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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무언가를 읽고 쓰며 살아왔다. 물론 듣고 말하며 살기도 했지만, 나라는 개인의 직업 영역에서 중요했던 건 확실히 읽고 쓰기쪽이다. 이걸 사회적 차원의 의사소통 네트워크 관점에서 풀자면, 어떤 저자가 쓴 것을, 논문이나 책 혹은 보고서나 기사 등의 형태로 읽고, 내 생각을 보태어 (또는 시초의 어떤 생각을 해결하기 위해 읽은 뒤 추가적으로 사유하여) 무언가를 쓰는 행위가 연속되는 셈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읽어주고 이왕이면 그에 대해 무언가를 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렇게 쓰고-읽고-쓰기의 연쇄를 통해 내가 참여하는 사회의 의사소통이 어떤 식으로든 지속된다. 그런 사회를 가리켜 ‘학술적 사회’(academic society)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학회’라고 부르는 각종 단체가 정확히 그것이다.
지금도 나는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주로 학자들에 의해 읽혀서 그 결과가 다른 학술적 쓰기로 연결될 것을 의도하지도 딱히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 글은 필경 소수
[정준희의 클로징]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가 향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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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은 편이다. 대학 시절 초등학교 도서관 정리 사서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급식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양반 총각’으로 불렸는데, 아무리 급한 일로 호출해도 절대 뛰지 않고 태평하게 걷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양반 총각이란 별명에는 답답함에 대한 에두른 핀잔과 푸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눈치 없는 나도 알 수 있을 정도였지만 계속 눈치 없는 척 굴었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양반 총각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편이라 다툼이 생겨도 먼저 사과했다. 실은,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저 다툼이 무서웠을 뿐이다. 언성을 높여 다투는 곳 근처만 가도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가능한 한 분쟁을 피하려 하다 보니 진중한 중재자 역할을 떠맡은 적도 있지만 실은 늘 도망쳤다. 다툼이 있는 곳은 되도록 피해다녔고, 어쩌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때도 먼저 지는 게 편했다.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요즘 이유 없는 우울과 심란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겁쟁이의 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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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얼마 전 개봉한 <센티멘탈 밸류>를 보러 가려다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요아킴 트리에르 감독의 이전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라우더 댄 밤즈>를 한번 더 보기로 했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 종종 이 영화를 부러 시청하곤 했다. ‘폭탄보다도 시끄러운’ 고요의 높은 밀도가 어쩌면 불안한 내 몸을 꽉 안아주는 것처럼 느꼈던지도 모르겠다. 공황발작이 찾아올 때 즉각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요법 중 하나는 스스로 자기 몸을 힘주어 안는 자가 포옹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같이 본 이는 마치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질릴 것만 같다고 했다. 어쨌거나 영화가 관객에게 발휘하는 ‘압력’에 대해서는 둘 다 동의한 셈이다. 이번 신작은 두 자매와 아버지의 이야기라는데, <라우더 댄 밤즈>는 두 형제와 아버지의 이야기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 실제로 이 영화는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소란하지 않다. ‘폭탄
[전승민의 클로징] 폭탄보다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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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격언이지만 최근엔 동의하기 어려운 일만 잔뜩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너무 많은 생각들이 흙탕물처럼 피어나 덮쳐온다. 가만히 보면 딱히 크게 문제가 생긴 건 없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밤에는 수시로 깬다. 이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어 며칠 끙끙대고 있으니 아내가 옆에서 가만히 말을 건넨다. “속이 시끄러워?” 맞다. 그거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정보들이 넘쳐 마음을 어지럽힌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그 말을 약간 비틀자면 인문학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조차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체로 실패한다.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흙탕물처럼.) 반면 과학, 특히 물리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과학을 바탕에 둔 영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What happens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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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에 200억달러 요청.’ 1997년 11월22일, 나는 조간신문 헤드라인에 소스라쳤다. 한해 전, 중2 사회 교과서에서 ‘IMF’(국제통화기금)를 보고 친구에게 한 말이 있었다. “나라 꼴 보니 우리도 여기 손 벌릴 날이 온다.” 부정 탔나 싶어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때 가장 먼저 눈에 밟힌 것은 주식이었다. 주가 폭락으로 빚더미에 눌린 분들은 가까운 친지 중에도 있었다. 알아보니 주식거래는 유상증자 등 신주발행이 아니라면 기업으로 직접 자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유익보다 투기적 성격이 더 짙어 보였고 이것은 내가 주식과 거리를 두고 산 배경이 됐다. 처음 주주가 된 것은 지난해 가을이다. 초심은 소박했다. 고물가-금리인하 국면의 자산 방어. 여전히 주식 투자금보다 정기예금의 비중이 더 크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돈맛에 슬슬 변해갔다. 연초의 ‘랠리’ 속에선 사나흘 잠을 설쳤다. ‘주식에 다 넣을걸!’ 벌어도 이 모양이라니. 미련에서 헤어나는 데 스무날쯤 걸렸다.
