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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마치 코로나19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취약한 이들의 사망 원인 가운데 무척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현재진행형의 위협이다. 단지 미디어가 다루지 않을 뿐이고, 국가가 관심을 거두었을 따름이다. 특정 위협에 대한 사회의 과민한 반응도 과소한 관심도 이들이 어찌 하느냐에 달렸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우리말로는 꽤 이상한 용어에 짓눌려 살았던 지난 몇년. 그동안 우리가 알던 사회라는 건 꽤 많이 파괴됐다. 거리두기를 거두었어도 한번 벌어지기 시작한 거리는 도통 좁혀지지 않는다. 물론 단지 얼마간의 강력한 방역정책 탓만도 아니고 오로지 코로나19가 원흉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진행되고 있던 사회의 해체를 가속화시켰을 따름이다. ‘언택트’라는 더 괴이했던 용어에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수시로 ‘접속’하되 여간해선 ‘접촉’하지 않는 우리의 사회적 변형을 꽤 정확히 찌르고 든다는 점일 테다.
세기말의 분위기로 접어들던 199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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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가 뭐예요? 살면서 받아온 질문을 리스트로 짠다면 상당히 앞자리에 있을 텐데 여전히 답하기 쉽지 않다. 어렵다기보다는 애매해서다. 사전을 뒤져보니 ‘경제적 이익이 없어도 즐거움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하는 좋아하는 일’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당장 떠오르는 건 독서와 영화 감상인데 대한민국 모두의 공식 취미인지라 ‘취미 없음’이나 다름없어 보일까 매번 소심하게 구석으로 밀어둔다.
그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쏟는 일이라면 공상(이라 포장하고픈 망상)이다. 멍하니 혼자만의 세계로 떠나는 걸 시도 때도 없이 즐기는 편이다. 연말을 맞아 올해의 영화 리스트를 뒤적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빠진다. 놓친 영화가 참 많구나. 이건 좀 길고 어려울 것 같은데. 이중에 10년이 지나도 다시 소환될 영화가 몇편이나 될까. 올해 가장 좋았다는 영화들을 정리하다 문득 물색없이 중얼거린다. 아, 이런 영화들만 하루 종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잠깐. 진짜 좋을까?
영화기자
[송경원 편집장] 별 셋 짜리 영화를 위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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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3일 과학책방 갈다가 주최한 ‘사이언스 미디어 페스티벌’에서 차진엽 안무가의 <원형하는 몸>을 영상으로 봤다. 지난해에 같은 제목으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공연을 봤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무대 위가 아닌 영상 속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얼음이었다. 굵은 줄로 동여매진 얼음덩어리에서는 벌써부터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밑에 물방울을 받아내는 투명한 그릇이 놓여 있다. 공연 설명에 따르면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이 만드는 소리와 움직임을 무대 위의 청각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로 증폭하여 구현하는 기술이 활용됐다고 한다. 예술과 과학의 융합이다.
영상은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영상의 전반부에서 흰옷을 입은 무용가의 움직임은 매우 대칭적이며 반복적이다. 유연한 움직임 덕분에 마치 물속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손이나 다리, 손가락의 움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여신이 되기보다 물방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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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앞뒤로 뭔가 생략된 느낌이다. 이렇게 늘려보면 어떨까. 관심 있는 만큼 알고 싶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에 빠진다.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관심 있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는 만큼 궁금하다. 아이가 태어난 뒤 작은 변화가 있다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거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더니 어느샌가 눈에 밟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과거의 내게 거리에 나온 아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에 가까웠다. 지금은 이 구역에 유모차가 몇대인지부터 파악하고 각자의 꼴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시선을 사로잡는다. 세상은 마치 여러 겹으로 포개진 그림 같아서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에 따라 매번 새로운 색깔로 빛난다. 지루할 틈이 없다.
극장가에 단비를 내린 <서울의 봄>의 흥행세를 분석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여러 리포트에서 2030 관객들이 극장을 찾은 것을 중요한 동
[송경원 편집장] 그 많던 관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많은 관객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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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들의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은 평균 ‘18%, 40%’다. 한국은 ‘9%, 40%’다. 보험료율을 대폭 올리지 않으면 기금이 바닥나는 시점이 앞당겨지고 3~4할대 보험료율을 짊어지는 날이 온다. 그렇지만 요즘, 보험료율은 조금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무려 50%로 올리자는 주장이 연금 개혁을 교란한다. 한국 국민연금의 보장성이 약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소득대체율이 낮아서가 아니다. 사각지대가 넓고 가입 기간이 짧은 사람이 많아서이다.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면 수혜 계층은 중상위층으로 쏠릴 뿐이다. 한국 사회는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마다 ‘더 있는 쪽’부터 챙기는 데 스스럼이 없다.
