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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완벽하게 사라지는 일
그날은 Y가 출근 버스 안에서 졸아 종점까지 가버린 어느 날이었다. 그날 아침 마법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Y를 뺀 세상 전부가. Y가 출근한 직장에서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집으로 돌아가자 그곳엔 다른 이가 아무 일 없듯이 살고 있었다. Y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는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문자 그대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글: 이동은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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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원본과 사본’에 대한 주석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한 책 <다크룸>은 미국 페미니스트 수전 팔루디가 격조했던 아버지로부터 한통의 이메일을 받으며 시작된다. 폭력적인 가부장 ‘이슈트반 팔루디’가 성전환수술을 받은 후 ‘스테파니 팔루디’로서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긴 설명 없이 오직 ‘사진’으로만 말하고자 했는데, 그건 평생 광고사진 촬영과 영화 제작을 해온 아버지에게 익
글: 오혜진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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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정답은 함정이다
그럴 리가 없다. 세상일이 그렇게 명쾌할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견디질 못해서 스스로 명쾌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복잡한 세상에서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해가며 더 복잡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고 그걸 정답이라고 믿는다
글: 김겨울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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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윤리에 대하여
작가로 일하다 변호사가 된 다음 자주 받는 질문들이 있다. “변호사로 전직한 이유가 뭔가요?”, “강력범을 변호할 수 있나요?”, “돈을 많이 버나요?” 같은 무난한 질문도 있지만, 다소 곤란한 질문도 있다. 그중 가장 난처한 질문을 딱 하나 꼽자면 단연 “사건 맡은 경험으로 소설을 쓰기도 하나요?”다.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글: 정소연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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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사월의 기억
중학교 시절, 나는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 H와 종종 하교를 함께하곤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진입로를 지나 학교 아래에 다다랐을 때 빨간 소형차를 보았다. “혹시 너희 2학년이니?” 차 앞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물었다.“네.” “나, 6반 제일이 엄마인데, 6반은 아직 안 끝났니?” 6반이라면 우리 옆 반이었다. 우리 반이 종례가 늦게
글: 이동은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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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코로나19 시대의 선거 유감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공보물이 도착했다. 두툼한 분량이지만 다 읽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후보자명과 정당명을 유권자에게 빠르고 확실하게 주지시키겠다는 실용적 목적으로 제작된 이 선거공보들을 읽는 심사는 답답하다. ‘미래, 기회, 경제, 통합, 위기, 국민, 개혁, 혁명’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정당이 없고, 모든 문장에 느낌표가 남발된다
글: 오혜진 │
일러스트레이션: 다나 │
2020-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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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로부터]
세상의 모든 롤빵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빵집 주인은 부부에게 따뜻한 롤빵을 건네고, 그들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다. 부부는 불과 며칠 전 아이를 잃었다. 아이의 생일 케이크는 완성되었지만 그걸 먹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다. 며칠간 허기져 있던 배를 채우고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다.
글: 김겨울 │
일러스트레이션: 박지연 │
20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