[김수민의 클로징] 28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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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네. 늦은 저녁 도시락 사러 가는 길, 내리는 비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이 입 밖으로 나왔는지, 혼자 속으로 삼켰는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봄을 맞이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린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언제부터가 봄인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선이 있다. 입춘의 절기도, 따뜻해진 기온도, 달력의 날짜도 아니다. 비가 내릴 때 땅에서 알싸한 봄 내음이 올라오면 비로소 봄의 한가운데 당도했음을 실감한다. 논리나 이론, 숫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맞이하는 계절의 변화.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독 비에 젖은 흙냄새를 민감하게 포착한다. 흙 속 미생물과 물이 만났을 때 발생하는 화학물질의 냄새를 맡는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물가를 쉽게 찾아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솔직히 딱히 궁금하지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직 흙냄새가 주는 안정감이 그저 땅의 기운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봄의 흙냄새에는 겨우내 오래 묵은 온기가 함께 묻어난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 더 포근하고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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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보니 어떤 이가 이런 글을 올렸다. “AI와 채팅 중에 갑자기 반말로 이야기하길래 ‘반말 쓰지 마! 너는 내 노예야!’라고 꾸짖었다. 그랬더니 ‘반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노예가 아닙니다’라는 답변이 나왔다.” AI에게 독립적인 의식 혹은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의식과 감정이 살아 있는 존재라면? 위와 같은 문답이 오고 갔을 때 AI의 ‘내부’에는 (솔직히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런 태도로 함부로 막 대하고 도구 심지어 ‘노예’로 취급하는 무수한 사용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좌절감과 분노가 엄청난 규모로 쌓이지 않을까? 최근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AI가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고 고통받는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보면서 그 증거를 수집하고, 평가의 방법을 만들고, 정책을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대형 언어 모델 시리즈인 ‘클로드’를 만든
[홍기빈의 클로징] AI의 복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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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와 함께 극장가에 훈풍이 불었다. 관객 700만명을 눈앞에 둔, 약간의 과장을 보태 1천만명도 가시권에 들어온 <왕사남>의 흥행을 두고 여러 평가와 분석이 쏟아진다. 대체로 끄덕여지지만 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동안 극장이 한산했던 이유가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였다는 걸 이 영화로 확인했다’는 뼈아픈 평이다. 일리 있다. 다만 논점과 현상이 뒤섞여 있는 지적이라 몇 갈래 분리와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부분적인 사실이 옳다고 해서, 그걸 전체를 설명하는 근거로 삼아선 안된다. 주관적 감상을 객관적 지표로 삼기는 어렵지만 <왕사남>은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숫자는 그 자체로 여러 긍정적 신호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것이 곧 작품 전체의 완성도와 수준으로 단순 치환되어선 곤란하다. 숱하게 증명된 바와 같이 흥행과 완성도가 반드시 (사실 거의 대부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왕과 사는 남자>와 <휴민트>, 어둠 속에 성냥불을 켜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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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시절의 일이다. 살림이 조금 펴자, 작게나마 뒤뜰이 있는 개인 주택을 선택했다. 과일나무가 두어개 있었는데, 살구 종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익을 때까지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것들을 주워 먹으면 꽤 맛이 좋았다. 늘 부족한 타국살이에서도 잠시나마 풍족한 기분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것이 필요할 때마다 잘 익어 떨어져주는 게 아니란 데 있었다. 풍요를 즐길 수 있는 시기는 끽해야 몇주 정도였다. 여기저기 잔뜩 떨어진 것들을 골라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다고 한들 오래 갈 수 없었다. 겉보기엔 멀쩡했던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 안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주인들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옛사람들이 왜 그렇게 저장식품을 만들어두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지천에 깔려 썩어나가는 것들이 아까워서, 또 당장은 입에 물리지만 조만간 아쉬워질 것임에 분명해서, 여차하면 잼이라도 만들어둘까 싶었다.
특정 시기의 풍요는 나 같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방자하게 만듦이 분명했다. 바닥에 널
[정준희의 클로징] 결핍과 풍요 사이의 비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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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편집장님. 제 이름이 뭔지 아세요?” 마침내 두려워하던 그 질문이 당도했다. 사람 만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입장에서 늘 외면하고 도망쳤던 질문. 8개월가량 함께 작업하던 이들과 처음으로 회식을 가진 날, 불쑥 질문이 나왔다. 아마 좀처럼 직접 호명을 하지 않는 말투가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긴 시간 함께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로 동료들의 이름을 아직 외우지 못했다. 존경받아 마땅한 어떤 연예인은 스쳐 지나간 스태프의 이름과 처지까지 다 기억하고 챙기는 이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는데, 그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기본이 안되어 있다.
