영화 <먼 훗날 우리>에는 작품을 관통하는 한줄의 대사가 있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린젠칭(정백연)에게 샤오샤오(주동우)가 말한다. “I miss you.” 린젠칭이 자신도 보고 싶었다고 답하니 샤오샤오는 울먹이며 내뱉는다. “내 말뜻은, 내가 널 놓쳤다고.” 소진된 인연의 끝에 선 남녀는 가난한 마음으로 놓쳐버린 순간들을 그리워하며 회한에 잠긴다. 때론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말들이 아쉽고 모자란 마음을 더 적절하게 담아내는 것 같다.
2022년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포스터에는 ‘안녕, 모든 에반게리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진즉에 과거가 되어버린 ‘에반게리온’이 이 문구를 보는 순간 현재로 되살아났다. 안녕이라는 인사를 입에 올리는 순간, 이제 정말 페이지를 닫고 떠나보내는 ‘bye’의 안녕과 다시 만나 반가운 ‘Hello’의 안녕이 겹친다. 어쩌면 우리가 무언가를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안녕, 양소룡, 로저 앨러스 그리고 벨러 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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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여느 사람들처럼 이야기 속 인물들이나 그걸 창조하고 연출하고 연기하는 이들에게 열광하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당연히도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현실을 진단하고 바꾸는 힘은 허구에 기댈 것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에 근거를 둔 분석과 대안에서 나와야 한다고 믿었다. 내 소싯적 가치관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고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어느 날 나를 불러 소설을 한번 써보라고 말씀하셨다. 작문 숙제로 낸 수학여행의 기행문을 읽어보시고 내게 ‘스토리 텔러’적인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셨던가 보다. 지금의 학급 학생 수에 비해 적어도 두배에서 세배까지는 되었으니 그걸 다 읽어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을 거다. 그중에 자질이 있어 보이는 아이를 골라, 따로 불러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게 어지간한 애정과 소명의식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지금도 여긴다. 아니 그 선생님의 당시 나이보다 훨씬 더 먹은 지금의 나이기에 더욱더 감사
[정준희의 클로징] 12월3일이 바꿔놓은 나, 그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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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다. 익숙했던 질서가 무너지고 20세기 후반 짧았던 평화의 끝이 보이는 것 같다. 도처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다시금 약육강식의 패권을 숭상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위선마저 걷어치우고 옳다고 믿었던 상식들이 배신당하는 순간, 이깟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든다. 감사하게도 (동시에 원망스럽게도)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주는 영화들이 있다. 마침 4K 리마스터 버전으로 돌아온 에드워드 양 감독의 유작 <하나 그리고 둘>도 그중 하나다.
결혼식에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3대에 걸친 가족구성원이 겪는 여러 사연을 담는다. 프리즘처럼 각각 흩어진 사연들을 응집시키는 건 8살 소년 양양이 손에 든 카메라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소년이 카메라를 든 이유가 참 멋스럽다고 생각했다. 양양은 어느 날 아빠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우연히 옆집 여성을 마주친다. 양양은 한눈에 그녀의 우울을 알아차리지만 아빠는 도통 모르는 눈치다. 소년은 묻는다. “아빠가 보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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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평이 쏟아지는 와중에 <대홍수>를 보게 되었다. 듣던 대로 초반 30분 정도를 버티고 나니 점차 미래 신인류 생성 기술의 전말이 드러났다. 여자주인공이 아이에게 느끼는 ‘이모션’을 굳이 모성이라고 부른다면 이 영화는 ‘모성 신파’보다 ‘모성 호러’에 가깝다. 모성이란 여성이 출산과 함께 생물학적 본성으로 성스럽게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자의와 타의가 뒤섞여 무시무시하게 반복되는 수행을 통해 학습하는 것임을 집요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극한상황에서도 내 아이만 챙겨서는 안되고 출산하는 다른 여성, 옆집 노부부의 손녀까지 챙겨야 한다!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에 대한 서사의 원형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홍수>와 비교한다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소설을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각색한 ‘부성 신파’로 부를 만하다. 아들이 성장하는 데에 거의 기여한 바가 없는 아버지임에도
