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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하는 몸-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를 보고 왔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자면 단연 장파 작가의 <여성/형상: Mama 연작>이다. 붉은색의 살덩어리에 눈이 최소한 3개 이상인 괴물을 그린 그림이다. 다리에 엉덩이와 가슴만 달린 형상의 작은 드로잉도 눈에 띈다. 작가 이름을 검색해보니 다른 작품들도 괴물 천지다. 대개 붉은색이고 가슴과 눈, 이빨, 생식기 등이 도드라져 보인다. 이 낯익은 느낌은 뭐지? 바로 <서브스턴스>의 ‘몬스트로 엘리자수’다! 수(마거릿 퀄리)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의 욕망이 탄생시킨 괴물 말이다. 영화 마지막에 하늘색 드레스에 몸을 구겨넣은 채 가면을 쓰고 기어코 무대 위로 올라가 관객들에게 피를 뿜어대던 그 미끈미끈한 괴물과 장파 작가의 작품들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수와 엘리자베스의 살벌한 난투극을 지켜보면서도 둘이 서로 화해하거나 타협하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내 앞에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떡하니
[임소연의 클로징] 같은 괴물, 다른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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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선택하러 여기 온 게 아니야. 이미 선택은 했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여기 온 거야.” <매트릭스2-리로디드>에서 예언자 오라클을 만난 네오는 묻는다. 당신이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면,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 선문답이 근래 종종 떠오른다. 자칭 신중한, 타칭 우유부단한 성격의 나는 현대인이 모두 일정 정도의 선택불가 증후군을 앓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 중이다. 너무 많은 정보와 선택지가 주어지면 때때로 그냥 멈추고 주저앉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OTT에 접속한 뒤 메뉴만 살피다 지쳐 결국 작품은 보지 않기’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좀처럼 결정을 못 내리는 건 팔할 이상이 환경 탓이라고 소심하게 변명해본다.
어른이 되면 선택에 대한 확신이 들까 막연한 기대를 한 적도 있다. 나이 들고 보니 그건 단호함이 아니라 후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선택에서 이해까지 납득에 이르는 경로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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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를 일으킨 이후 복귀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했던 한 배우의 부음을 접하며 또 한번 생각했다. ‘정치는 악당의 도피처’라고. 몇몇 정치인은 사회 일각에 자신이 무죄인 세계를 건설했다. 아직 다수 대중이 범죄자 정치인의 무죄를 믿는 경우는 없지만, 30% 이상의 대통령 탄핵 반대율은 불길한 징후다. 다른 죄도 아닌 내란이고, 다중이 범행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나.
그래도 가끔 웃을 수 있는 건 윤석열이 흥미롭도록 가소로워서이다. 여의치 않으면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가 튀어나온다. 더이상 체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자진 출석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근거는 대지 못하고 “음모론 제기가 아니라 팩트 확인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전직 육군첩보부대(HID)도 진상 규명에 나서는 팩트 체크의 강국인가. 바꿔친 카드도 있다. “경고성 계엄이었다”를 접고 “국민에게 호소한 것”이라 밝혔다. ‘폭동: 다수인이 결합한 폭행과 협박’ 가운데 ‘협박’을 인정하는 꼴을 피하려는 것
[김수민의 클로징] 범죄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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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마자 느낌이 왔다. 아, 저 발언은 어떤 식으로든 당분간 회자되겠구나. 탄핵심판 내내 이어진 윤석열 변호인단의 장황하고 비논리적인 주장들은 마침내 최후 변론 한마디로 축약 수렴됐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단호하고 겸손하며 확신에 찬, 시대착오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장소 착오적이라 해야 할까? 마치 뉴스에서 자주 봤던 북한이나 중국 소식과 묘한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무려 84일 동안 반복된 내란 수괴의 계엄 계몽론은 저 화룡점정의 문장을 통해 끝내 목적을 달성했다. (솔직히 ‘계몽되었다’는 참담한 고백조차 온전히 진심이라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주변 몇명이라도 계몽에 성공하셨다니 함께 자리하신 그분께 심심한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고 외치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실은 ‘말’에는 죄가 없다. 다만 그것이 발화되는 방식과 장소, 상황과 맥락이 문제다. 돌이켜보면 익숙한 희극이 때론 비극처럼 느껴지고, 반대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앞으로도 계몽당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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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홍수를 이룬다.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는 모두 중요한 이야기로 여겨져 눈은 치켜뜨고 귀는 쫑긋. 그저 경청할 뿐이다. 그럼에도 거의 지적되지 않는 듯한 문제가 있어 무지를 무릅쓰고 약간의 말을 덧붙인다. 인공지능으로 인한 집단적인 인간 지성의 퇴화라는 문제다. 얼마 전 한 대학생이(대학원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챗지피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간’(mesotes)과 유학의 ‘중용’(中庸)을 비교해줘”라는 질문을 입력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충격이 밀려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서양과 동양의 고대 철학 모두에 박식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야 하고 여러 복잡한 층위와 맥락에서 사유를 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질문의 맥락에 따라서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챗지피티는 그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여 두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명하게 개조식으로 정리해냈을 뿐만 아니라 무리한
