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가 홍수를 이룬다.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는 모두 중요한 이야기로 여겨져 눈은 치켜뜨고 귀는 쫑긋. 그저 경청할 뿐이다. 그럼에도 거의 지적되지 않는 듯한 문제가 있어 무지를 무릅쓰고 약간의 말을 덧붙인다. 인공지능으로 인한 집단적인 인간 지성의 퇴화라는 문제다. 얼마 전 한 대학생이(대학원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챗지피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중간’(mesotes)과 유학의 ‘중용’(中庸)을 비교해줘”라는 질문을 입력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충격이 밀려왔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서양과 동양의 고대 철학 모두에 박식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야 하고 여러 복잡한 층위와 맥락에서 사유를 할 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질문의 맥락에 따라서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챗지피티는 그 고유의 능력을 발휘하여 두 개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간명하게 개조식으로 정리해냈을 뿐만 아니라 무리한 비교와 동일화를 조심해야 한다는 주의까지 깔끔하게 내놓았다. 질문자의 챗지피티 ‘학대’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물으면 챗지피티는 공손하게 “예, 맞습니다”로 시작하는 대답을 내놓는다. 질문자는 계속 “그래도 결국은 똑같은 것 아닌가?”라는 식으로 질문을 몰고 갔고 결국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 길고 긴 문답의 기록을 그가 어떻게 활용할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기록이 결국 두 개념이 같은 것임을 논증하는 데에 쓰일 것이라는 건 추측할 수 있었다.
챗지피티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할 질문을 챗지피티에 엉뚱하게 던져놓은 뒤 해답을 뽑아가겠다고 매달린 질문자에게 있다. 그는 단지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했던 것일까? 많은 책을 쌓아놓고 오랜 시간을 고민한 뒤 스스로 답을 찾아내야 하는 질문을 챗지피티를 닦달해 해결하려는 이가 그뿐만을 아닐 테다. 그에게는(그리고 아마 우리 모두에게는) 인공지능이 가장 올바른 답을 낼 수 있는 우월한 존재라는 모종의 숭배의식 또한 있었을 것이다. 편리함과 권위를 모두 갖춘 전지전능의 존재. 그 앞에서 우리는 온갖 질문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인공지능은 ‘생성적’(generative)이라는 그 태생의 굴레로 인해 온갖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원하는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은 위협적이다. 여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의존하며 아무 질문이나 마구 던지면서 그것을 답이라고 여기는 인간 지성의 퇴화 또한 위협적이다. 지금 우리는 ‘질문이란 무엇인가’, ‘해답이란 무엇인가’라는 어처구니없이 단순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에 처했다. 역설적이지만 인공지능의 출현과 발전으로 인해 더욱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는 게 아닐까. 여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인간 지성의 퇴화는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