[임소연의 클로징] 귀엽지 않은 존재를 돌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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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승패가 아니야. 실력과 태도지.” 서바이벌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시즌 1에 출연했던 50년 경력의 대가 여경래 셰프가 전한 후일담은 동서고금 분야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진리다. 물론 영화사 별자리에 수놓인 스타들처럼 잊을 수 없는 한 작품, 한 장면, 한순간을 통해 영원으로 기억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반짝이는 재능을 넘어 자신이 해야 하는 일, 직업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한 이들이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무엇으로도 대체하거나 모방할 수 없는 존재 증명이 된다. 요 며칠 존경받는 영화계의 별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69년 연기 경력의 국민 배우 안성기와 헝가리의 시네아스트 벨러 터르의 타계 소식을 들으며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을 마주한다. 한 시절,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안성기는 영화배우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다. 담백한 두 문장 외에 그가 걸어온 세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윽고 두 문장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늘 거기 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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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재현은 ‘좌빠+자빠’다>라는 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2005년 세밑 <한겨레>에 실린 문화비평가 이재현의 새해맞이 에세이다. 여기서 그는 장구 익히기와 영어 공부를 다짐한다. “제대로 공부해보자고 맘을 먹으면 신이 나서 뇌에서 엔돌핀, 즉 마약이 마구 분비되는 것이다.” 그는 사석에서도 곧잘 늦깎이 공부가 즐겁다 했다. 요즘 내가 그렇다. 2025년 국가기술자격증(2급)을 두개 땄다. 그런다고 당장 뭐가 되진 않지만, 재미가 컸다. 공부라면 학을 뗐던 내가 말이다. 직업상담사 시험장에는 50대들도 여럿이었다. 사회조사분석사 시험장에선 나 빼고 다 2030이었다. 중간자와 최고령자를 오가며 인생의 묘미를 곱씹었다. 시험장인 신도중학교 3학년 1반의 급훈은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 그래, 문돌이인 내가 통계수학과 통계분석 프로그램까지 학습한 것도 즐거워서였지.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 합격자 발표를 기다린다. 삶은 기적인가. 다만 나이 먹으니 착잡한 일도
[김수민의 클로징] 반드시 크게 들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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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새삼 범사에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씨네21> 기준) 설문 대상 범주에 포함되지 않아 2025년 올해의 영화로 꼽진 못했지만, 올겨울 짙은 얼룩을 남긴 영화를 한편만 꼽자면 단연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의 <슈퍼 해피 포에버>였다. 202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만난 이 영화는 잔잔한 파도처럼 1년 내내 주변을 서성거리더니 마침내 국내 개봉한 덕분에 관객들과 함께 이 묘한 상실의 회상을 공유할 수 있었다. 감독 스스로 ‘어슬렁거리는 영화’라고 표현하던데, 이상하게 그 단어마저 참 다정한 울림으로 귓가를 맴돈다. 최근 이른바 뉴 제너레이션으로 불리는 일본의 젊은 감독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솔직히 이런 분류가 개별 영화를 감상하는 데 그다지 유효하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일련의 흐름이 감지되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순 없다.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2024년 <슈퍼 해피 포에버>를 소개하면서 “하마구치 류스케는 집요함으로, 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정의 씨앗, 행복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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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내려온 전승에는 사람들의 오래된 집단적 기억이 스며 있는 경우들이 많다. 그 전승이 비현실적인 신화나 우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는 그러한 집단 전체가 오랜 시간 공유하는 믿음이나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을 때가 많다. 따라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전승들을 조각조각 퍼즐처럼 모아 기억의 원형을 찾아내는 연구는 대단히 소중한 일이다. 그리고 단군왕검이라는 존재의 전승은 특히 한국인들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므로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찾아보면 흥미로운 요소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단군신화는 대부분 고려시대의 <삼국유사>혹은 <제왕운기>에 나온 버전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 이외에도 대대로 내려온 단군왕검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를 추론해볼 수 있는 자료와 편린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단군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신비적 존재의 이미지가 강해진다는 것
[홍기빈의 클로징] 단군왕검 연구를 망친 <환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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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같은 패턴으로 한해를 마감한다. 머릿속으로는 차분히 1년을 되돌아보는 고요하고 우아한 시간을 꿈꾸지만, 현실은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정리 안된 트리 장식마냥 슬그머니 늘어가는 업무에 쫓겨 우당탕탕이다. 연말이나 새해처럼 점을 찍을 수 있는 전환의 날이 되면 막연한 기대가 샘솟는다. 이날만 지나면 마법처럼 새로운 생활이 펼쳐질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에 취한다.
