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정준희의 클로징] 12월3일이 바꿔놓은 나, 그 두 번째

현존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존한다.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두개의 서로 반대 의미를 가진 모순적 문장들을 단순히 ‘그리고’로 연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으로서 일관된 의미를 가지게 하는 게 헤겔의 의도였을 테다. 하지만 후대 철학가들은 앞 문장에 중점을 두어 뒤 문장을 포섭하거나, 거꾸로 뒤 문장을 주축으로 앞 문장을 해석하는 전략을 취했다.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는 전자를 헤겔 우파라고 부르며, 진보주의적 성향을 띠는 후자를 헤겔 좌파라고 지칭한다. 나 같은 학자들, 특히 의지가 투영되는 세상(수많은 의지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세상)을 파악하고 해명하려는 학자들은 이 두축 사이에서 요동한다. 한편으론 벌어진 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보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납득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자신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늘 어딘가 부족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화가 나고, 좀더 합리적인 세상의 상을 제시하게 되며, 그걸 이룰 방법을 찾기 위해 이성적으로 노력한다. 지난해 12월3일 이후의 세상이 정확히 그랬다. 일단 왜 그따위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광기로만 설명하는 건 너무 게으르다 싶었다. 그래서 좀더 구조적인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 제도(87년 헌법이 구축한 제6공화국) 덕분에 충분히 높은 지위를 차지해왔기에, 이 제도를 지켜내야 앞으로도 자신의 지위를 지탱할 수 있는 이들이, 정작 왜 이 제도를 부수려 할까? 이것이 ‘납득할 수 없음’의 핵심이었다. 이후 1년은 내가 품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서서히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 제도의 모두를 구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 제도가 자신들에게 안겨준 특권만을 지키고 싶은 것이었다. 윤석열과 그의 주구들은 그것을 ‘비상대권’이라는 철 지난 용어로 붙잡고 싶었다. 그들을 ‘제도에 대한 배반자’로서, 쉽게 말해 내란범으로서 단죄해야 할 자들이, ‘사법권 독립’이라는 그럴싸하지만 애매하기 짝이 없는 용어로 내란범들을 감싸고 돌았다.이들의 이런 작태는 우리 사회가 위기에 직면해야 했던 이유를, 따라서 무엇을 지키면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알게 해줬다.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큰 구조와 장기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하기보다 당장 닥친 일에 대해 편협하게 반응한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이라는 자들, 특히 개별이익이 아닌 공익을 먼저 수호하도록 만들어진 (군인, 관료, 법관, 기타 상위 전문직)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 역시 그러함을 보게 되었다. 그에 반해 시민들의 ‘일반의지’는 오히려 이 제도가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들은 이 제도가 자신들 개개인에게 반드시 유리하지 않음에도, 온갖 특권 계급들이 똬리를 틀 수 있는 제도임에도, 이것을 지키는 일에 ‘집단적으로’ 헌신했다. 삼권분립의 공화적 헌정 질서를 주창했던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법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보통 시민들이 더 온전히 구현하려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엘리트주의자였던 몽테스키외의 주장은 그와 다른 결의 인민주의적 공화정을 강조했던 루소와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 같다. 12월3일 이전까지는 몽테스키외에 좀더 가까웠던 내가, 아직은 주저하면서도 루소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