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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여름은 장르영화의 계절이다. ‘여름은 호러’라는 공식은 이제 옛말이 됐고, 이제 여름은 장르다. 올해 6월 미쟝센단편영화제로 시작하여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BIFAN)로 이어지는 장르 축제의 사이클이 완성된 덕분에 다채로운 장르영화의 한상 차림을 만끽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극장가에서 ‘장르’는 마치 마법의 열쇠처럼 유통된다. 이걸 넣으면 영화가 재미있게 탈바꿈할 뿐 아니라 대중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의 재료. 모두가 장르를 말하고, 다들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각자 말하는 장르의 실체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또렷하게 보이지만 손에 잡히진 않는, 그래서 더 매혹적인 무언가.
학교에선 이렇게 배웠다. 장르는 관객, 제작(스튜디오/산업), 비평의 꼭짓점에서 출발하여 교차하는 익숙함이라고. 달리 표현하면 관습에 대한 학습이라고 해도 좋겠다. 영화학자 톰 라이얼부터 시작된 장르 이론에 따르면 제작자가 패턴을 만들고, 관객이 학습하여 받아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여름보다 한발 먼저 찾아온 장르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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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리가 있다고 치자. 여기저기에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온갖 상인과 점포, 노점상, 거리 공연으로 넘쳐난다. 행인들도 북적인다. 시선을 끌기 위해 화려한 호객 행위를 일삼으면서 먹을 것을 파는데, 죄다 단맛과 짠맛 그리고 매운맛으로 범벅이 된 스낵류이다. 건강에 좋을 리는 없지만 입에는 짝짝 달라붙는 데다가, 조금씩만 맛보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도 별로 비용이 들지 않는다. 개중에는 심각한 중독 성분이 들어간 싸구려 화학 제제도 사용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수록 소위 ‘핫플’로 뜨고, 여기저기 유사한 이름을 딴 거리들이 생겨난다. 그곳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알지만, 그런 맛과 분위기를 영 좋아하지 않아서, 게다가 그런 비즈니스 행태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련 업계 사람이기도 해서 그냥 없는 셈 친다.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데 가지 말라고 경고나 몇번 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팔리는 식품에 우리 농장에서 재배된 작물을 가져다 쓰는 일이 생겼다. 정확히 말
[정준희의 클로징] 나 모르게 벌어지는 나에 대한 범죄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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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살이 된 딸 덕분에 아침 루틴이 생겼다. 아이가 잠드는 시간보다 퇴근 시간이 늦어진 후로는 따로 자는 중인데, 새벽 6시만 되면 어김없이 꿈나라에서 탈출해 내 침대로 달려온다. 출근 전 2시간 정도가 하루 중 딸아이와 온전히 보내는 유일한 시간인지라, 비몽사몽 중에도 눈 비비며 일어나 함께 놀려고 노력 중이다. 고등학생 이후 이렇게 성실하고 일관된 아침 생활은 처음이다.
같이 논다고 해도 별로 대단할 건 없다. 그냥 앞에서 앉아 요구하는 대사와 연기를 해주면 끝이다. 딸아이는 요즘 한창 역할놀이에 빠져 있는데, 눈 뜨자마자 시작하는 놀이를 보면 전날 밤 어떤 책을 읽으며 잠들었는지가 투명하게 보인다. 오늘은 신데렐라가 라푼젤의 머리를 타고 마녀의 탑을 올라가 백설 공주가 먹을 사과를 뺏어 먹는 스펙터클 활극이다. 몇 가지 동화가 섞이고 엉망진창이 되더니 어떻게든 마무리되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세상 유일한 공연. 내가 언제까지 이런 행복한 인형극에 참여할 수 있을까 싶어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다음에 또 같이 놀자, 기다리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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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설렌다. 아니 떨린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낯설고 생경한 세계로 발을 디딘다는 건 기대와 불안의 외줄 위로 올라가는 일이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줄 위를 내딛는 걸음걸음, 혹여나 실수해서 떨어지지 않을까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때만큼 그 일에 진심을 다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양, 실수 한번 하면 마치 모든 게 끝날 것처럼 집중하고 쏟아부었던 첫걸음들.
다시, 지금 와 돌이켜보면 뭘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기도 하다. 완벽하다 믿었던 것들도 지나고 보면 어설프기 그지없고, 실수하면 세상 끝날 것 같았지만 실은 그리 대단치 않은 한 걸음에 불과했던 순간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걸음, 시작이 이토록 소중한 건 거꾸로 그때 그 순간 모든 걸 쏟아부었기 때문일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진심을 다한다는 것. 익숙해질수록 희미해지는 감각이다.
미쟝센단편영화제는 (이런 표현이 다소 민망하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서로의 시작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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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었음 청년’은 ‘특별한 이유’ 없이 구직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청년을 말한다. ‘이유’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된다. 육아나 가사, 진학 준비,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문제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경우 등. 이 용어는 청년 주체의 구직 의사의 부재를 ‘쉰다’는 동사를 통해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를 기준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예술인 청년은 어떨까? 많은 이들이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겸업을 한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의 황동만이 떠오른다. 케이터링 알바와 학원 강사로 성실히 노동해온 동만은 ‘쉬었음 청년’에 집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명랑한 실패자로 스무해나 버티어서 끝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인물이며 그의 일대기는 ‘쉬었음 청년’을 주요한 예상 독자로 삼는다.
