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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민의 클로징] 질문에 관한 질문

‘질문’이 화제다. 화두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화제가 이미 타오르고 있는 불이라면 화두는 성냥이다. 담론 내에서 현재 활발히 이야기되고 있는 주제가 화제라면 화두는 그 이전 단계, 사유와 성찰을 촉발하는 물음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었으므로 이제는 질문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몇몇 글을 보고 처음엔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그 ‘질문’이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한 도구적인 조건문이라는 내용을 보고 갑갑해졌다. 원하는 결과를 빠르고 정확하게 도출하기 위해 던지는 물음은 까탈스러운 계약서의 세부 항목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을 다루기 위해 질문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은 사유의 빛을 기꺼이 등진다.

지난 몇년간, 자기 소개문을 작성할 때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과 질문”이라는 문장을 써왔다. 이 선물에는 인공지능을 잘 길들이는 능력도 포함될까? 질문은 ‘나’와 세상을 향해 던져야 하는 것이지 화면 안 알고리즘의 부품으로 구축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질문이란 무엇인가? 좋은 질문은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과 곧장 직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그것은 어딘가에 부딪쳐 깎이고 비틀거리다가 우리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 가까스로 손안에 들어온 하나의 답안은 이내 다시 파기되어 새로운 질문으로 변모한다. 좋은 질문은 사유를 촉발하는 또 다른 질문으로 답한다. 시대와 삶을 좋은 방향으로 갱신해온 질문들은 결코 닫혀 있지 않았다.

21세기 이후의 한국 영화사에서는 세번의 질문이 있었다. 하나, 용서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밀양>) 둘, 믿음은 인식을 대체할 수 있는가?(<곡성>) 그리고 셋, 사랑은 이해인가 혹은 오해인가?(<헤어질 결심>) 세 작품 모두 장르적 문법이 발휘하는 동력 안에서 고유의 화두를 생성한다. 서사의 결과 그 자체보다 인식의 조건을 메타적으로 문제화하는 이들의 열린 결말은 질문 자체를 숨기면서도 드러내는 방식이다. 사건은 종결되지만 바로 그 마침표로부터 성찰이 시작된다. 엔딩크레딧이 오르면 해석의 공이 관객에게로 넘어가고, 관객은 사유할 의무를 부여받음으로써 텍스트의 부분으로 편입된다.

인공지능을 향해 ‘좋은 질문’을 할 역량을 키우자는 주장은 대상(AI)을 구미에 맞게 길들이고 훈육하는 능력을 함양하자는 말과 매한가지다. 단지 ‘너’를 ‘나’의 욕망에 맞게 조형하자는 말이다. 이때 우리를 포함한 세계는 결코 비판적으로 생성되거나 확장되지 않는다. 결과로서의 미래는 과거의 축차적 재현에 불과할 것이다. 독자와 관객은 텍스트의 몸을 통제하고 소비하는 오인된 권능과 더불어 비판적 역량을 스스로 잃을 것이다. 예술의 개방성은 콘텐츠의 폐쇄성으로 추락할 것이다…. OTT 채널링의 무한루프에 빠져 헤매는 ‘손’은 위기의 증상이다.

그러나 과연 인공지능 자체가 문제일까? 기술 비관주의는 쉬운 낙관의 한 종류다. 그렇다면 AI를 모종의 방식으로 길들이자고, 그것이 이 시대의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집단지성이 문제일까? 그에 앞서, 나의 질문은 과연 인공지능 시대의 조건 안에서 ‘좋은 질문’일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손에서 잃는 그 순간이 바로, 지성, 나아가 인간성의 종말이 도래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질문으로서의 텍스트가 선사하는 어려움, 그 향유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좋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지성의 과시가 아니라 지성의 존중과 사랑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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