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를 다녔고 책을 소재로 영상을 만들며 문학을 사랑하는 나는 한때 이과에 몸을 담고 있었다. 과학을 좋아하고 법의학 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므로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문과와 이과 구분이 그때만 해도 향후 진로를 결정하는 거대한 선택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미련 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화학, 수학1, 수학2 등을 숨차게 배우고 있었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다시 한번 큰 결정을 내렸다. 문과로 전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예술과 철학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수학과 과학만 머리 빠지게 공부하고 있자면 즐거우면서도 숨이 막혔다. 유기화학 단원이 재밌어 죽겠으면서도 미술사 책에서 읽은 내용이 자꾸 생각났다. 파동 단원이 너무 흥미로우면서도 음악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생각들을 충분히 숙고해보기도 전에 배워야 할 분량과 풀어야 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밀려왔고, 마침내 나는 이 숙고에 더 무게를 싣겠다고 선언했다. 미학과에 가고 싶었다.
대학교의 인문학부에서 1년을 보낸 뒤 전공을 결정해야 했다. 또 한번의 큰 선택이었다. 진학한 학교에서는 미학과가 없는 대신 철학과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고민 끝에 심리학과에 진학했다. 인문학부에 속해 있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과학적인 학문. 철학과 심리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달랐고, 나는 가장 첨단의 과학적인 관점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을 배워보고 싶었다. 심리학과에는 미학과를 나와 인지과학을 공부하고 인지신경과학을 가르치는 교수도 있었다. 이후에 또 하나의 전공을 선택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철학과를 선택했다. 고등학교에 문과와 이과 구분이 없고 대학에서 자유로운 전공 선택이 가능했다면 이런 혼란의 추억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억지로 나눠놓은 영역 사이의 담을 넘어다니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하지만 이건 시간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었다. 나는 심리학과 수업에 가서는 철학과 학생이 되고 철학과 수업에 가서는 심리학과 학생이 됐다. 나는 인간이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논문을 읽을 때 근거를 철저히 살펴야 한다는 것과 철학적 에세이의 각 줄에 담긴 깊은 함의를 읽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명쾌하지도 않다는 것, 그리고 학자들은 늘 반론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 혼란의 경험으로 나는 경계에 머무르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졸업 후에 나는 알려져 있듯 책을 소개하는 유튜버가 됐다. 유튜브에서 나는 문학 작품도 과학책도 인문학 책도 소개한다. 유튜브에서는 책을 소개하고 출판인들에게는 유튜브 강연을 한다. 내가 책과 유튜브라는 각각의 경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혼란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낸 책의 저자 소개에 이렇게 썼다. “유튜브와 책 사이, 글과 음악 사이,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서서 세계의 넓음을 기뻐하는 사람.” 이 세계가 이렇게 넓다는 것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영역이 실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 모든 게 인간이라는 것이 아주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