황동만은 그야말로 비호감인 인물인데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
[전승민의 클로징] 나는 당신의 말로 죽을 수 없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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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설레고 즐거운 한편, 반복되는 숙제를 다시 받는 기분이다. 어쩌면 그저 한편의 새로운 영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게 오해하지 않고 영화를 정확히 보는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꾸준히 곁을 지켜준 감독이 그간 걸어온 궤적을 자연스럽게 뒤돌아보는 건 싫어도 귀찮아도 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조건반사에 가깝다. 거장의 지난 경로를 복기하는 시간은 대체로 익숙하고 종종 부담스럽지만 가끔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봉을 앞둔 <디스클로저 데이>는 단순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최신작 이상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얼핏 익숙해 보여도 새로운 보물을 발견할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여러 지점에서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중에서도 오랜만에 돌아온 스필버그의 SF, 외계인과 음모론에 얽힌 이야기라는 점에서 솟구친 기대감이 공개된 내용을 앞서간다. 스필버그의 기나긴 필모그래피를 몇 단어로 축약하긴 곤란하다. 심지어 그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스필버그 게임, 이미 아는 세계와의 낯선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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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지방선거 이튿날, 정치경제학자 정태인씨는 <경향신문>칼럼에서 “마포구 오진아, 구미시 김수민, 관악구 나경채 의원”의 낙선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 이후에도 저들 모두 다시 공직에서 활동하지 못했다. 저들과 비슷한 성향의 지방의원은 소수정당뿐 아니라 거대정당이나 무소속에도 있었으나, 그들도 차례차례 자리에서 내려왔다. 의회 재입성에 도전하는 이들도 줄었고, 이들과 비슷한 성향의 새 도전자도 줄었다. 한 시대가 남몰래 끝나가고 있었다.
전 울진군의원이자 경북도의원에 두번 도전했던 장시원씨도 지난 4월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불출마 인사’까지 다녔다. 불출마가 더 큰 뉴스였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몇몇 공통점이 있다. 2010년 무소속으로 기초의원이 된 ‘동기’다. 경북에서 나고 자랐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지긋지긋했다는 고향을 떠나 그는 신나게 예대 극작과를 다녔다(그때 어울린 사람들 가운데는 ‘연극과 해진이 형’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졸업 후 귀향했다
[김수민의 클로징] 거북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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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하다는 건 어떤 거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중 오정희(배종옥)의 수양딸 미란(한선화)은 정희가 버린 친딸 은아(고윤정)에게 묻는다.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던 두 사람은 자존감덩어리인 정희가 뱉은 한마디 말을 사이에 두고 교감한다. 자신의 친딸을 두고 ‘근사하다’고 평가하는 정희의 말은 미란, 은아, 정희 세 인물이 놓인 처지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띤다. 동시에 각자 마음속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핵심은 교차하는, 같은 결의 정서이기도 하다. 감정을 글로 전한다는 게 이렇다. 정확한 내용보다는 둘러싼 맥락이 중요하다. 상황이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좋겠다. 덕분에 우리는 (설사 착각일지라도) 미지의 상대와 이어지는 공감의 통로를 낼 수 있다.
근사할 일 하나 없는 주변을 둘러보며 새삼 생각에 잠긴다. 정말로, 근사하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가장 최근엔 칸영화제 수상 결과를 발표하는 박찬욱 감독의 재치 있는 한마디에 저절로 이 단어가 떠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근사한 영화(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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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는 사이버펑크의 고전으로 영화사뿐만 아니라 음악사에도 남을 작품이다. 그 음악 중에서도 특히 데커드가 레이첼과 처음으로 입을 맞추는 장면에 흐르던 사랑의 테마가 유명하다. 자신이 로봇이었고 모든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무너져버린 레이철에게 곧바로 사랑의 감정이 닥쳐오고, 혼란스러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입맞춤을 피한다. 레이철과 데커드와 그 장면을 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어떤 악기, 어떤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음악을 맡은 반젤리스는 이 장면에 꼭 맞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현악기, 관악기와 같은 자연 악기의 소리를 억지로 따라하는 ‘찌질한 모조품’으로 천대받던 신시사이저는 그의 손에서 완전히 새로운, 그리고 사이버펑크의 세계와 너무나 잘 맞는 악기로 새로 태어났고, 곡 전체의 구성과 문법도 신시사이저의 소리에 맞게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이제는 신시사이저가 음악의 중심과 전체를 이루는 새로운 음악, 새
[홍기빈의 클로징] AI 미술의 반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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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물체. 감독 나홍진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싶다. 살을 조금 보태자면, 그의 영화는 확인되지 않은 물체라기보다는 확인이 되어도 여전히 미지의 상태를 유지하는 에너지덩어리에 가깝다. 명확히 보여주지 않고 지연시킴으로써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정석의 ‘서스펜스’와는 비행 궤도가 다르다. 나홍진이 구성한 장면들은 존재감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기주장이 분명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분명히 해당 장면에서 무언가를 정확하게 본다. 그리고 이내 곤경에 처한다. 목격하긴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대상은 투명한데 해석이 불투명해지는 상태. 한마디로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다.
