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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인가?” 기사에 적힌 그의 나이가 낯설다.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지회 차헌호 지회장. 2015년 아사히글라스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원청은 하청 기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서울에 직장이 잡히면서 내가 구미를 떠나던 무렵이다. 이후 그는 내 머릿속에서 옛날 그 나이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최근 대법원은 원청이 해고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9년 투쟁 끝에 그들은 원청 정규직으로 복귀했다.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태 당시 바로 옆 공장 아사히글라스는 작업을 강행했다. 차헌호는 이를 세상에 알린 제보자였지만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노동자는 서너명이었다. 그 공장은 불량품을 만든 노동자에게 빨간 징벌 조끼를 입히는 곳이었고, 구미 4공단은 민주노조의 불모지였다. 소수 인원으로 노출되면 노조가 설 자리는 없어진다. 반면 당시 지방의원이던 나의 활동은 노골적이었다. 집회에서 때로는 노조 간부보다 더한 강경 발언을 해 지역 재계
[김수민의 클로징] 두 세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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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현역 시절 일어난 일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김연아 선수의 한마디를 처음 들었을 때 ‘우문현답’이란 고사성어를 재연드라마로 시청하는 기분이었다. 격언 탄생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마주하며 실력을 갈고닦아 경지에 오른 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저런 걸까 하는 경탄과 다른 사람도 아닌 ‘김연아’의 말이니까 가치를 지니는 거 아니겠냐는 배배 꼬인 심보가 동시에 교차했다. 더위에 지친 탓인지 요즘 부쩍 ‘이걸 꼭 해야 하는 걸까’라는 잡념 속에 피곤한 나날이 이어지는 중이다. 더 편한 길이 있는데 괜히 사서 고생하는 것 같고,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는 바보짓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는다. 그럴 때 문득 ‘그냥 하는 거지’란 말이 떠오르면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할 일을 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마감에 허덕이는 목요일, 유튜브 쇼츠로 잠시 도망쳐 이런저런 영상을 뒤적이다가 오래전 예능프로그램에 나온 법정 스님을 봤다. ‘우리는 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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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한때 ‘무정부주의’로 번역되었던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파괴, 테러, 방화, 무질서 등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아나키즘은 19세기 이래로 폭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운동의 한 조류로서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도 이를 공산주의 이상으로 과거의 유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유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등 기존의 거의 모든 정치적 이념이 파산하거나 거의 작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에서 아나키즘은 대단히 매력적인, 아니 어쩌면 거의 유일의 출구가 될 수 있는 정치사상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나키즘은 그 장구한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은 면모를 띠고 변해온 사상이기 때문에 파괴, 테러, 무질서의 모습만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나키즘을 정의하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한마디로 ‘소외된 일체의 외적 권위에 대한 거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신도, 주인도 없다’(No God, No Master)라는 간명한 구
[홍기빈의 클로징] 아나키즘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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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널 지켜줄게. 넌 혼자가 아니야.” 극장 가가 ‘하츄핑’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개봉 3주차 누적 관객 70만명 돌파를 앞둔 국내 애니메 이션의 돌풍은 좋은 기사 거리이긴 하다. 아이들 때문에 갔다가 엄마아빠가 울고 나왔다든지, 공주 분장을 하고 관람하는 아이들이 캐릭터 대사 하나하나에 답하며 스크린과 대화를 나눈다는 에피소드는 건너 듣고 있으면 꽤 재미있다. 다만 ‘하츄핑’ 열풍의 실제 당사자가 되면 강 건너 불 보듯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이 다. 사랑에 빠진 존재 옆에서 동행한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지 마시길. (언론 시사도 제대로 못 챙겨보는 내가 <사랑의 하츄핑>을 이미 2번이나 봤다.)
