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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서머랜드의 유정탑과 한국 방송사의 송출탑
김애란(소설가) 2008-03-27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면서 어릴 적 TV에서 방영되던 ‘주말의 명화’를 떠올리다

옛날 영화를 보는 느낌이 났다. 혹은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랄까. 어릴 때, TV에서 틀어주던 외화, 그중에서도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 명화 같은 느낌이. 그때 본 영화들의 인상은 지금도 흐릿하다. 시간에 바래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의 때깔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주말의 명화’ 중 끝까지 본 영화는 별로 없다. 영화나 책을 보는 데도 얼마간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기도 했지만. 남한의 어린이로서 겪는 삶의 리얼리티와 <벤허>나 <콰이강의 다리> 속 리얼리티를 전혀 연결시키지 못했던 탓이다. 그때는 ‘명화’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며 왜 옛날 영화가 연상됐는지 모르겠다. 옛날 영화가 어땠기에. 뭔가 기억해보려 애써도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서머랜드’의 황무지처럼 햇빛에 하얗게 탈색된 장면들만 간간이 스쳐갈 뿐이었다. 환하고 아스라한 옛 필름들. 그래서였을까. ‘주말의 명화’를 추억하자니, 제대로 본 영화도 별로 없으면서 괜히 눈이 부셨다.

영화는 황야에서 시작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괭이를 든 사내(플레인뷰)가 노동하는 최초의 원숭이처럼 홀로 서 있다. 허허벌판은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기에 적당한 곳처럼 보인다. 100여년 전 북미의 어떤 곳들은 단지 그 위에 ‘아무것도 없다’란 사실만으로 신화적 공간이 되는 듯하다. 그 텅 빔이 영화 속 배경을 하나의 상징적인 무대처럼 만들어놓는다. 장마다 구체적인 연도가 일일이 표시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면면을 실감하다기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원형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문득, 이 영화의 예스러움은, 담담한 고전미는 바로 그 ‘원형’의 그림자에서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그리고 ‘불’과 ‘피’와 ‘땅’과 ‘형제’들. 화재 현장 한가운데서 검붉은 얼굴을 드러내며 서 있는 플레인뷰의 모습은 원초적이고 강렬하다. 그는 불을 든 아버지, 프로메테우스처럼 보이기도 하며, 성경 속 화마(火魔)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재밌는 점은, 인위적인 아메리카 일리아드라 할 수 있는 카우보이 신화를, 신화적 틀 안에서 다시 발가벗기고 있다는 거다. 플레이뷰는 석유 산업의 번영을 이룩하고, 그 과정에서 목사 엘라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갈등한다. 영화는 천천히, 석유 빛과 성직자의 옷 색깔이 왜 같은지, 인간을 혐오하는 마음과 가족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야기는 거래에서 시작해 거래로 끝난다. 막바지, 볼링장에서의 작고 우스꽝스런 폭력. 그리고 엔딩.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마치 모든 명화는 얼마간 폭력적이라는 듯이.

다시, 주말의 명화 생각을 한다. 80년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낙후된 땅 위로, 주말마다 수백만 개의 점을 가진 ‘명화’ 전파가 끊임없이 송출된 사실을 떠올리면 좀 서글프다. 그 영화들이 좋은 영화였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서머랜드 벌판에 우뚝 선 유정탑을 보며, 엉뚱하게 한국 방송사의 송출탑이 생각났다. 그리고 80년대도. 시대의 허위, 전파의 외로움.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메시지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거래’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명화를 보며 감동받고 사색한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몇십년 뒤,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신세기 주말의 명화’를 통해 재방영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밤 중 거실에 앉아 귤을 까먹다,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단어를 ‘피’라 생각하는 감독과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혹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미 예전에 본 영화라도, 그래서 좀 심드렁하더라도, 나는 플레인뷰나 엘라이의 얼굴을 조금 더 유의 깊게 살펴볼 마음이 있다. 1989년 한 사내의 괭이질이 지금까지 내 삶에 관여함을 놀라면서. 나는 왜 성직자보다 사업가에게 더 마음이 기우는가 궁리하면서. 그런데 이 영화엔 왜 흑인이 한명도 안 보였을까, 하나의 종(種)에 대한 얘기라서 그런 걸까 갸웃거리면서. 심야의 고독 속에서, TV 앞에 쪼그려 앉은 내 실루엣은 불타는 유정탑의 먹구름과 함께 일렁일 것이다. 혹 그때 내 뒷모습이 너무 작아 보인다면, 그건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이 아닌, 플레인뷰가 일군 세계의 덩치가 너무 거대해져버린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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