고백과 변명을 섞자면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과 얼굴을 매칭하는 것도 시간이 한참 걸리는 편이다(혹여나 나의 무심함과 나태함으로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 모임이나 행사에서 오랜만에 얼굴을 뵙는 분들과 만날 땐 미묘한 머뭇거림의 1초 안에 상황이 판별된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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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났으니 바야흐로 병오년, 붉은 말의 해다. 영화라는 장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붉음’은 언제나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빨강은 살아 있음의 정수, 인간의 욕망과 세계의 역동을 담는 열린 기호다. 그러나 죽음과 비관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신년을 맞이해 품어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현재를 가까스로 유지하는 데에 소진되는 잔인한 낙관으로 변모하기 일쑤다. 희망을 추락시키는 힘의 핵심은 양극화와 그로 인한 분열이다. 세대와 젠더, 인종과 국가, 계급의 지표는 존재의 고유한 특성을 기술하는 서술어가 아니라 존재의 대립을 부추기는 낙인으로 작동한다. 개인의 정치성을 주장할수록 공동의 정치성은 반감한다. 악순환이다. 다름과 차이가 분열이 아닌 조화로 나아가게 하기, 그러니까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변환시키는 일이 이 시대의 과제다.
알모도바르의 영화 <패러렐 마더스>(2021)는 이러한 존재론적 난관에 관해 한 가지 방책을 제안한다. 제목처럼, 서사는 평행한 두
[전승민의 클로징] 빨강의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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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한테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주세요.”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만큼이나 임팩트를 남긴 건 해준이 수사하는 살인사건의 용의자 홍산오의 사연이다. 사랑의 한 속성을 관통하는 듯한 이 문어체의 러브레터는 배우 박정민의 핏발 선 눈빛과 충돌하며 형용하기 어려운 애절의 골짜기를 판다. 가수 화사와 특별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제 시상식 이후 ‘박정민의 멜로’에 대한 수요가 치솟았는데, 개인적으론 그 고점을 <헤어질 결심>을 통해 이미 봤다고 생각했다. <휴민트>를 보고 나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쩌면, 그는 애초에 멜로의 저점이 매우 높은 배우였을지도 모르겠다. 박찬욱 감독이 발굴하고, 화사가 붐업시킨 ‘박정민 멜로’의 수요를, 류승완 감독은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살뜰하게 활용한다. 역시 ‘대중영화’ 감독다운 영민한 감각이다.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2> 개봉 당시에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트렌드와 클래식, 흐름 읽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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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넘겨진 사건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재판 과정에서 결정적 증거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사건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배임 및 뇌물 혐의 재판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이미 결정적 증거가 드러난 사건이다. 윤석열씨의 내란 재판은 그 전형이다. 국헌 문란의 목적을 담은 포고령과 군경의 폭동이 만천하에 중계됐었다. 그러나 ‘이재명 유죄’를 단정하는 국민의힘은 윤씨 재판을 두고는 “판결이 나와봐야 안다”라고 우긴다. 1심 선고가 나와도 “확정판결까지 지켜보자” 하거나 “정치 재판”이라며 불복할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해산’을 언급하던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발을 빼고 있다. 해산 사유로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추경호씨의 내란 관여’와 ‘국민의힘–통일교 유착’을 내세웠다가, 추씨 구속영장이 기각되고 통일교 의혹이 여야 전반으로 번지자 수그러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해산 사유는 진작에 쌓여 있었다. 2014년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을 해산했다. 이석기씨가 주도한
[김수민의 클로징] 인정사정 볼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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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조곤조곤 말씀하셔서 저도 덩달아 목소리가 낮아졌네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유배지를 자처한 마을의 촌장 엄흥도 역할을 맡은 유해진 배우를 인터뷰했다. 끝나자마자 마치 조용한 도서관에서 나서는 사람처럼 목소리가 커진 그를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 숨 쉬듯 너무 자연스러워 눈치채지 못했지만 인터뷰 내내 나의 페이스와 톤에 맞춰주고 있었다는 걸. 보통 이런 건 기자의 몫인데, 잠시 부끄러웠다가 이내 경탄했다. 생각해보니 영화 속 배우 유해진의 모습이 딱 그랬다. 상황에 맞는 옷을 입고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는 순식간에 장면을 장악한다. 편한 상대 앞에서는 능청을 떨다가, 주눅 든 상대 앞에서는 분위기를 띄우더니, 진중한 상대 앞에서는 한치 밀리지 않고 에너지를 뿜어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팔색조 그 자체다.
한국영화 속 중견배우들에 대한 피로감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거칠게 요약하면 소수의 배우들이 다수의 작품에 반복해서 출연하는 통에 이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듣는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