물론 현실에 마법은 없다. 변하고 싶다면 하루하루 꾸준히 쌓아가는 게 전부다. 다만 마법 같은 마술은 가능하다. 마술의 이름은 ‘되돌아보기’다. 하루아침에 새로운 내가 되긴 어려워도, 긴 호흡으로 거리를 두고 보면 오늘의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짬이 없어도 일부러, 우아하진 않아도 틈틈이 2025년을 곱씹는다.
되돌아보니 올해 사적으로 가장 큰 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다. 경황없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장례가 끝나버렸는데, 다들 시간이 지나면 슬픔이 몰려올 거라 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연말이 새해에 건네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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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존한다.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두개의 서로 반대 의미를 가진 모순적 문장들을 단순히 ‘그리고’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서 일관된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게 헤겔의 의도였을 테다. 하지만 후대 철학가들은 앞 문장에 중점을 두어 뒤 문장을 포섭하거나, 거꾸로 뒤 문장을 주축으로 앞 문장을 해석하는 전략을 취했다.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는 전자를 헤겔 우파라고 부르며, 진보주의적 성향을 띠는 후자를 헤겔 좌파라고 지칭한다. 나 같은 학자들, 특히 의지가 투영되는 세상(수많은 의지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세상)을 파악하고 해명하려는 학자들은 이 두축 사이에서 요동한다. 한편으론 벌어진 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보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납득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자신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늘 어딘가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준희의 클로징] 12월3일이 바꿔놓은 나, 그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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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불과 재>(이하 <불과 재>)는 극장의 구세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배수진을 치고 돌아왔다는 <불과 재>는 이미 전작들을 통해 검증된 오락적인 재미만큼이나 둘러싼 상황이 흥미롭다. 극장 산업의 침체와 쇠퇴 속에 천문학적인 자본이 투입, 집약된 결과물은 (의도나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향후 산업의 향방을 가를 지렛대의 운명을 부여받았다. 이 시점에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불과 재>가 처한 상황을 마케팅에 활용하길 꺼리지 않는다. 기자시사에서 영화보다 먼저 상영된 제작진의 편지에서 감독은 자신 있게 선언한다. “AI 생성 이미지를 하나도 쓰지 않은 <불과 재>가 뉴시네마가 되어야 한다”고. <불과 재>에선 이제 ‘아바타’ 기술이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인공 신체로 의식을 옮긴다는 핵심 설정은 어느새 소품에 가까운 장치가 됐다. <아바타: 물의 길>에서는 행성 생태계의 창조에 더 집중했고, 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아바타: 불과 재>와 뉴시네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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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대학교 공학 전환을 둘러싼 그간의 과정을 지켜보며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래커를 사용한 학생들의 평화적인 의사 표현을 일부 언론은 왜 폭력이라고 부를까? 여대와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남자들이 왜 유독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학생들을 비난할까? 학교는 학생 2889명과 교원 163명, 직원 124명의 의견을 1:1:1로 반영하는 것을 왜 ‘평등’이라고 말할까? 그러던 중 지난 12월3일 발표된 공학 전환 타당성에 관한 연구용역 결과를 전해 듣고 찾아본 50장짜리 슬라이드 자료는 충격적일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공학 전환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이 자료에서 유일하게 제시된 객관적인 근거는 재정 안정화 시뮬레이션뿐이다. “유학생 증가, 대학 위상 향상에 따른 연구비, 재정지원사업 등 전입 및 기부수입이 매년 2%씩 상승한다고 가정할 경우, 2040년까지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가 포함된 슬라이드 한장이다. 나머지 공학 전환의 근거는 대부분이 추정일 뿐 실증적인 데이
[임소연의 클로징] 어떤 연구용역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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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삶의 여러 요소보다 예술을 우선한 적이 없습니다…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예술을 통해 연결된 덕분에 나는 동료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나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술은 사람들의 기쁨과 고통을 담아냄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매개체입니다.”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카뮈는 말했다. 명사들의 통찰은 그 자체로도 빛나지만 어느 날 문득 내게 와닿아 의미가 되는, 연결의 순간이 있다. 요즘 연이어 터지는 사건, 사고를 마주하며 심란함에 빠져들 때, 잊고 있던 알베르 카뮈의 말이 희미한 손전등처럼 길을 비춘다.
‘어느 날 문득’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땐 우연의 연속이지만 긴 호흡으로 되돌아보면 그 모든 우연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을 필연 속에 있다. 뜬금없이 알베르 카뮈의 말이 떠올랐던 건 최근 연이어 만난 영화들 덕분이기도 하다. 미야케 쇼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감화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