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1944년에 출간된 책 <픽션들>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보르헤스는 가상의 인물 피에르 메나르가 어떻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시 썼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농담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피에르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일부분을 글자 그대로 똑같이 써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피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단 한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하지만 소설 속 화자는 세르반테스보다 300년 후의 프랑스인 피에르 메나르에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외국어’인 동시에 ‘고어체’여서 같은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동일한 텍스트라도 그 텍스트를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무엇이든 다 가능해져버린 지금 시대의 예술에 대한 매우 앞선 대답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피에르 메나르처럼 외국 건축가의 작품 하나를 원본 그대로 설계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건축설계를 하다 보면 자꾸 다른 건축가들의 건물을 인용하게 되는데, 그럴 거라면 차라리 건물을 통째로 옮겨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나는 이런 방식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축에서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건축이라는 콘텍스트
1971년에 지어진 김중업의 삼일빌딩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다. 멀리서 보면 1958년 뉴욕에 건설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빌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삼일빌딩을 보면 나는 이상하게도 ‘아득한 느낌’을 받는다. 삼일빌딩은 너무 아름다운 것 앞에서 저항하지 못한, 만드는 사람의 슬픔을 갖고 있다. 물론 서울의 ‘시그램빌딩’은 포스트모던적인 의도라기보다는 ‘저개발의 기억’에 가까운 일이겠지만,“아니 도대체 이게 왜 여기서?”에서 촉발된 이 아득한 느낌은 보르헤스 작품에서 자주 발견되는 ‘미로의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의 설명을 인용하면, 어쩌면 삼일빌딩은 원전보다 더욱더 풍요롭다고 말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아동용, 뮤지컬, 영화 등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하는 것처럼 시그램빌딩도 여러 다양한 버전이 존재한다. 하지만 뉴욕이나 시카고에서 발견되는 시그램빌딩과 비교해 삼일빌딩은 원본에 더 가깝다. 원본에 가까울수록, 뉴욕에서 멀어질수록, 이 새로운 시그램빌딩은 더욱더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된다.
물론 실제로 삼일빌딩을 가까이서 보면 시그램빌딩과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축은 콘텍스트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건축평론가 윌리엄 커티스는 나라에 따라 공사장에서 들리는 소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인도와 미국의 예를 든 적이 있는데, 노동집약적인 인도의 공사장이 농번기 사이에 동원된 농민들의 노동요로 대표된다면, 기술집약적인 미국의 공사장은 에어건 쏘는 소리로 상징된다고한다. 장소의 이런 차이는 동일한 설계도 다르게 구현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글로 쓰인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텍스트의 동일함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삼일빌딩과 같은 건물을 인식하는 것은 멀리서 본 인상이다. 아니, 정확히는 텍스트도 똑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누가 300년 전 소설을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화자를 이용해 설명하는 소설 속에서만 그 사실이 필요하다.
<트랜짓>은 현재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망명을 떠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있다. 시간여행을 주제로 한 영화라면 현재의 장소에서 과거의 사건이 진행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어떤 설명도 없이 현재의 장소와 과거의 사건이 공존하는 이 ‘시대착오적인’ 방식은 <트랜짓>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다.
영화에서 이 구조가 드러나는 순간은 인상적이다. 영화가 시작했을 때, 오래된 건물들로 이루어진 파리와 나치를 피해 도피한 망명자들의 모습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차와 경찰관의 모습을 보고, 영화가 20세기 초가 아니라 현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망명자들이 현재의 경찰관에게 검문받는 모습은 의외로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유대인이나 망명자들을 검문하는 과거의 경찰과 불법 난민들을 검문하는 현재의 경찰은 <트랜짓>에서 과거와 현재가 이질감없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구실을 하고 있다.
<트랜짓>이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와 같은 구조가 되기 위해서는 원저를 필요로 한다. 미국이나 멕시코로 떠나는 통과 비자를 얻기 위해 마르세유로 몰려드는 망명자들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카사블랑카>를 떠오르게 한다. 물론 기억의 오류 때문이겠지만, 2차 세계대전의 망명자들과 통행증에 관한 소재는, <카사블랑카>와 <트랜짓>의 이야기가 동일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마도 현대적인 배경이 이 망명자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이야기보다는 구조 자체에 더 집중하게 해서, <트랜짓>이 <카사블랑카>와 같은 이야기일 것이라는 착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카사블랑카>에서 북아프리카를 빼고
보통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새로운 작품인 이유를 설명할 때 ‘외국어’와 ‘고어체’를 말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편집에 관한 것이다.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내용 중 지방색 같은 장소의 콘텍스트를 더 드러내는 부분을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트랜짓>에서 카사블랑카 같은 북아프리카 도시 대신 파리나 마르세유를 배경으로 선택한 것을 같은 이유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특히 마르세유 장면에서 나오는 현대적인 공동주택 건물은 장소의 특징을 사라지게 만드는 요소다. <트랜짓>은 <카사블랑카>의 원전에서 장소의 콘텍스트를 최대한 제거하고,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트랜짓>은 망명이나 난민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구조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 구조의 효과가 희미해질 무렵, 또 다른 주제인 남녀의 엇갈림으로 방향을 튼다. 구조가 특별한 영화가 그것만으로 기억되는 숙명을 피하기 위한 현명한 방법이지만, 현명한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트랜짓>이 화자를 통해서 사건을 설명하고, <피에르 메나르,‘돈키호테’의 저자>가 화자를 사용한 방식이, 나에게 더 <트랜짓>을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와 같은 구조로 보게한 것 같기도 하다. 너무 거창한 표현이지만, 다시 한번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의 한 문장을 빌리면, “진실이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