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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거대 데이터 기업 팔란티어가 22개 항목의 선언문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AI 무기화는 불가피하니 더 속도를 올려라” “서양 문명의 우월성을 지켜내야 한다” “징병제 부활이 살 길이다” “실리콘밸리는 이제 국방부의 일부이다” 등. 노골적이다 못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많은 이들이 이를 “파시즘”이라고 몰아붙인다. 피터 틸과 알렉산더 카프와 같은 자칭 천재 기업가들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는 더욱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이러한 “기술 파시즘”이라는 것이 일부 인사들의 일탈적인 과대망상을 넘어서서 현대의 산업 자체에 내재한 역사적 경향이라면?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파시즘은 민족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보수주의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러한 산업문명에 본질적으로 장착된 필연적 “혁명”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사실 대의제민주주의도 자유시장경제도 18세기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것들이라서 19세기 이후의 산업문명과는 기묘
[홍기빈의 클로징] ‘팔란티어 선언’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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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봤다. 이자연 기자가 무려 14번 관람한 끝에 이벤트로 서프라이즈 박스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 부랴부랴 극장을 찾았다. 영화 보는 일이 업이지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거의 없다. 두 번째 볼 때부터는 진짜 ‘일’처럼 느껴지는 탓에 아무리 좋은 영화도 왠지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마음이 같은 영화를 저렇게 여러 번 볼 수 있도록 이끄는 걸까.
요즘은 대체로 글을 통해 영화를 먼저 접하다 보니,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여러 번 봤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도 그중 하나였다. 이미 원작 소설까지 읽었을 뿐 아니라 장면 하나하나까지 구체적으로 스포일러를 당한 상태라 어쩐지 심드렁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극장에서 직접 확인한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확실히 달랐다. 아마도 온도 때문인 것 같다. 올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보고 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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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트럼프란 인물이 대통령이 됐을 때부터 한마디로 미국은 우스꽝스러워졌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무시해도 좋을 만큼 약해졌다는 게 아니라 우스워졌다는 거다.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지만 그런 강함에 대한 경외라든가 공포를 품게 하지 않는다. 좋든 싫든, 존경하든 무서워하든, 어떻게든 신경을 쓰거나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송능한 감독의 1997년 영화 <넘버 3>의 송강호 배우가 맡았던 불사파 두목 조필을 떠올리면 된다. 조금 고쳐 말하자면, 그런 조필이 거대 조직의 두목이 되어 있다고, 거대 조직이 그런 조필을 두목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에 처한 셈이라고 여기면 적절할 것 같다.
<넘버 3>의 조필에게는 힘이 있다. 딱히 반기를 든 것도 아닌 그저 자기 자존심을 조금 상하게 했을 뿐인 부하를 흠씬 두들겨패도 누구 하나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지배력 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정준희의 클로징] 웃기고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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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를 켰다, 껐다. 이걸 잘해야 오래 간다. 슬픔엔 역치가 있는 법이라 주변이 온통 괴롭고 어려운 소식뿐이라도 내내 괴로워만 하면서 살 순 없다. 전쟁의 화마 속 매일 불의, 부당, 부조리한 뉴스로 넘쳐나지만 다들 묵묵히 오늘을 살아간다. 그 앞에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하게’ 따위의 말을 쉽게 붙이는 건 무례하고 둔감한 짓일 것이다. 슬픔이 자신을 완전 집어삼키기 전에 치열한 마음으로 스위치를 끄고, 일상을 버티고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버틴다’는 선택을 한 모든 이들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무너져가는 세상 또한 그렇게 모인 일상의 힘을 기둥 삼아 간신히 꼴을 유지한 채 버티는 중이다.
다들 스위치를 끄는 신호나 의식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최근 내가 택한 방식은 출퇴근길에 음악을 크게 듣는 거다. 너무 멀다고 투덜거렸지만 습관이 된 뒤엔 하루 2시간 남짓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랜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스위치를 켜고 끄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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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담벼락을 신나게 뛰어넘은 노란 개나리가 무색하다. 제주 4·3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현재를 잠식하는 과거다. 귀향한 참전군인이 겪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대표적인 증상은 그들이 여전히 전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고 착각하는 환상 속으로 호출되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시간의 흐름과 영원히 불화하기를 택한 과거라면, 역사적 참사를 잊지 말자고 외치는 구호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될까? ‘기억하자’는 네 글자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실천이고 그것은 같은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자는 말인 동시에 참사에 관한 공동의 서사를 창안하여 함께 ‘기억’하자는 말이다. 그러니까 ‘기억’은 두 가지의 실천을 선행조건으로 삼는다. 정확한 사실의 발굴, 그리고 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회적 서사의 작성이다.
