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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그 길에서 만난 동물들을 애도하다
납작한 낱말 카드. 충분히 자주 쓰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들어본 양 심드렁해져버린 말들을 생각한다. 바르고 온당하지만 핼쑥해져버린 단어들. ‘인권’ 또는 ‘독립’이란 지붕 아래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떠올린다. 잘못 쓰고, 잘못 들었으므로, 오해하고 실망했던 말들. 그 수북한 단어장 위에 내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고유명사를 고유명사로만 아는 것.
200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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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이 후진 여자, 이 바보 같은 여자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만약 너의 자식이 나중에 “사람들이 그러는데 엄마는 걸레라던데 정말이야”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래서 아이가 굉장히 삐뚤어진다거나 하면 어떻게 할 거냐라고. 글쎄 걔 인생은 걔 인생이지라고 말하는 게 쿨한 말이겠지만 정작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냐 아냐 엄마는 걸레가 아니야, 라고 이야기할까 생각해봤지만 “사람들이
글: 김현진 │
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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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
어두운 골목, 서울의 주름 사이를 가쁘게 미끄러져가고 있는 한 사내를 떠올린다. 미진(서영희)이 선 우연의 문(門) 앞에서,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는 남자의 적당히 이완된 말씨를 그려본다. 그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이름을 자꾸 생각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글: 김애란 │
200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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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그래, 그녀보다 내가 더 겁쟁이일지도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캐서린 헤이글은 나이 들수록 어딘가 애슐리 저드를 닮아가는 것 같다, 뭐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본 영화였지만 <27번의 결혼 리허설>은 좋은 로맨틱코미디였다. 사랑에 빠진, 능력 있고 착하지만 외모가 조금 수수하고 주눅 든 30대 여성을 그릴 때 흔히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써먹는 과장
글: 김현진 │
200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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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서머랜드의 유정탑과 한국 방송사의 송출탑
옛날 영화를 보는 느낌이 났다. 혹은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랄까. 어릴 때, TV에서 틀어주던 외화, 그중에서도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 명화 같은 느낌이. 그때 본 영화들의 인상은 지금도 흐릿하다. 시간에 바래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의 때깔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주말의 명화’ 중 끝까지 본 영화는 별로 없다. 영화나 책을 보는 데도 얼마간
글: 김애란 │
200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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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주노의 슬픔을 보다
<주노>는 좋은 영화다. 좋은 연출, 좋은 각본, 좋은 배우들이 모여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작은 제작비를 써서 적은 수의 스크린에 걸었다가 점점 세를 넓혀나가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예쁘다, 귀엽다, 쿨하다, 정말 이럴 수가 없다 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이 영화를 더없이 사랑스럽고 어여쁘게 여기는데 나는 홀로
글: 김현진 │
200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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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내 속에 공명하던, 그 소리없는 소리
스노볼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절벽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유리구였다. 돔의 이름은 ‘종을 떠난 종소리’. 쥐고 흔들면 하얗게 흩날리는 눈꽃이 천천히 낙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그랗게 밀봉된 고요. 유리구 안에는 절도 없고 종도 없었지만 종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떠나온 소리였고, 그래서 울림의 시원(始原)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리
글: 김애란 │
2008-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