20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정부가 내놓은 세제 개편안에 “부자는 빼고 서민만 증세하냐!”는 여론이 들끓었다. 헛소리였다. 명목 세율은 그대로 두고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방식의 증세였는데, 고소득자일수록 부담이 확 늘고 연봉 3450만원 소득자는 약간 더 부담하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콘크리트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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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극장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끝나지만 어떤 영화들은 스크린이 꺼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전자의 영화들은 부스러기가 없다. 친절한 설명과 깔끔한 마무리로 이야기의 매듭을 묶어 극장 안의 쾌락을 보장한다. 반면 후자의 영화들은 스크린의 막을 최대한 얇게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일상이란 이유로 망각했던 시간은 카메라에 포착되고, 스크린 바깥으로 스며나와 또 다른 진실로 피어난다. 이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는 태도와 지향의 차이다. 하지만 평을 업으로 삼는 이들은 대체로 후자의 영화에 끌리는데, 자신의 감흥을 고백할 자리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가 구태여 영화라는 허구를 마주하는 건 옆자리의 누군가에게(혹은 세상에) 말을 걸기 위해서다.
흑백으로 나누면 세상 모든 게 명쾌하다. 선과 악, 적과 아군, 옳고 그름으로 나뉜 이분법에 갈등과 충돌은 있어도 미혹과 근심은 없다. <서울의 봄>을 둘러싼 사
[송경원 편집장] 봄이 오면 (feat. 김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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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도시의 문화행사에 강연을 하러 갔다. 기차 시간을 여유 있게 잡은 덕분에 행사장에 일찍 도착했다. 점심도 먹었겠다, 강연 장소에 열린 북 페어를 기분 좋게 구경했다. 몰랐던 지역 출판사의 책과 동네 책방 사장님들이 세심하게 골라온 책, 엽서와 스티커, 심지어 그것들을 담을 천 가방까지 샀다. 내 책을 판매하는 부스들도 있었다. 예정된 강연을 고려해 내놓은 것이려니 하면서도 우쭐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중 한 책방 부스에서 짐짓 무심한 척 그림책들을 뒤적이는데, 옆에서 한 어린이가 한참 들여다보던 그림책을 샀다. 사장님은 본인이 그 책의 작가라면서 책에 사인을 해주셨다. 나도 그 책을 사면서 사인을 청했다. 내 이름을 대자 “혹시?” 하고 나와 내 책을 번갈아 보는 작가님한테, 나는 전부터 한번은 해보고 싶던 것을 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기. 곧장 너무 창피해져서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옆에 있던 청소년 둘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자 작가님은 내 책을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선생님이라는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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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누가 영화를 봐?” 요즘 자주 듣는 가장 뼈아픈 말이다. 비관론자의 시선으로 논하자면 영화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비현실적인 사건, 사고가 현실에서 끊이지 않을 때 자조와 씁쓸함이 뒤섞인 탄식이 불현듯 터져나온다. 같은 말을 굳이 긍정 버전으로 짜내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볼 것이 넘쳐나 영화를 볼 틈이 없다. 써놓고 보니 더 절망적이다. 재미있고 감동적인 순간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극장은 너무 멀고 느리고 답답하다. (영화잡지 편집장이 이런 발언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최근 내 가슴을 울렸던 순간들도 모두 극장 바깥에 있었다.
첫 번째는 볼 때마다 절로 겸손해지는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3>다. 이번 시즌에선 김마스타가 등장했을 때 문자 그대로 압도당했다. 허스키 보이스의 존재감이나 아우라 때문만은 아니다. 정확히는 그의 멘트에 반했다. “우리는 목숨 걸고 안 합니다. 인생을 걸고 하는 거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송경원 편집장] 세번의 울림, 찰나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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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치권력의 핵심 중 핵심으로 알려진 모 의원이 속칭 ‘험지 출마’ 요구를 받았다. 그의 응답은 실로 호기로웠다. 지역구 지지자로 이뤄진 산악회 창립기념식을 연 것이다. 100대에 가까운 버스가 동원됐고 수천명이 체육관에 운집했다. 한때 엄청난 욕을 먹었던 광고,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로 답했습니다”가 떠올랐다. 멸사봉공의 자세로 사지를 향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파란 눈의 대통령”이 던진 말에, “웃기시네요”라고 답한 격이다. 실제로 각종 언론 보도에 올라온 사진 속에서 그는 여봐라는 듯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건 솔직히 관심은 없다. 대단한 뭐라도 되는 양 자신이 하는 모든 말에 엄청난 무게를 싣는 그도 우습고, 양손을 들어 환호하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마이크를 쥐고 부흥사 행세를 하는 또 다른 그도 마뜩잖다. 나는 그저,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듯한 이 모든 광경이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보통의 한국인과는 다른 외양을 하고 있는,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거꾸로 가는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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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천재와 심리학 교수 사이의 우정을 그린 영화 <굿 윌 헌팅>(1998)에서 현명한 어른 숀(로빈 윌리엄스)은 진심 어린 말로 윌(맷 데이먼)의 닫힌 마음을 두드린다. 이 장면의 힘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내용에 있지 않다. 정답은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좌절하는 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이해와 공감은 서로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이토록 먼 우주를 건널 에너지를 확보할 방법은 마음을 연료 삼아 불태우는 것뿐이다. 내용보다 중요한 건 전달되는 방식과 타이밍, 그리고 기어코 가닿겠다는 간절한 의지다. 숀은 “나도 아는 게 많지 않지만 (너를 평가하는) 이 기록들 다 헛소리야”라고 운을 띄운 뒤 낮은 목소리로 반복해서 읊조린다. 숀의 눈빛, 표정, 몸짓이 온전히 윌을 향할 때 비로소 윌에게서 출발한 (마음의) 파동은 서로 다른 처지와 경험, 세대를 초월해 숀에게 당도한다
