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성탄절 다음날, 관객은 이제껏 상상하지 못했던 정령과 조우한다. 바로 공포영화의 새로운 공기를 형성하며 예기치 못한 흥행과 평단의 호응을 거머쥔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를 통해서이다. 이는 전설적인 <대부>의 성과에 뒤이은 것으로, 오스카 10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영화로 최고 촬영상을 수상한 촬영감독 오웬 로이즈만과 <엑소시스트>의 인연은 한참을 거슬러간다. 매일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그의 부인은 언제나 책에 몰두하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베스트셀러 <엑소시스트>였다. 그뒤 몇달이 지나, 감독 윌리엄 프레드킨은 그에게 이 소설의 영화화를 제의했다.
지금의 디지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고 보면, 촬영은 전적으로 카메라효과와 특수장치에 의존하여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촬영의 핵심 즉, 관객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여 실제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려는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마치 주위에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조심스레 숨죽인 채, 미묘한 움직임을 포착해내는 카메라의 시선은 공포의 전율을 전달할 사실적인 로이즈만의 영상 기법이었고, 이로써 낯선 공포는 점차 윤곽을 드러낸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마 지금의 영화를 찍는 이들은 고도의 기술이자 하나의 예술로서 촬영의 역할을 비약적으로 넓힌 촬영감독 오웬 로이즈만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소년 시절 로이즈만은 넓은 구장과 환호성에 사로잡힌 야구광이었다. 1936년 브루클린 태생의 어린 야구선수를 영화와 인연지어줄 계기는 뉴스카메라맨이었던 아버지에게서도 편집을 하던 삼촌에게서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닥친 팔 부상으로 투수의 꿈은 좌절되었고,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하게 된다. 낮은 보수와 따분하기만 한 엔지니어로서의 역할이 그에게는 애초 매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방학중에 카메라 렌털 상점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결국 광고의 보조촬영기사로 촬영과의 첫 만남을 개진한다.
첫 영화인 빌 건의 <스톱>(1970)을 제의받은 것은 몇년 뒤 뉴욕 TV광고계의 선두 프로덕션 MPO에서 촬영감독을 하던 때이다. <스톱>의 후반작업을 하던 중 운명처럼 윌리엄 프레드킨을 만났고, 광고와 영화에서 보여준 로이즈만의 영상은 젊은 감독을 매료시켰다. 놀랍도록 숨막히는 <프렌치 커넥션>(1971)의 자동차 추격신은 와이드렌즈에서 롱렌즈에 이르기까지 샷마다 다르게 사용된 렌즈를 통해 한층 강화된 긴장을 선사했으며, 다큐멘터리적인 기법과 맞물려 사실감을 더해주었다. 로이즈만은 수차례 캄캄한 자신의 집 주차장에서 진 해크먼과 로이 샤이더를 대신해 아내와 함께 차 안에서 작은 램프에 의지한 채 빛을 담아내는 실험을 그치지 않았다. “촬영을 하는 과정에서 공기, 그건 바로 빛이었다. 어디를 가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빛이 주위에 어떻게 떨어지는지 살펴보았다. 빛에 가해진 미세한 변화로도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르게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간 <프렌치 커넥션> <엑소시스트> <네트워크> <투씨> <와이어트 어프>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5편이나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작품 어느 하나도 서로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찍어내는 이야기들은 매번 새로운 로이즈만식 해석을 거쳐 다른 장르, 다른 스타일을 표출해낸다. “로이즈만은 마치 빛과 어둠을 완벽하게 조율할 줄 아는 화가와 같다. 소리를 제거하고 영상만을 보더라도 그의 영화에서는 스토리와 감정을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이다.” <투씨> <하바나> 등을 통해 그와 함께 작업한 시드니 폴락이 보는 로이즈만이다.
올해 그는 국제촬영가예술협회인 ‘카메라이미지’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어릴 적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배우를 의식하지 못하던 때, 마치 영화 속 장면이 현실이기라도 한 듯 스크린에 푹 빠져들던 때를 회상하며, 그런 느낌을 되살리며 영화를 찍는다고 한다. 때로, 촬영이 예술이 아닌 기술로 폄하되기도 하는 이유도 이렇듯 잘 드러나지 않는 촬영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촬영감독으로 대성하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몸을 사리지 말고, 자신있게 도전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로이즈만처럼 타고난 감각과 본능이 없다면?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화정/ 자유기고가 zzaal@hanmail.net
Owen Roizman 필모그래피
<프렌치 키스>(French Kiss, 1995) 로렌스 캐스단 감독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 1994) 로렌스 캐스단 감독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1991) 로렌스 캐스단 감독
<아담스 패밀리>(The Addams Family, 1991) 배리 소넨필드 감독
<하바나>(Havana, 1990) 시드니 폴락 감독
<바람둥이 길들이기>(I Love You to Death, 1990) 로렌스 캐스단 감독
<청춘의 승부>(Vision Quest, 1985) 해롤드 베커 감독
<투씨>(Tootsie, 1982) 시드니 폴락 감독
<생도의 분노>(Taps, 1981) 해롤드 베커 감독
<선택>(Absence of Mailce, 1981) 시드니 폴락 감독
<고백>(True Confessions, 1981) 울루 그로스바드 감독
<블랙 마을>(The Black Marble, 1980) 해롤드 베커 감독
<일렉트릭 홀스맨>(The Electric Horseman, 1979) 시드니 폴락 감독
<페퍼의 론리 허트 클럽밴드>(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78) 마이클 스컬츠 감독
<출옥자>(Straight Time, 1978) 울루 그로스바드 감독
<인디펜던스>(Independence, 1976) 존 휴스턴 감독
<네트워크>(Network, 1976) 시드니 루멧 감독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2>(The Return of a Man Called Horse, 1976) 어빈 커시너 감독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 1975) 시드니 폴락 감독
<스탭포드 부인들>(The Stepford Wives, 1975) 브라이언 포베스 감독
<지하의 하이젝킹>(The Taking of Pelham One Two Three, 1974) 조셉 서전트 감독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
<과외 수업>(Heartbreak Kid, 1972) 일레인 메이 감독
<보기 나도 남자다>(Play It Again, Sam, 1972) 허버트 로스 감독
<똑바로 쏘지 못하는 갱>(The Gang That Couldn’t Shoot Straight, 1971) 제임스 골드스톤 감독
<프렌치 커넥션>(The French Connection, 1971)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
<스톱>(Stop, 1970) 빌 건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