사회학자 제프리 C. 알렉산더는 사건의 발생 자체가 트라우마를 직접 촉발하는 것이 아니며 사건 전후를 둘러싼 맥락과 사실의 재구성, 사건에
[전승민의 클로징] 비극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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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영화의 운명을 결정짓는 건 당도하는 장소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검사>를 보았을 땐 솔직히 별반 기억에 남지 않았다. 물론 전체주의가 인간을 집어삼키는 보편적 메커니즘을 우화로 승화시킨 훌륭한 영화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제된 형식이 주는 거리감에 밀려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 전 개봉한 <두 검사>를 (타의에 의해) 극장에서 다시 봤을 때, 전혀 다른 무언가로 다가왔다. 느리지만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연출, 침묵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연기, 규칙을 따른 자가 파멸에 이르는 결말까지. 무엇보다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 대한 경고가 귓가를 때렸다.
<두 검사>는 인내의 영화다. 느리고, 엄격하고, 카타르시스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말에 이르러 의도적으로 관객을 좌절시킨다. 모든 숏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하여 프레임 자체를 감옥으로 만들고, 아카데미 비율의 좁은 화면과 탈색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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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잦은 수사 개시는 오랫동안 폐해를 불러왔다. 해법은 검찰의 수사 개입을 차단하는 걸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검찰 전통이 미약한 나라를 뺀 34개국 검찰에는 수사권이 있다. 엔론 사태(미국), 록히드 사건(일본), 디젤 게이트(독일), 사르코지 정치자금(프랑스) 등은 검찰이 수사했다. 권력이나 자본이 연루된 사건은 법률가가 수사하고 수사 당사자가 공소 유지까지 하는 게 낫다(한국 역대 특검이 다 그랬다). 물론 선진국에서 검찰의 수사 개시는 일상적이지 않지만, 적어도 ‘수사 지휘’는 검사의 주업이다. 골키퍼가 골문만 지키는 게 아니라 앞의 선수들을 지휘하듯, 검사에게 기소와 재판을 대비한 수사 점검은 필수적이다. (준)사법적 통제가 약하면 정치권력이 수사를 끌고 갈 위험도 커진다. 검찰의 여러 권한을 다 줄이거나 없앨 것이 아니라, 청산할 것과 집중할 것을 분별해야 한다. 2005년 법학자 A가 낸 논문이다. “우리 경찰 수사의 현실에서, 공소의 책임자이
[김수민의 클로징] 춤추는 대수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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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아니 표현이 다소 과했다. 거의 모른다. 1년에 1번. 잡지의 창간 기념을 맞아 크고 작은 개편을 한다. 코너를 바꾸고, 새로운 필자도 모시고, 디자인도 이래저래 다듬어본다. 매주 마감하는 주간지의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짬짬이 틈을 내어 회의하고, 시안을 만들고, 다시 엎는 등 추가 노동력을 투입해서 진행 중이다. 하지만 사실은 딱히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일이다. 물론 연속성을 알아봐주는 정기 구독자도 적지 않지만 매주 이슈와 필요에 따라 잡지를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한권 한권이 독립적이다. 게다가 연중 소폭의 개편과 변화를 주면서 다듬어나가는 편이라 내용의 조정은 충분히 갈음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개편은 일종의 가욋일, 속된 말로 고생을 사서 하는 작업인 셈이다. 그럼에도, 굳이 때맞춰 개편을 거르지 않는 건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현재 우리의 위치와 형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점검이라고 해도 좋겠다.
편집장을 맡고 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세 번째 개편을 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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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본인이 휴전 협상을 언급하면서 이란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트럼프 꼴좋다, 미국 꼴좋다”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워낙 전 지구적으로 비호감이 된 트럼프이니 이런 반응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 사태를 트럼프의 황당한 변덕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심한 실패로 끝났다고 바라보는 “꼴 좋다” 서사는 중요한 몇 가지 지점들을 놓치고 있다.
첫째, 미국의 이란 공격은 트럼프 개인이 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전쟁 계획 자체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존재했고, 미국의 오바마 시절부터 준비되어 바이든 시절까지 군사적 능력 구축으로 준비되어왔던 것이다. 이란의 포르도 핵 시설 설계도 조사는 2009년에 시작되었고 바이든 정부 말기인 2024년 중반 미국과 이스라엘은 주요 시설 파괴를 위한 미사일 공격의 실전 훈련도 치른 바 있다. 물론 전쟁 계획과 준비는 여러 시나리오의 준비에 불과하며 그것을 트럼프처럼 실행으로 옮긴 것은 다른
[홍기빈의 클로징] “꼴좋다”가 놓치고 있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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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지난 3월15일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즌바움이 쓴 글의 제목에서 어떤 결기가 감지된다. 83살의 노논객은 “몇년간 직장을 잃은 평론가 수를 보면 죽음에 접어든 직업임을 알 수 있다”면서도 “30살 이하인 사람에게 물어보면 황금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며 환경 변화에 따른 세대간 인식 차를 날카롭게 통찰했다. <시카고 리더>의 칼럼으로 기획된 이 글은 모종의 이유로 지면에서 반려된 뒤 본인의 블로그에 올라갔는데, 덕분에 더 손쉽고 편하게 읽어볼 수 있어 한명의 독자로선 좋았지만 또 다른 지면의 데스크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졌다. 오늘날 정형화된 지면들은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반대로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들은 폭넓은 사유와 토론의 장을 제대로 제공하고 있는가.
