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카링 아이노스는 링컨센터에서 열린 시사회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인비저블 라이프>를 “열대지방의(tropical) 멜로드라마”로 규정했다.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극적 서사 전개보다 캐릭터에 집중됐던 그의 전작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 작품의 특징을 담아내기에 이 단어는 아주 적절해보인다. 브라질 밀림의 푸른 녹색과 인간의 정념을 상징하는 원색 계열의 강한 색감이 화면 전체에 일렁인다. 또 그는 평소 자신은 관객의 감정을 조작한다고 생각해 배경음악 사용을 극도로 꺼렸지만 이 작품에서만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고백했다. 현란한 라틴 선율의 클럽 음악과 주인공 에우리디스(카롤 두아르트)의 내면을 대변하는 강렬한 피아노 선율이 시종일관 귀를 울린다.
‘멜로드라마’는 ‘웨스턴’이나 ‘뮤지컬’과 달리, 소재나 형식의 공식화를 통해 유사한 플롯과 연출 기법을 재생산하는 시스템적인 장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이 과잉된 감정 상태 속에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정념의 드라마틱한 상태를 장르적인 명칭으로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멜로드라마’의 갈등의 원인은 ‘모럴’, 그 시대의 미풍양속이다. 주로 가부장적 질서와 결탁한 이 사회적 통념은 개인이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강력하다.
<인비저블 라이프>는 세팅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로 포진되어 있다. 일단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혼전순결이 강요되고 여성의 사회생활이 자유롭지 않았던, 1950년대 브라질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매, 귀다(줄리아 스토클러)와 에우리디스는 서로를 각별하게 아끼지만 자유분방한 언니 귀다가 그리스 선원 이고르에게 빠져 가족 몰래 브라질을 떠나면서 둘은 헤어진다. 순종적인 에우리디스는 집안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해 집을 떠난다. 이후 만삭의 귀다가 홀로 귀향한다. 싱글맘을 집안의 수치로 여긴 아버지는 귀다를 쫓아내고, 에우리디스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한다. 그 이후 자매는 수십년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보통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인 여성은 도덕관념(정조/혼전순결)에 반하는 실수(연애) 혹은 폭력(강간)으로 순결성을 상실한 뒤 시대적 통념의 희생양이 되어 비극적인 결말(죽음)에 이른다. 이런 결말은 관객에게 가부장적 도덕률을 재교육하는 효과가 있다. 관객은 과정적으로는 주인공을 비극적으로 만든 사회적 통념에 반감을 갖지만 결과적으로는 도덕률을 어긴 주인공이 처벌받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도덕률을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인비저블 라이프>의 귀다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의 서사적 요건을 갖췄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연출자의 시선은 확연히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선의 차이가 이 작품을 멜로드라마의 통속성과 관습의 재교육 효과로부터 분리시킨다.
“영원히 나만을 사랑해줄 것”이라며 에우리디스에게 자랑했던 이고르가 바람둥이임을 깨달은 귀다는 만삭의 몸으로 리우데자네이루의 가족에게 돌아온다. 대문을 두드리는 그녀에게 죄책감이나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다.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목소리에는 생기와 반가움이 넘친다. 그런 귀다를 어머니는 따듯하게 안아주지만 아버지는 생선을 다듬던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격하고, 창녀를 대하듯 품 안에 지폐를 쑤셔 넣으며 집 밖으로 쫓아낸다. 귀다는 자신을 힐난하고 거부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한 어머니에게 결코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보통 멜로드라마는 인습이 빚어낸 갈등을 절대화하고 상황적 비극에 휘말린 주인공에게 동정을 유도한다. 그러나 <인비저블 라이프>는 동정이 아닌 분노를 택한다. 동정과 분노는 폭력성에 대한 상반된 대응이다. 주인공을 향한 동정은 관객에게 자신의 도덕성을 단속하게 만든다. 부정성에 대한 소극적 반응이다. 누구나 비참한 상황의 주역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분노는 주인공을 억압하는 환경과 가치관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누구도 가해자의 편에 서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구조와 인습의 부조리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이것은 부정성에 대한 적극적 반작용이다.
미혼모가 된 귀다는 부모로부터 거부당한 뒤, 노동계급이 되어 살아간다. 주중에는 조선소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청소 노동자로 일하며 아이를 키운다. 귀다는 동네 여성들이 일할 수 있게 아이들을 봐주는 필로메나와 유대를 이루며 또 다른 가족이 된다. 반면 에우리디스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편과 결혼해 가족을 돌보며 살아간다.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음악원 입학시험은 늘 보류된다. 남편에게 피아노는 에우리디스의 성적 매력을 올려주는 소품일 뿐이다. 그는 피아노에 투사된 그녀의 욕망을 읽고 싶어 하지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늦은 나이에 지원한 음악원 수석 입학소식에 남편은 육아와 가사가 자기 몫으로 떨어질까 불평뿐이고 아버지 역시 탐탁지 않게 여긴다. 오직 에우리디스의 딸만 엄마의 소원이 피아니스트였음을 기억하고 기뻐한다.
에우리디스는 자신의 욕망을 죽여가며 가족의 가치를 지켰다. 귀다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필로메나와 새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에우리디스에게 “가족은 핏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깨달음이 담긴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너무 늦게 에우리디스에게 도착한다. 두 자매의 삶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보호받는다는 환상과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에우리디스는 아버지가 임신해서 찾아온 귀다를 쫓아내고, 알량한 수치심 때문에 같은 도시에 살고 있던 언니를 평생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극도로 분노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귀다에게 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따귀를 갈긴다. 귀다 역시 우연히 식당에서 엿보게 된 아버지의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뜬다. 이 작품에는 딸들의 삶이나 욕망보다 자신의 체면 세우기에 급급했던 가부장을 위한 변명의 자리는 없다. 연출가의 이런 단호한 결단 덕분에 자매의 시련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분노의 씨앗이 된다.
이 작품은 통상적으로 멜로드라마에 차고 넘치는 눈물 대신 피와 땀으로 자매의 감정과 삶의 고단함을 실체화한다. 피를 흘리며 병원을 빠져나오는 귀다와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언니를 잃은 상실감에 자해를 한 에우리디스. 그들의 피는 아버지가 훼손한 그들의 삶과 관계에 대한 증거가 된다. “왜 모든 이들이 계속 땀에 젖어 있느냐”는 관객의 질문을 받을 정도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브라질의 열대 기후를 육체 위에 재현한다. 아이노스 감독은 ‘땀’이야말로 이 작품이 스튜디오에서 생산된 작위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시공간을 증거하는 영화라 답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자매의 가상적 결합을 본다. 그 대목에서야 영화는 눈물을 허용한다. 서로를 통해 꿈꾸던 이상적 자아의 환영적 만남은눈물샘을 폭발시킨다. 비극에 대한 동정이 아닌 그들이 공유할 수 없었던 시간과 감정에 대한 회한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보이지 않았던 귀다의 삶’은 필로메나의 시선으로 따듯해졌고, 에우리디스의 갈망으로 충만했다. 귀다는 아버지에게 탕녀였지만 에우리디스에게 결국에는 전달된 편지 속 메시지처럼, ‘자랑스러운 언니’가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