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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아무 사이도 아닌 사이
인터넷에서 “원수한테라도 생리대는 빌려준다”는 말을 보았다. 생리대 무상배포 정책으로 설왕설래가 있던 중, 여성 동지에게 생리대를 안 빌려주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맥락이었다.
저 문장을 보고 떠오른 일이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집단따돌림을 당했었다. 따돌림을 당하면 교실이라는 공간을 시선과 거리를 중심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간단한 예로, 나는 맨 뒷자
글: 정소연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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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영화를 보러 가는 일
영화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할까 고민한 적이 있다. 20대에 다녔던 영화사가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문을 반쯤 닫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때는 영화 촬영과 상영 포맷이 아날로그인 필름에서 디지털로 전환이 이루어지던 시점이기도 했고, 산업 측면에서도 영상미디어의 영역이 인터넷을 넘어 모바일로 확장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나는 당시 영화라는 것이 곧 사라질지도 모
글: 이동은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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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기
3월이 된 지 아흐레가 지났지만, 아직 새 학기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개강을 1~2주 이상 늦췄고, 그마저도 한달간 온라인 강좌로 대체하라는 공지가 있었다. 학교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경한 프로그램을 이용해 강사가 알아서 강의 동영상을 만들라고 안내했는데,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을 떠올리며, 그
글: 오혜진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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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기
제92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호아킨 피닉스의 수상 소감이 한동안 미국의 인터넷을 달궜다. 하나의 동물종(인간),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성(性)이 다른 상대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부정의에 대항하여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소감은 그 내용도 형식도 많은 이들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었다. 그가 이 멋진 수상 소감을 발표한 오스카가
글: 김겨울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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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낭만에 대하여
설 즈음, 오랜 친구가 밤에 불쑥 전화를 했다. “방 청소를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문집을 발견했는데, 네가 아주 변태같은 글을 써놔서 네 생각이 났다”는 전화였다. 그렇다. 그는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악우(惡友)라는 농이 어울리는 귀한 친구다. 나는 또 나대로 그 말에 흥미가 동해, 문집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그는 얼마 후, 정말 문집에
글: 정소연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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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답 없는 생활
“강박이 좀 있으신 것 같군요. 정확히는 강박으로 인한 불안이에요.” 정신과의사는 내 불안의 원인이 강박이라고했다. 특히 의사소통에 있어서 완벽하게 전달하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와 강박은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나는 미역국을 먹고도 시험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짝짝이 양말을 신고도 외출을 할 수 있는
글: 이동은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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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나쁜 전통과 ‘끊어진 팔’
1940년 1월, 조선어로 쓰이는 몇 안 남은 문예지인 <문장>에 ‘문학의 제諸 문제’라는 흥미로운 좌담 기록이 실린다. 대표적인 조선 문인들이 총출동한 이 좌담에서 ‘문학상’은 뜨거운 화두였다. 일본 문학계가 ‘조선예술상’을 제정해 조선문학을 오키나와문학·규슈문학 같은 ‘지방문학’으로 흡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태준이 “상의 명예
글: 오혜진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