거창하게 ‘영화비평에 대한 정의’까지 살필 것도 없다. 지금 당장 궁금한 건 하나다. 영화는 여전히 ‘감상과 비평’이라는 리액션을 필요로 하는가. 독자가 사라지고 필자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공포와 환희 사이 잡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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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무언가를 읽고 쓰며 살아왔다. 물론 듣고 말하며 살기도 했지만, 나라는 개인의 직업 영역에서 중요했던 건 확실히 읽고 쓰기쪽이다. 이걸 사회적 차원의 의사소통 네트워크 관점에서 풀자면, 어떤 저자가 쓴 것을, 논문이나 책 혹은 보고서나 기사 등의 형태로 읽고, 내 생각을 보태어 (또는 시초의 어떤 생각을 해결하기 위해 읽은 뒤 추가적으로 사유하여) 무언가를 쓰는 행위가 연속되는 셈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읽어주고 이왕이면 그에 대해 무언가를 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렇게 쓰고-읽고-쓰기의 연쇄를 통해 내가 참여하는 사회의 의사소통이 어떤 식으로든 지속된다. 그런 사회를 가리켜 ‘학술적 사회’(academic society)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학회’라고 부르는 각종 단체가 정확히 그것이다.
지금도 나는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주로 학자들에 의해 읽혀서 그 결과가 다른 학술적 쓰기로 연결될 것을 의도하지도 딱히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 글은 필경 소수
[정준희의 클로징]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가 향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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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은 편이다. 대학 시절 초등학교 도서관 정리 사서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급식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양반 총각’으로 불렸는데, 아무리 급한 일로 호출해도 절대 뛰지 않고 태평하게 걷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양반 총각이란 별명에는 답답함에 대한 에두른 핀잔과 푸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눈치 없는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계속 눈치 없는 척 굴었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양반 총각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편이라 다툼이 생겨도 먼저 사과했다. 실은,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저 다툼이 무서웠을 뿐이다. 언성을 높여 다투는 곳 근처만 가도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가능한 한 분쟁을 피하려 하다 보니 진중한 중재자 역할을 떠맡은 적도 있지만 실은 늘 도망쳤다. 다툼이 있는 곳은 되도록 피해다녔고, 어쩌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먼저 지는 게 편했다.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요즘 이유 없는 우울과 심란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겁쟁이의 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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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얼마 전 개봉한 <센티멘탈 밸류>를 보러 가려다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이전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라우더 댄 밤즈>를 한번 더 보기로 했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 종종 이 영화를 부러 시청하곤 했다. ‘폭탄보다도 시끄러운’ 고요의 높은 밀도가 어쩌면 불안한 내 몸을 꽉 안아주는 것처럼 느꼈던지도 모르겠다. 공황발작이 찾아올 때 즉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요법 중 하나는 스스로 자기 몸을 힘주어 안는 자가 포옹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같이 본 이는 마치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질릴 것만 같다고 했다. 어쨌거나 영화가 관객에게 발휘하는 ‘압력’에 대해서는 둘 다 동의한 셈이다. 이번 신작은 두 자매와 아버지의 이야기라는데, <라우더 댄 밤즈>는 두 형제와 아버지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 실제로 이 영화는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소란하지 않다. ‘폭탄
[전승민의 클로징] 폭탄보다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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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격언이지만 최근엔 동의하기 어려운 일만 잔뜩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너무 많은 생각들이 흙탕물처럼 피어나 덮쳐온다. 가만히 보면 딱히 크게 문제가 생긴 건 없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밤에는 수시로 깬다. 이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어 며칠 끙끙대고 있으니 아내가 옆에서 가만히 말을 건넨다. “속이 시끄러워?” 맞다. 그거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정보들이 넘쳐 마음을 어지럽힌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그 말을 약간 비틀자면 인문학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조차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체로 실패한다.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흙탕물처럼.) 반면 과학, 특히 물리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과학을 바탕에 둔 영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What happens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