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이 좀 있으신 것 같군요. 정확히는 강박으로 인한 불안이에요.” 정신과의사는 내 불안의 원인이 강박이라고했다. 특히 의사소통에 있어서 완벽하게 전달하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와 강박은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나는 미역국을 먹고도 시험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짝짝이 양말을 신고도 외출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의사에게 내 강박에 대해서 강박적으로 더 캐묻고 싶었으나, ‘그런 태도가 바로 강박입니다. 강박인데 강박이 아니게끔 보이려고 하는 것도 강박이지요’ 따위의 말장난 같은 타박을 들을까봐 관뒀다. 나는 강박이 없으니까 강박이 없는 사람처럼 의연해야 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 나온 그날부터 강박은 일종의 화두가 되었고,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강박이 공황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의사가 말한 의사소통 강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완벽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예를 들자면 내가 떠올린 어떤 구체적 오렌지를 상대방도 거의 동일하게 그 오렌지로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일 것 같았다. 오렌지처럼 구체적인 사물일 경우엔 그래도 자세히 설명하면 서로 이해의 폭을 줄이면서 교집합을 넓혀갈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기분이나 의식, 의견일 경우엔 조금 골치 아파진다. 이러한 것들에 유난히 매달리거나 우선순위를 과도하게 부과하는 것이 강박일까? 그렇다면 내게 그런 강박이 있었던가? 내가 아는 한 아니다(물론 확신할 수 없다). 소통을 위해서 가능한 노력을 하지만 나는 오히려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고 믿는 편이다. 무한과 제로처럼 애초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강박에 대해서 강박적으로 탐구하는 꽤 길고 외로운 시간이 흘렀지만 결국 해답은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나왔다. 나는 그간 탐구한 사연에 대해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내 강박은 이것이었다. 바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 그 말을 듣는 순간 관점이 재정립되면서 한동안 엉뚱한 우물을 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난 모든 것에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장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곤 했다.
영화를 연출하는 일은 매번 발생하는 수많은 선택지와 돌발변수 가운데 하나의 지름길이나 차선의 답을 찾는 직업이기도 하다.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가장 나은 선택도 없다.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어떤 선택을 하든지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그렇게 답을 찾는 데 우선순위를 부과했던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답보다 그다음을 생각한다. 때로는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에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혹은 무수한 선택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때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답 없이 사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