[홍기빈의 클로징]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의 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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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기자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직업적 사치 중 하나는 아마도 감독과의 인터뷰가 아닐까 싶다. 동시에, 영화를 사이에 두고 감독과 직접 대화를 나눈다는 건 여러모로 곤란해서 외면하고 싶은 작업이기도 하다. 어떤 감독님은 말을 너무 아끼거나 도무지 의중을 짐작할 수가 없어 인터뷰가 이어질수록 우리를 미궁 속에 밀어넣는다. 반대로 너무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도 위험하다. 정작 영화에선 보이지 않던 것들마저 부연 설명을 통해 보충될 때 이것이 온전한 감상인지, 아니면 현란한 언어에 설득되어버린 건지 구분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셀로판지마냥 얇디얇은 귀를 지닌 나는 진정성 어린 감독들의 설명에 빠져 시큰둥했던 영화가 사랑스러워 보였던 기억이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영화를 향한 ‘말’은 애초부터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사족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매우 희귀한 케이스다. 자신의 영화를 해설하는 봉준호의 언어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이 대체로 딱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봉준호 감독을 만났습니다. from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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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쓰고 쉽게 말하라. 효과적인 소통의 필수조건이다. 나처럼 미디어에서 활동하며 종종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에 불려나가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원칙이다. 여기서 ‘대중’은 소위 엘리트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대중이지만은 않다. ‘불특정다수’로서의 대중이다. 내 말을 듣고 글을 읽는 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전문성과 요구를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말을 걸고 글을 적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들은 대개 이질적인 집단이다. 각자의 지식수준과 범위 그리고 취향까지 천차만별인 청중을 상대하려면 결국 짧게 쓰고 쉽게 말하는 게 최선의 방책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른바 ‘대중매체’ 시대에는 이 방책이 종종 “시청자가 중학교 2학년 수준이라고 전제하라”는 실천적 금언으로 표현되곤 했다. 비록 미디어 연구자이기는 해도, 또는 오히려 그래선지 나는 이 말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다. 시청자 가운데 하나인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였고, 평균 학력이나 지식수준이 과거에 비
[정준희의 클로징] 미디어와 대중(1) 그들은 여전히 ‘중2’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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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고 왔어. 어림짐작으로도 수천번은 건넸을 이 습관 같은 대답이 근래 전혀 다른 두께로 다가온다. 예전엔 영화 보고 오면 그 영화에 대한 것만 기억에 남았다. ‘영화’가 주인공이고 관람은 당연한 기본값이었다. 영화는 보는 매체니까. 최근엔 본 내용만큼이나 점점 ‘보았다’는 행위 자체가 기억에 남는다.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못지않게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그날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 영화와 만난 그날, 극장엔 몇명이 있었는지, 날씨는 추웠는지 더웠는지, 어떤 기분으로 극장에 들어갔는지에 따라 영화와 얽힌(혹은 영화로부터 물려받은) 기억마저 달라지는 것이다.
이번주는 두번 극장에 다녀왔다. 공교롭게 두편의 영화가 다 공간을 중심으로 기억과 존재를 쌓아나가는 작품이었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는 한 장소에서 켜켜이 쌓이는 기억들을 축적하여, 삶의 의미를 꿰뚫고자 시도한다. 공간, 나아가 시점마저 고정시킨 채 세상을 관통하려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모험심은 새삼 ‘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극장에 다녀왔습니다 영화를 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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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오는 2월24일부터 3월2일까지 진행된다. 이 행사가 처음 열렸던 해에 <삼키기 연습>의 박지니 작가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우리는 각각 섭식장애와 성형의 당사자이자 작가로 만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섭식장애와 성형 둘 다 주로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외모와 관련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갈수록 놀랍게도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다. 어쨌거나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였다. 우리가 이렇게 다 해봤고 이만큼 가봤으니 당신들은 부디…!
그즈음 나는 ‘선망국’(先亡國)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박 작가가 라이프 스토리 다이어리(Life Stories Diaries) 블로그에 쓴 글에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신조어다. 검색하다보니 조한혜정 교수가 쓴 <선망국의 시간>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굉장히 앞서가는 선망국이죠.” 단박에 이해가 된다. 선진국(先進國)이 ‘먼저 발전한 나라’라는 뜻
[임소연의 클로징] 망하고 망해도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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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밤, 이유 없는 불안이 차올라 잠에서 깬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마음으로 밤을 지새울 때마다 이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명쾌하게 풀어줄 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한다. 동시에 내 안의 비관과 우울의 싹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꽃을 피워 속삭인다. 답을 알면 진짜 좋을까? 답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건 ‘끝’이 아닐까 싶다. 또 다른 표현으론 종말. 영화, 드라마, 책, 게임 등 스토리텔링 콘텐츠가 재미있는 건 어쩌면 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긴장과 갈등의 과정을 거치든 결국 마지막 페이지가 찾아온다는 게 분명하기에 아쉬우면서도 안심이 된다.
