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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클래식]
영화기자 모임 해체 요구 시위, 일 경찰 ‘영화인폭동사건’이라며 검거령
그때쯤 찬영회 사건이 있었죠(1931년). 신문사에 학예부 기자들이 모여서 찬영회(贊映會)를 맨들었습니다(1929년). 명분은 각 신문 문예부 기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국산영화, 외화 잘된 거 추천해서 선전해주고 감독, 연기자 신문에 소개한다는 거였습니다. 국산영화 하나 완성되면 찬영회 기자들 초대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대접하면 어떤 신문은 개봉
200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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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클래식]
<엑소시스트> <프렌치 커넥션>의 오언 로이즈만
1973년 성탄절 다음날, 관객은 이제껏 상상하지 못했던 정령과 조우한다. 바로 공포영화의 새로운 공기를 형성하며 예기치 못한 흥행과 평단의 호응을 거머쥔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를 통해서이다. 이는 전설적인 <대부>의 성과에 뒤이은 것으로, 오스카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영화로 최고 촬영상을 수상
200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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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클래식]
<파고> <시드와 낸시>의 로저 디킨스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형과 함께 3∼4마일은 족히 되는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비를 맞으면서도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단체에도 가입했는데, 그 당시 피터 와킨스의 <워 게임>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핵전쟁이 일어난 런던을 그린 영화로, 픽션임에도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90년대까지 상영금지되었지만 어떻게 우리 단체에서 복사본을 입수
200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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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클래식]
조선키네마사를 탈퇴하고 ‘나운규프로덕션’ 간판을 걸다- 윤봉춘 4
‘조선키네마사’(1926년 서울에서 일본인 요도에 의해 창립. 2년간 <아리랑>을 포함한 6편을 제작하여 초기 한국영화사에서 비중이 큰 프로덕션이다.- 필자)에서 <아리랑>(1926), <풍운아>(1926), <들쥐>(1927), 네 번째 작품으로 <금붕어>(1927)를 맨들었지. 역시 나운규 원작·각
200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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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클래식]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영화의 힘 느껴, 배우가 되다- 윤봉춘(3)
목재소에서 인부로 일주일을 일한 적이 있는데 하루는 거기서 쓰러졌어요. 의사의 말이 자기 가슴을 짚어봐라, 왼짝 가슴을 짚어보니까 파딱파딱 하거든요. “이게 심장인데 당신은 물이 잡혀서 심장이 점점 오른쪽으로 이사갔다”는 겁니다. 수술합니다. 큰 대야를 가지고 하는데, 숨을 들여쉬면 확확 나오는데 사람 속에 무슨 물이 한 대야를 넘어요. 대야를 또 바꿨습니
200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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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클래식]
누벨바그의 산파
<네 멋대로 해라>에서의 미셸과 파트리샤를 따라 파리의 샹젤리제를 묵묵히 따라오던 카메라의 움직임을 주목하게 된 것은 전에 없던 소박함과 진실함 때문이었다. 카페와 상점을 따라 줄곧 이어지던 화면은 단순한 진리, 곧 거기에 이미 삶이 있다는 것을 전달해준다. 기존의 영화와 젊은 영화를 양분했던 그들 나름의 영화찍기의 정신은 레일도 없이 휠체어에
200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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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클래식]
“일본 경찰에게 고문 당해 병신이 됐어”
최경재 목사가 우리를 부르더니 “서울에서 만세 불렀다, 우리한테는 이 태극기가 독립선언서다, 그러니까 이걸 만들어서 밤중에 경찰 몰래 두루마기 속에 넣어가지고 와라. 누구한테든 보이지 않게 주의해라.” 고런 부탁을 했어요.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임무를 다했는데, 고것이 회령에서는 서울보다 한달이 늦은, 양력으로 사월 초하룻날 일입니다.그 날이 보통학교 졸업식
2001-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