<호프>는 공개 전부터 이미 수많은 풍문이 돌았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이 단일 영화로 한국영화 최고 수준에 이를 거란 소식이 들리자마자 기대가 하늘을 찔렀다. 단순히 규모가 큰 작품, 이른바 대작에 거는 기대와는 결이 조금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칸에 뜬 미확인 한국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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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OTT가 제시하는 방대한 영상 목록 앞에서 무엇을 고를지 주저하다가 시간만 낭비하거나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워낙 흔한 일이 되었고, 딱히 어려운 말도 아니어서 기가 막힌 용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게 된다. 이 풍요의 시대에, 누구나, 여기저기서 겪고 있는 결정 장애만을 의미할까? 뭔가 더 깊은 이유가 있고, 더 방대한 함의가 있을 것 같은데?
넷플릭스 증후군에 연계되어 있는 여러 현상이 있다. 주저함, 쓸데없는 시간 낭비, 선택한 것에 대한 집중력 저하와 불만족, 전체적인 효용과 만족감의 하락,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음. 이건 단지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생기는 현상인 것만 같지는 않다. 나는 원래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결정 장애를 겪는 성향도 아니다. 최적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게다가 선택지가 많다면 개별 선택에 대해서 너무 고심하지 않아도 된다. 실패하면 다시 선택하면 되고 새로
[정준희의 클로징] 풍요의 시대라서만 생기는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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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영화제의 계절이다. 몸이 그렇게 길들여져버렸다. 물론 2월에도 베를린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가 있지만 직접 가본 적이 없는지라 글로만 접한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주관적인 생체시계를 기준으로, 5월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영화의 꽃이 핀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부터 칸영화제로 이어지는 시즌이 되면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아니면 살인적인 스케줄에 비명을 지르거나. 아무튼 날이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직접 영화제가 가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멀리서나마 글과 이야기로 전해 들으며 영화 소식에 파묻혀 지낸다.
일부러 발품 팔아 영화제까지 가는 이유가 뭘까. 나중에 개봉할 때 편하게 볼 수도 있지만 영화제에서 영화를 만나는 건 단순히 일찍 보는 것 이상의 체험을 제공한다. 사실 영화제 시즌의 영화 소식은 태반이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인지라 영화 바깥의 말들이 더 힘을 얻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의 축제 한가운데에 머물 때 (약간의 과장을 보태) 온 세상이 영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영화제는 영화가 꾸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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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화제다. 화두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화제가 이미 타오르고 있는 불이라면 화두는 성냥이다. 담론 내에서 현재 활발히 이야기되고 있는 주제가 화제라면 화두는 그 이전 단계, 사유와 성찰을 촉발하는 물음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었으므로 이제는 질문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몇몇 글을 보고 처음엔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그 ‘질문’이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한 도구적인 조건문이라는 내용을 보고 갑갑해졌다. 원하는 결과를 빠르고 정확하게 도출하기 위해 던지는 물음은 까탈스러운 계약서의 세부 항목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해 질문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은 사유의 빛을 기꺼이 등진다.
지난 몇년간, 자기 소개문을 작성할 때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과 질문”이라는 문장을 써왔다. 이 선물에는 인공지능을 잘 길들이는 능력도 포함될까? 질문은 ‘나’와 세상을 향해 던져야 하는 것이지 화면 안 알고리즘의 부품으로 구축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전승민의 클로징] 질문에 관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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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씨네21> 입사 전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좋고 싫고, 또는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언어의 울타리 안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다. 몇 가지 그럴듯한 핑계가 있지만, 돌이켜보니 가장 큰 이유는 보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게 홍상수 영화는, 늘 직접 보는 것보다 정교한 언어로 주석을 달아놓은 글들을 보며 읽는 쪽이 더 흥미로웠다.
홍상수 영화를 둘러싼 비평의 언어가 흥미로웠던 건 특별히 고결하거나 심도 있는 통찰 때문은 아니다. 홍상수 영화에 화답하는 글들은 (그 영화와 닮아서) 모두 어딘가 꼬여 있다. 아니면 헤매거나. 때때로 조롱과 혐오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 보잘것없음이 불편하고 불쾌할지라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계속 흘끔거릴 수밖에 없도록 유혹한다. 거칠게 말해 먹물들의, 혹은 먹물이 되고 싶은 이들의 혐관(혐오 관계)이라고 해도 좋겠다. 2000년대 홍상수 영화는 확실히 지식인(을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홍상수 영화’라는 덩어리, 불가항력의 궤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