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즈음, 오랜 친구가 밤에 불쑥 전화를 했다. “방 청소를 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문집을 발견했는데, 네가 아주 변태같은 글을 써놔서 네 생각이 났다”는 전화였다. 그렇다. 그는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악우(惡友)라는 농이 어울리는 귀한 친구다. 나는 또 나대로 그 말에 흥미가 동해, 문집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그는 얼마 후, 정말 문집에서 내 글을 찍어 문자로 보내주었다. ‘여름의 대삼각형’(여름의 북반구 밤하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밝은 별 3개가 이루는 삼각형)이라 일컫는 베가, 데네브, 알타이르에 대한, 조금도 귀엽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 문자까지 병기한 다소 장황한 설명이었다. 그는 사진을 보내며 중학교 2학년도 아니고 초등학교 6학년이 학교 문집에무슨 이런 글을 쓰냐, 너는 역시 그때부터 변태였다며 낄낄 웃었고, 나는 읽어보고 “ㅎㅎ 나 같은 글이네”라고 했다.
우리는 연락을 한 김에 약속을 잡았다. 토요일, 여의도였다. 나는 그가 약속한 칼국숫집 앞에 나타나자마자 “야, 현금, 현금 천원 있어?”라고 물었다. 현금 천원을 내면 주차권과 500원을 거슬러 주는 칼국숫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야, 우리가 지금 몇년 만에 보는데 맨 처음 하는 말이 그거냐”라고 한숨을 쉬더니, 다급하고 진지한 내 표정을 보고는 “삥 뜯냐” 하고 덧붙이고는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칼국수를 먹었다. 만두도 먹었다. 맛있었다.
식후에는 근처 카페에 갔다. 그는 마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마산은 우리의 고향이다. 그는 고등학생 때 부터 단골인 칵테일 바가 여전히 마산에 있어 본가에 갈 때마다 들르는데, 이번에는 마침 밴드 공연 뒤풀이를 하던 단체객이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도 그 속에 섞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더란다.'
“요새는 별로 안 남은, LP판 잔뜩 있고 주인 취향인 음악 들으면서 천천히 칵테일 한잔 마실 수 있는 빈티지한 느낌의… 뭔지 알지? 마산에 그런 데가 있었어. 댓거리에 가면 그 뒤쪽 무슨 가게 2층에 소주 파는 데가 있었거든. 친구들하고 거기에도 몇번 몰려가긴 했는데, 그런 술집은 좀 마음에도 안 들고, 소주는 정말 맛도 없고. 그래서 그 바를 찾은 다음부터는 여기 다녔지. 고등학생이, 크흐, 그런 칵테일 바에. 그러다가 지금까지 단골이 됐어.”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를 보았다. 나는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하는 타이밍인 것 같아 잠시 고민했다.
“고등학생이 그런 칵테일 바에 가서. 하하.” 그가 힌트를 줬다. “음, 엄밀히 말하면 위법이지.”내가 말했다. 그가 기막힌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야, 정소연! 위법이라니! 내 말은, 낭만이 있었다고, 낭만이.”
나는 미성년 음주는 아무래도 위법행위라고 생각했지만,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듯 ‘위법, 위법이라’하고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미안해졌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는 나를 레코드 가게에 데려가고, 나에게 퀸 앨범을 처음 선물하고, 프레디 머큐리를 알려준 친구였다. 그렇구나. 낭만이구나. 혼자서는 가질 수 없었을 기억을 나누어 받았다는 깨달음에, 문득 아주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