[송경원 편집장] 마블은 함정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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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팩터(form factor)’라는 용어가 있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크기나 모양 등 물리적 사양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이제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기기의 제품 외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예를 들어 2G 시대 휴대폰의 형태가 플립, 폴더, 슬라이드 등 다양했다면 (심지어 ‘가로 본능’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폼팩터가 등장하기도 했다) 3G 시대 이후의 스마트폰은 한동안 터치스크린 기능을 장착한 큰 화면과 얇은 베젤을 중심으로 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유사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인간의 외모가 그렇듯 사물의 외형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많은 전문가들이 폼팩터가 단순히 제품의 외적인 요소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잘 알려진 대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PC와 아이패드를 각각 트럭과 승용차에 비유한 적이 있다. 트럭과 승용차는 확연히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운전자의 경험 역시 완전히 달라진다. 사용자 경험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패드가 약속한 새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리얼하지 않을수록 혁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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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수 성시경과 나얼이 함께한 신곡 <잠시라도 우리>에 꽂혔다. 취향 저격한 노래는 물론이고 뮤직비디오의 애잔한 감성이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눈으로 듣는 것까지 즐거운 건 오랜만이기에 음원 사이트 대신 유튜브에서 무한 반복 감상 중이다. 흰옷을 입은 여성(천우희)이 손거울로 햇살을 반사시켜 눈가를 간지럽힌다. 밝은 꿈과 어두운 현실이 몇 차례 교차한 뒤 멀리서 들리는 헬기 소리, 흔들리는 물컵 그리고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는 여성. 이윽고 나지막이 읊조리듯 노래가 시작된다. “가까스레 잠이 들다 애쓰던 잠은 떠났고…” 건조한 가을바람처럼 까슬거리는 단어를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감싸는 이 탁월한 도입부는 우리를 순식간에 다른 시공간으로 초대한 뒤 무장해제시킨다. (자매품으로 <너의 모든 순간>의 “이윽고…”가 있다.) 자주 쓰지 않아 살짝 녹슨 단어로 조탁한 가사와 친숙한 멜로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완벽한 조합.
짧은 영상이 대세 영상 콘텐츠로
[송경원 편집장] 상상력과 회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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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통이 옛날부터 너무 보수적이었다는 말이 있더라.”(어느 정치 평론가) “법조 기자할 때 대화를 나눠본 윤 검사는 전혀 극우적이지 않았다.”(모 언론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성향을 두고 정치권 주변 사람들은 ‘선천설’과 ‘후천설’로 나뉜다. 나는 후자다. 보수우익적이다 싶은 것을 강박적으로 모아놓은 정책 체계가 되레 수상하다. 이명박씨와 박근혜씨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거울 보고 작심한 사람 같다. “어이 브러더, 이제 고만 선택해라.” 여당의 보궐선거 참패 이후 ‘국정기조 전환’에 관심이 모인다. 나는 그런 것은 없거나 있어도 총선 전까지라는 쪽에 건다. 정치9단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임기 중반 전두환 세력을 단죄하고 총선에서 예상을 웃도는 성과를 올렸지만, 그 이후 야당 의원 빼가기, 공안 정국 조성,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로 치달았다. 지지 기반이 어느 쪽이냐에 달린 일이다. ‘호랑이를 잡는다’는 포부도 ‘호랑이굴’이라는 조건을 이기지 못했다.
“(민주당에서) 이탈한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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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고 지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싶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인생의 등대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지난 10여년 영화주간지 기자 일을 하면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장면 하나, 대사 하나가 머릿속에 자동 재생되어 등을 다독여주었다. 소년의 성장을 12년 동안 촬영한 <보이후드>(2014)의 마지막, 어느덧 성인이 된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가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난다. 자식들이 다 떠나고 다시 혼자 살게 된 엄마 올리비아(퍼트리샤 아켓)는 속없이 즐거워하는 아들이 못마땅하다. 올리비아는 급기야 복받친 감정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며 나지막이 되뇐다.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허망함으로 쪼개진 심장 사이 스며나온 진득한 감정은 아직도 내 마음속 얼룩으로 남아 있다.
얼룩이란 게 참 희한한 것이 관점에 따라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라며 울음을 터트리던 올리비아의 한탄은
[송경원 편집장] 끝과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