‘애니메이션 애호가’ 입장에서 기분 좋은 소식 사이사이 이상한 포인트로 어그로를 끄는 기사들이 보인다. ‘<리볼버>, <하츄핑>에 참패…’, ‘<하츄핑>, 전도연 이겼다’ 같은 제목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
[송경원 편집장] 이해와 애정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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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오로지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영화 <기적의 시작>이 공영방송 KBS에, 그것도 광복절에 편성된다고 한다. 이 글이 나갈 시점엔 이미 전파를 타고 난 뒷일이 될 듯하지만, 본래 일정표로는 금요일인 <독립영화관>을 하루 앞당겨 추가 편성하면서까지, 제작진이 방송권 구매를 거부하자 담당 국장이 기안하여 전결하는 기괴한 방식으로, 끝끝내 방송을 고집하고 있다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역사에 무지한 광신도들의 기적(奇蹟)을 작위하기 위해 다수가 기함(氣陷)할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 영화로 의도했던 건 실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헛웃음을 자아내는 허구적 코미디가 아닐까 의심케 하는 대목 한 가지. 제작자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 독립영화 인증을 신청했지만 영진위는 “객관성 결여와 설득력 있는 논증 제시 부족” 등을 이유로 인정을 거부했다는 것. 그런 영화가 공영방송 KBS의 <독립영화관>에
[정준희의 클로징] 기적의 시작, 파멸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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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다.” 우울할 때 더 우울함으로 파고들어 바닥을 찍은 후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인 나는, 요즘처럼 현실이 버거울 땐 암울한 다크 판타지의 결정체 <베르세르크>를 종종 꺼내 본다. 여기 시궁창 같은 마을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가 있다. 소녀는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동화처럼 요정과 광전사가 나타난다. 실종되었던 동네 언니가 요정이 되어 나타나자 소녀는 자신을 구원해줄 탈출구라 여기고 쉽게 따라나선다. 하지만 언니는 실은 요정의 모습을 한 괴물이었고, 이때 주인공인 광전사 가츠가 난입하여 괴물을 사냥한다. 그러자 소녀는 이번엔 가츠에게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광전사를 둘러싼 세계 역시 괴물들과 영원한 싸움을 이어가는, 끔찍한 지옥이다. 갈피를 잃은 소녀에게 가츠는 냉혹하게 내뱉는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종종 말의 앞뒤를 잘라 본래 의도와 달리 편의적으로 사용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한국이 싫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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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들른 박물관에서 봤던 개미들을 잊을 수 없다. 한구석에 얕게 물이 채워진 수조가 있고 그 안에 큰 잎사귀가 여럿 달린 나뭇가지가 꽂힌 유리병이 두어개가 놓여 있었다. 그 사이를 다리처럼 연결하고 있는 베이지색 굵은 로프와 함께 거의 모든 잎의 가장자리가 톱니바퀴처럼 뜯겨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이 전시물이 뭘까 의아해하며 가까이 가보니 수조의 한쪽에 뚫린 구멍을 두고 로프 위를 양방향으로 줄지어 가는 개미들이 보였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같기도 하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동하는 부품 같기도 했다. 잠깐 동안 진짜 개미가 아니라 혹시 ‘로봇 개미’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작동하는 자연을 보여주는 전시에 감탄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영상 촬영을 하다 보니 다른 모습의 개미들이 눈에 띄었다. 길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 끝쪽에 자기 몸집보다 큰 잎사귀 조각을 물고 모여 있는 개미 무리였다. 가만히 보니
[임소연의 클로징] 언캐니 밸리에 빠진 개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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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표지는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희생>의 한 장면이다. 예술영화의 아이콘으로 불러도 손색없을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지만 정작 영화를 극장에서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나중에 비디오로 보긴 했지만 제대로 본 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보면서 많이 졸기도 했지만, <희생>은 극장이란 공간의 제약을 필요로 하는 종류의 영화기 때문이다. 똑같이 졸아도 극장에서 시간을 놓치며 졸아야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영화. 이런 이유로 <희생>을 향한 찬사는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도시 전설을 연상시킨다. 예술영화를 향한 존중과 동경과 허세까지 포함해 <희생>의 아우라는 지난 30년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왔다.
<희생>이 8월21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국내 관객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표지에 싣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최초 개봉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나오지도 않고, 화제작도 아니기에 표지로 다루기엔 꽤 난감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지루하고 어렵고 낯설고 불편하여 마침내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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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집단의 문제로 축소되는 체제다. 이에 반해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 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징병제는 최선의 선택’, 정희진, <한겨레> 2013년 10월11일) 한때 징병제는 국민을 상명하복 질서에 총동원하고 전 사회를 병영화했다. 하지만 군에 대한 문민 통제가 뿌리내릴수록 징병제는 민주주의와 어울리게 된다. 병사 하나하나를 무사히 민간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 국가와 군의 가장 중요한 작전이 된 원동력은, 군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 온 국민에게서 나왔다.