우리는 대부분 끝을 상상하지 않고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살지만 끝이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수락하고 나서야 마침내 찾아오는 선물 같은 순간도 있다. 내 경우엔 주로 영화를 통해 예행연습을 하고 예방주사를 맞는 것 같다. 시국이 어수선한 탓인지, 단순한 우연인진 알 길 없지만 최근 유난히 종말과 끝에 관한 작품들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우울의 종말 혹은 종말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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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13일 국회 전자청원 사이트에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의 의원직 제명에 관한 청원서를 올렸다. “윤석열의 지휘하에 계엄군이 헌법과 계엄법을 위반하며 국회 권능행사를 방해한 장면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는데도 이를 ‘고도의 통치행위’라고 일컬은 윤상현 의원은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헌법, 국회법, 국회의원 윤리강령, 국회의원 윤리실천규범을 뒤지며 단숨에 써내려갔다. 국헌 문란 비호는 탄핵 반대나 ‘내란죄는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수준도 넘어선 것이다. 재적 국회의원 2/3 이상의 찬성으로 제명하는 것이 정석이다. 의원 징계를 논의할 때마다 나오던 “유죄가 나온 것도 아닌데”라는 억지는 사절한다. 제명은 처벌이 아니라 징계다. 의원직 상실형이 떨어진 범죄자는 제명할 것도 없다.
전자청원은 30일 안에 5만명의 동의를 받아야 국회로 회부된다. 나는 동참 인원이 크게 모자라 청원 회부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오염이 심각한 옛 미군 기지의 졸속 개방을 반대하는 청원이었다.
[김수민의 클로징] 적벽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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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말할게.” “복잡하게 말해도 된다.” 영화 <친구>(2001)에서 동수(장동건)는 자신을 멈추려는 준석(유오성)의 제안을 아니꼽게 받아친다. 열등감과 미안함으로 배배 꼬인 동수의 도발은 호의로 마련한 대화의 장을 차단하는 최악의 대응이다. 맺고 끊는 게 분명한 준석은 동수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잔혹하게 잘라낸다. 모든 상황을 단순화시키려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요즘,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대화를 단절한 건 동수일까 준석일까. 준석이 동수의 도발을 받아넘기고 수용하여, 복잡한 상황과 자신의 마음을 길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는 친구를 제거해야 했던 동수의 고뇌를 꽤 멋들어지게 포장한다. 여기서 문득 드는 의심. 실은 복잡하게 말할 의지가 없는 동수는 처음부터 설득할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뭘 그렇게까지 의미 부여를 하나 싶겠지만 현실에서도 동수처럼 상황을 둘로 갈라치는 이들을 의외로 자주 마주한다. 적과 아군. 좋거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게임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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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에는 영웅도 주인공도 없다. 강물 위에 여객기를 비상착륙시켜 수많은 목숨을 안전하게 지켜낸 비행기 기장(톰 행크스)이 나오기는 하지만, 막상 영화에 비친 그의 모습은 복잡한 소송과 주택담보대출로 골머리를 앓는 삶에 찌든 평범한 생활인이다. 대신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은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채로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는 보통 사람들, 무수한 ‘우리들’이다. 위험천만의 대형 사고에서 한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 기적은 이들 덕분에 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미국 찬가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찬가로 읽힐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또 더 지혜로워지게 만들고 거기에서 느슨한 합의를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유능한 지도자는 필요하지만, 이 비뚤어진 세상을 자기가 나서서 한번에 ‘바로잡겠다’는 ‘백마 탄 초인’ 따위는 별로
[홍기빈의 클로징] 스머프 민주주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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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토크쇼에서 완벽한 영화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적 있다.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로 출발하는, ‘취향 고백이구나’ 싶은 리스트였지만 최소한의 조건을 전제했다. “완벽한 영화라는 건 모든 미학적 요소를 어느 정도 아우르는 작품입니다.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걸 깎아내릴 만한 단점을 찾기 어려운 영화들이죠.” 이후 타란티노는 <죠스>(1975), <엑소시스트>(1973), <애니홀>(1977), <영 프랑켄슈타인>(1974) 등을 언급하다가 마지막에 이걸 빼먹을 순 없다는 듯 다급하게 외친다. “<빽 투 더 퓨쳐>(1985)! 정말 완벽한 영화죠.”
타란티노의 단언과 달리 이 영화들의 단점을 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동시에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목록이다. ‘단점을 찾기 어렵다’는 의미가 단점이 없는 게 아니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거라면 결과적으로 타란티노가 옳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완벽한 영화, 완벽한 연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