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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전영객잔] 인생처럼, 영화를 살아내다
홍상수의 영화를 매끈한 틀 안에서 설명하기란 늘 어려운 일이었지만, <옥희의 영화>는 정말 그렇다. 알려진 대로 네편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각편은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은 배우들이 계속 나오지만, 이들이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다(<씨네21> 770호에 실린 정한석의 글과 김혜리의 인터뷰 참고).
글: 남다은 │
201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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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전영객잔] 참극의 주범은 입 다문 방관자들이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은 원시적이고 비균질적인 매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이는 기이한 분위기가 감도는 섬에서 펼쳐지는 처절한 복수담이라는 영화의 내용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김복남>의 기이한 매력은 거칠고 투박한 촬영과 편집, 갑작스럽게 비약하며 전진하는 내러티브 등, (일정 정도 감독이
글: 안시환 │
201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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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전영객잔] 그 섬, 터부가 들끓는 용광로로구나
바야흐로 몸서리처지는 원한의 스펙터클이 스크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갈망하는 괴물들의 재림이라고나 할까? 영화가 관객에게 안락한 관람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이같은 방식으로 드러낼 때, 그러한 이야기를 꾸며내는 감독의 의도는 이야기의 표면에 안주하기보다 그 불편한 표현 속에서 창조적인 의미를 찾아달라는 주문으로 받아들여진다. &l
글: 장병원 │
201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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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전영객잔] 스펙터클이 영화를 눈멀게 했네
<악마를 보았다>는 인과율적으로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광기와 복수의 잔혹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스펙터클화하는 영화다. 관객은 맹목적인 광기(또는 복수)의 몸짓과 그로 인해 갈기갈기 찢긴 신체의 향연을 본다. 이러한 영화를 대할 때, 관객은 크게 두 가지 갈림길에 놓이는 듯하다. 하나는 과잉된 폭력의 이미지 자체를 페티시즘적으로 즐기는 것이다
글: 안시환 │
201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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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전영객잔] 꿈같은 각성, 그 영화적 쾌락
짐 자무시의 <리미츠 오브 컨트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분석을 읽는 것보다 그 세계를 여러 번 경험하는 쪽을 택하는 게 맞다. 통제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영화를 어쨌든 틀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 비평은 필연적으로 영화를 충분히 끌어안지 못할 것이다. 명상 앞에서 떠드는 말은 그저 소음일 뿐이다. 하지만 비평의 사랑스러운 어리석음이 있다면,
글: 남다은 │
201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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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전영객잔] 타성과 싸워 이겨
몇주 전 자기 복제의 나르시시즘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 장르영화의 한계를 성토하는 견해를 제출한 입장에서, <아저씨>의 출현은 반갑다. 제목이 풍기는 투박함과 달리 이 영화는 장르의 관성을 자기 동력으로 삼아 발전하는 이야기다. 장르영화로서 <아저씨>의 가치는 종래의 장르 관습에 편승하고 때로는 대결하는 변용에서 찾아진다. 누차 얘기되
글: 장병원 │
201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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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전영객잔] 승자의 패배
(내가 이후 <이끼>라고 부르는 작품은 모두 강우석의 <이끼>이다). <이끼>를 보며 가장 의아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던 것은 역시 그 엔딩이었다. 이는 그 반전이 원작을 훼손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 내적’으로 어떤 배신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훌륭한 반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도 미처 발견하
글: 안시환 │
2010-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