한국 사회는 최근 연달아 작전에 실패했다. 지난 5월 수류탄 훈련 도중 훈련병이 사망하고 부사관은 중상을 입었다. 2019년 실수류탄 훈련이 부활했을 때 시민들은 토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 어느 훈련병은 완전군장 차림으로 구보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다 숨졌다. 완전군장 상태에서는 걷기만 한다는 건 20여년 전 훈련소에도 있
[김수민의 클로징] 돌아오지 않는 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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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실을 이길 수 없다, 는 말이 이렇게 와닿은 적 없는 7월이었다. 7월1일, 시청역에서 발생한 끔찍한 교통사고는 9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7월11일, 긴급방송으로 진행된 1060만 유튜버 쯔양의 피해 사실 폭로는 그의 밝은 에너지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이어지는 고발 속에 사람들은 사이버 렉카들의 추악함이 상식 선 따윈 가뿐히 넘어설 수 있음을 확인했다. 7월13일, 홍명보 국가대표 감독의 기습 선임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이번 사태의 파장이 축구 팬들에 그치지 않는 건 책임지지 않는 결정권자에 좌우되는 우리 사회의 불공정, 불투명한 시스템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7월24일, 법인카드 유용의 신세계를 보여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의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청문회는 현 정부의 현실 인식을 단적으로 표상한다. 이윽고 7월31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에 이은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임명은 사실상 도덕적 파탄 선언이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도파민 중독 사회, 뜻밖의 해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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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다. 카를 마르크스 하면 ‘자본주의의 붕괴’다. 소스타인 베블런 하면 ‘과시적 소비’다. 하지만 <국부론>에는 ‘보이지 않는 손’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으며, <자본론>에는 ‘자본주의의 붕괴’ 이야기가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한계급론>에서 정말로 중요한 개념은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모방적 소비’다.
‘과시적 소비’의 아이디어는 꽤 널리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 피지배계급과는 다른 종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실제 생활에는 전혀 쓸데가 없는 품목에 엄청난 돈을 지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품목들– 예를 들어 1억원짜리 ‘만수르 세트’- 에 물 쓰듯 돈을 쓰는 소비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조금 험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돈지랄’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유
[홍기빈의 클로징] '과시적 소비'가 아니라 '모방적 소비'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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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던 배우나 감독을 직접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요.” 직업이 영화기자라고 밝혔을 때 빠지지 않고 듣는 말이다. 매번 나를 곤란하게 하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질문을 업으로 삼은 기자는 많은 이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특권을 누린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누군가를 꼭 만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던 적은 거의 없었다. 감정 기복이 적은 편이라(실은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상태을 기본으로 하는 인간 ‘우울이’가 바로 나다) 주변에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 악영향일까. 무언가를 강렬하게 동경하는 마음을 품어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때는 좋아하는 대상을 좀처럼 발견하지 못하는 무딘 마음이 기자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마음이 가벼워진 건 형형색색 개성 넘치는 팬심들을 마주하면서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일치했다면 당연히 행복했겠지만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조금만 애정을 기울여 주변을 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이미 충만하여) 전하지 못해도 좋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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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평론가들은 어떻게 살까 궁금해하곤 한다. 극장 영화만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그리고 영상물에 대한 접근의 지리적·시간적 경계가 사라지다 보니, 관련 평론가들이 다루어야 할 물량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렇다면 그만큼 일자리와 수입이 늘어나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못할 게 거의 확실하다. 평론이란 결국 (책, 잡지, 신문, 방송 및 금전적 보상이 있는 여타의 공개적 발언 기회를 포함한) ‘원고지 매수’에 의해 성과가 가늠되는 직업 영역인 까닭이다. 비평이 실리는 활자매체의 수와 열독률이 급감하는 조건에서, 속칭 ‘GV’(관객과의 만남)라든가 유튜브 등으로 이동해버린 평론의 장이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고 보긴 어려울 듯하다.그래도 사람들은 종종 ‘별점’을 두고 이야기하곤 한다. 별점을 짜게 주기로 소문난 어떤 평론가가 다섯개 혹은 열개의 별들 가운데 절반 넘게 색칠을 해주면, 잠시간 웅성거림이 나타난다. 20자 비평 속에 ‘명징’과 ‘직조’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일대
[정준희의 클로징] 논평은 넘쳐나지만 평론이 어려워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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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이르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첫 번째 길은 흉내낼 수 없는 개성을 발산한 뒤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초신성처럼 막대한 에너지를 폭발시켜 세상을 환하게 빛낸 뒤 거짓말처럼 사라진 작품들. 예를 들면 1980년대 과잉의 낭만이 녹아든 <파이브 스타 스토리>는 명목상으론 아직 완결나지 않았지만 사실 이미 쓸모를 다했다.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함에 그리움이 깃드는 법. 그 시절에만 허락된 어떤 반짝임은 아스라이 사라짐으로써 전설로 거듭난다.
두 번째는 세월의 모래바람을 꿋꿋이 버텨 시간을 이겨내는, 기적 같은 지속의 길이다. 무려 41년째 연재 중인 <유리가면>을 비롯해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미완성으로 남은 <베르세르크>, 권을 거듭할수록 챔피언에서 멀어져가는 <더 파이팅> 등 일본 만화계에서 장기 연재는 드물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본의 만화 연재 시스템은 인기작의 경우 애니메이션, 게임 등 다양하게 확장되는 구조라 작가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추리, 아니 물리 탐정 코난과의 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