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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의 연장선에서 생각하는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를 보면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표준적인 평가와는 무관한 생각이다. 특별히 제목에 ‘아이’라는 단어가 명시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신카이가 전작에 이어 버려진 아이들을 스크린에 들여온다는 점에 이끌렸다. <너의 이름은.>에서 어머니가 없는 가족
글: 김병규 │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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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경계선>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영화 <경계선>에 대해 말하면서 ‘아름답다’는 표현을 써도 될까? 극장을 나오면서 이 질문이 자꾸 마음을 눌렀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질문을 뒤집어본다. <경계선>을 아름답지 않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해야 한단 점이다. 몇몇 화면들이 꾸준히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글: 이지현 │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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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82년생 김지영> 현실이 삼킨 존재를 비추는 허구의 빛
<82년생 김지영>은 ‘영화’비평이 불가능하도록 찢긴 영화다. 영화의 운명은 영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영화는 영화를 수용하는 사람에 의해 재창조되기 마련이다. 영화의 텍스트성이라 할 이것이 대개는 새로운 담론을 탄생시키는 긍정적인 행위라고 나는 여겨왔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은 때로는 수용자가 영화를 ‘창조적’으로
글: 김소희 │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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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경계선>에서 티나는 왜 냄새를 맡지 못했나
<경계선>은 벌레를 먹지 않던 티나(에바 멜란데르)가 아기에게 벌레를 먹이며 끝나는 영화다. 티나가 트롤이라는 것은 티나의 독특한 외형이나 감정을 읽어내는 후각 능력으로도 표현되지만, 벌레에 주목하고 싶은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고독하게 서 있던 티나가 집어올렸다 내려놓은 벌레가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다
글: 박정원 │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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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하이 라이프>, 새로운 창세기를 쓰다
SF영화의 클리세가 지워진 영화,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클레르 드니는 일반적인 SF영화의 관습을 따라갈 마음이 없다. 에덴동산을 연상시키는 우주선의 정원을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자신만의 창세기를 써내려간다. ‘종의 종말’의 위기, 새로운 ‘종의 기원’을 모색하는 창세기, 그것이 바로 <하이 라이프>다.
자폐적 욕망의 창
글: 안시환 │
201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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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영화 <신문기자>가 실화와 실화 바탕 소설과 어떻게 다른 길을 가는가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최근 어떤 영화나 TV프로그램이 가장 재미있었냐는 내 질문에 한 친구가 “뉴스”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금세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떠한 영화도 그렇게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하루 만에 다 보여주지 못할걸?”
이때 특히 난처해지
글: 우혜경 │
201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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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리안 감독의 <제미니 맨>이 서사를 단순화하고 액션을 추가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리안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중년 남자들은 늘 쓸쓸해 보였다. <색, 계>(2007)의 마지막 장면,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는 국가, 정치, 신념, 권력이라는 거대 가치 속에 가까스로 고독한 자아를 감춰오다 왕치아즈(탕웨이)를 만난다. 진짜 자기를 알아본 유일한 타자, 그녀를 숙청함으로써 그는 “유일한 동지이자 적”을
글: 김지미 │
2019-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