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뇌병변장애인 작가 일라이 클레어의 책 <망명과 자긍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장애를 ‘당대 사회조직이 물리적·인지적 손상이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아, 그들을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으로 정의하는 마이클 올리버의 견해를 소개한다. 즉 “망할 놈의 학교 규칙이 내게 시간을 더 주지 않아서 시험에 실패한 것”이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한계”인 반면, “애덤스산이 내 발엔 너무 가파르고 미끄러웠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기를 실패한 것”은 “신체적인 한계”와 관련된다는 점을 저자는 안다.
하지만 저자는 덧붙인다. “내 몸 안으로 향하는 분노”와 “비장애중심주의로 향하는 분노”의 분리가 늘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예컨대, 저자는 ‘장애인에게 등산은 무리’라는 차별적·패배주의적 사고와 ‘장애인도 산을 오를 수 있다’는 장애 극복 신화를 모두 경계하며 산을 오르지만, 점점 가팔라지는 애덤스산 중턱에서 등반 중단을 결정하며 펑펑 울었다.
장애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아는데도 저자에게 이 등반 중단 경험이 상처로 남은 것은 왜일까. 장애이론과 법제도가 발달하더라도 장애 당사자에게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분열과 저항감이 있다는 사실은 뭘 뜻할까. 어쩌면 나는 ‘기-승-전-법제도 정비’로 수렴되는 ‘법제도 만능주의’에 안이하게 기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대도 이는 고용, 재화용역, 교육, 행정서비스 등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 ‘행위’를 금지할 뿐 ‘사적 영역’에서 누군가를 차별하고 싶은 ‘마음’까지 규율할 수는 없다. 장애인·이주노동자·성소수자를 더이상 ‘소수자’가 아니게 만들거나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하루아침에 격상시키지도 못한다. 법 제도의 정비가 반드시 마음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차별금지법은 여기 차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무엇이 차별인지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사회적 존재방식이 불편하다고 느낄 때, 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서라면 적어도 그는 그것이 시민권의 부당한 분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요하는 문제인지 덜 혼란스러워해도 된다. 자신의 소수자성이 사회적 박탈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재귀적 이해에서 벗어나 좀 다른 고민을 할 기회가 생긴다. 이것이 궁극적인 ‘해방’은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자유’라는 점은 분명하다.
<망명과 자긍심>으로 돌아오자. 저자가 등반을 중단했을 때, 친구들은 “장비를 잘 갖추고 충분히 연습하면 언젠가는 오를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할 뿐, “돌아서기로 선택하길 잘한 거야”라곤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장애인이라고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등반을 ‘타인의 평가를 요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신체 상태 및 느낌과 관련된 것으로서 대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산은 나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저자는 썼다. 차별금지법이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고민을 할 자유다. 자신의 신체와 경험을 보다 진솔하게 대면할 자유. 법이 할 수 있는 가장 작고도 큰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