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냉정과 열정 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그 길에서 만난 동물들을 애도하다
2008-04-25

로드 킬이라는 명사에 깊이와 두께를 부여한 다큐멘터리 <어느 날 그 길에서>

납작한 낱말 카드. 충분히 자주 쓰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들어본 양 심드렁해져버린 말들을 생각한다. 바르고 온당하지만 핼쑥해져버린 단어들. ‘인권’ 또는 ‘독립’이란 지붕 아래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떠올린다. 잘못 쓰고, 잘못 들었으므로, 오해하고 실망했던 말들. 그 수북한 단어장 위에 내가 서 있는 모습을 본다. 고유명사를 고유명사로만 아는 것. 추상명사를 추상명사로만 아는 것. 생명을 생명이라 읽고, 권리를 권리라고 읽는 것. 그러고 마는 것. 그런데도 얼마간 그것에 대해 늘 안다고 생각해온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무언가를 알고 이해한다는 건 결코 추상적인 행위가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걱정할 때, 추상적으로 좋아하고 추상적으로 걱정하는 게 아닌 것처럼. 원망하고 미워할 때조차 그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그 길에서>를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 단어는 그 단어가 아니었다고. 상식과 사실은 다르다고. 많은 독립영화들의 가치는 오히려 그 편평해진 말들을 두텁게 하고, 그 말이 지시하는 존재의 울퉁불퉁함과 깊이를 보여주는 데 있을 거라고. 영화 속, ‘팔팔이’의 죽음이 안타깝게 느껴진 이유도 그와 같았다. 그가 ‘보호해야 할’ 당위를 가진 ‘야생동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독자적인 생명체이자 ‘내가 아는’ ‘팔팔이’였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죽음과 내가 아는 존재의 죽음은 다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 막연함 사이에 다리를 놓고, 나와 연결시킬 수 있는 힘.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줄 아는 능력. 상상력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그들을 단어가 아니라 존재로 보여준다. ‘로드 킬’이라는 납작한 낱말 카드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구기며 주름과 부피를 만들어낸다. 삵을 삵으로만 아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어미이자 새끼이자, 개개의 습성과 사연을 가진 소우주로 보는 것. 쉬워 보이지만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일 중 하나. 그러니까 보통명사를 보통명사로 읽지 않는 것. 동물을 동물이라 읽고 보호를 보호라고 읽지 않는 것.

자동차 불빛이 아른대는 도로 위, 밀항자처럼 바싹 엎드린 자라를 본다. 대형트럭이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털을 세운 산토끼를 본다. 처음 그들을 보고 놀란 이유는 ‘한국에 저렇게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멸종위기동물 탐사기를 쓴 더글러스 애덤스는 ‘도쿄를 거꾸로 들어 흔들면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모두 놀라게 될 거’라 장담하던데. 로드 킬 조사팀이 일일이 주워 담은 동물들의 사체를 보니 과연 그렇겠구나 싶었다. 그들이 살아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해, 그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존재 때문에, 그 다양한 아름다움에 먼저 놀랐다. 첫 번째 단어장이 어그러지는 순간. 감독의 독백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보고 싶은 새를 길에서 다 봤다. 다음으로 놀란 건 동물들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들이 단순히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에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해버린 탓이었다. 오랫동안 진짜 주검과 대면한 적이 없어서였다. 죽음을 구경한 적은 많아도 응시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뜬눈으로 죽은 동물들의 얼굴이 너무 느닷없고 순해서, 그것만으로도 뭔가 잘못됐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황천길이며 나날이 위태로운 삶. 상영 시간 내내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스팔트에 널린 사체를 바라보고 있자니, 별안간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란 말이 연상되고, 이제는 김홍도 그림에서밖에 볼 수 없는 잘생긴 조선 범이 생각나고, 교통사고로 죽은 몽골 소녀 ‘푸지에’가 떠올랐다. 그리고 ‘미래를 미래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고 말한 시인의 글도. 이문재 선생은 최근 경제논리의 폭력성에 대해 쓴 산문에서 말했다. ‘우리는 현재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미래를 퍼담았다’고. ‘미래가 미래로 돌아가야 현재가 돌아오고 과거가 찾아온다’고. 그리고 덧붙이시길. ‘현재가 두터워져야 하는 이유는, 지금이 길어지고 여기가 넓어져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만 타자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주체가 주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미래로 돌려보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말뜻을 살피며, ‘미래’를 향해 사정없이 트인, 어느 날 바로 그 길에서 만난 동물들을 애도하며, 내 가난한 단어장을 만진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