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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이후 4년 만이다. 여윈 얼굴로 미국에서 돌아온 박찬욱 감독이 가방을 열자, 내성적인 소녀의 성장영화가 또르르 굴러나왔다. <스토커>의 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는 드라큘라를 창조한 브람 스토커와 같은 성(姓)을 가졌으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임수정)처럼 유별난 소녀다. 아니, 적어도 스스로 그렇다고 믿는다. 남보다 멀리 보고 작은 소리까지 듣는 인디아의 비범한 감각은 그녀에게 소외감과 우월감의 원천이다. 고립이 왕관이 되는 희귀한 시절. 바야흐로 청춘이다. 그리고 어느새 경계선을 넘어야 하는 시각, 열여덟살 생일이 도래한다. 소녀는 어떤 격렬한 경험을 기다린다.
통과의례는 철퇴처럼 닥친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웠던 아빠(더모트 멀로니)가 여행 중 사고를 당해 시신으로 돌아오고, 장례식 날 여태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찰리 삼촌(매튜 구드)이 현관을 두드린다. 넓은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 돌아온 잘생기고 신비로운 남자. 그는 정
누구의 딸도 아닌 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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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첫 영화를 만든 두 감독 박찬욱의 <스토커>와 김지운의 <라스트 스탠드>가 나란히 국내 관객을 만난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가진 뒤 로테르담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스토커>는 남편을 잃은 아내(니콜 키드먼)와 딸(미아 바시코프스카)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삼촌(매튜 구드) 사이에서 펼쳐지는 박찬욱 특유의 매혹적인 스릴러이며,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10위로 시작한 <라스트 스탠드>는 노쇠한 보안관(아놀드 슈워제네거)이 마을 사람들과 합심하여 국경을 넘으려는 범죄조직 일당과 한판 대결을 벌이는 B급 취향의 매력적인 서부극이다. 자기 색깔을 근사하게 지켜내며 새로운 환경의 장점들을 이식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흥미롭다. 이미 두 사람은 촬영 도중과 이후, 그렇게 <씨네21>과 두번의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영화 공개 이후 다시 그들을 만나 새로운 궁금증들을 물었다. 개봉에 맞춰 두 영화의 주인공인 아놀드 슈
할리우드로부터의 귀환 자신의 색깔을 지켜낸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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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잊혀진 꿈의 동굴>이 흥미로웠던 건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이 다국적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곳 중 하나가 <히스토리 채널>이라는 점.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이라도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달리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외계인, 고대문명, 좀비, 비밀무기, 음모론 같은 ‘오덕’ 냄새가 나는 소재를 다룬다(독일제 무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2차대전 다큐멘터리 때문에 ‘히틀러 채널’이란 오명을 얻기도 했다). 덕분에 <잊혀진 꿈의 동굴>은 교육적인 다큐멘터리보다는 SF블록버스터에 등장하는 자료화면 같은 인상을 남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음악도 흥미로운데,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오랜 파트너인 네덜란드의 첼리스트 에른스트 라이즈제거의 스코어가 그 상상력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 무조곡으로 채운 이 스코어는 첼로 고유의 소리뿐 아니라 심장박동, 관악기의 원형적인 소음과 중창단의 코러스, 전자적 노이즈, 틈틈이 적용된 리버브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수만년 전부터 흘러온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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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잡지사 선배가 SBS 드라마 <토마토>의 구두 디자인 대결에 관해 격분하는 걸 듣고 ‘오오, 그렇구나’ 뒤늦게 깨친 일이 있다. 첼리스트의 무대용 구두를 두 회사가 각각 제작한 뒤 어느 쪽 구두가 선택받는지 가리는 미션에서 악녀 세라(김지영)는 진짜 루비가 달린 샌들 형식의 구두를, 주인공 한이(김희선)는 평범한 검은색 통굽 구두를 제작한다. 처음엔 세라의 것을 골랐던 첼리스트는 신어보니 편하다는 이유로 일본 무대에선 통굽 구두를 신겠다고 통보한다. 이를 두고 선배는 여성이 구두에 두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라고 혹평했었다. 더불어 창의적인 직업인에 대한 묘사가 부실한 드라마까지도.
KBS 드라마 <광고천재 이태백>을 보다가 선배의 말이 떠올라 <토마토>를 ‘다시 보기’했더니 과연! 문제의 구두는 무대의상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검정색 효도신발처럼 생겼더라. 화려함과 고급을 추구하는 악녀가 착한 주인공에게 허를 찔리는 반전
[유선주의 TVIEW] 자, 이제 창조적인 작업물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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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까까머리 시절 300원짜리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35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아브락사스’라는 말이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내 머릿속에서 ‘아브락사스’라는 말은 아직도 알이라는 세계를 깨고 나오려는 새의 영웅적 고투와 결합되어 있다.
며칠 전 바타유의 <기저유물론과 영지주의>를 읽다가 다시 이 낱말과 마주쳤다. 그 에세이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돌의 모습을 담은 네장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는데, 글의 말미에 그는 도판들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 글에 수록된 돌들은 영지주의의 돌(gnostic stone), 바실리데스의 돌, 혹은 아브락사스라는 전통적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들의 정체와 명칭은 영지주의 철학자 바실리데스의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새로운 유물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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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하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미쳐버릴 지경이다. 뼈마디가 휘어지도록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다면 후련해질까? 책상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햇반과 컵라면과 커피잔과 텀블러들이 나뒹군다. 노트북을 열고 시나리오를 펴놓은 지 10시간이 넘어가도록 커서의 위치는 여전히 제자리다. 아니 저 자리라면 벌써 일주일은 된 것 아닌가? 젖먹던 힘까지 다 끄집어내고, 전 존재를 기울여 타이핑을 해본다. 신부는 형사를 부축해 일어선다. 신부는 형사를 부축해 일어선다. 신부는 형사를 부축해 일어선다. 똑같은 문장을 수십번씩 친다. <샤이닝>의 잭 니콜슨도 아니고… 이러고 앉아 있다.
화면 위의 글자들이 명왕성에서 온 외계어처럼 보인다. 글자들이 난수표처럼 노트북 화면 아래로 뚝뚝 떨어져내린다. 머리를 쥐어뜯고 화장실로 가 찬물을 뒤집어쓴다. 거울에 비친 무능하고 덥수룩한 한 마리의 루저를 온갖 혐오와 비난을 담아 쏘아본다. 넌 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기고 형편없는
[SO WHAT] 제발 좀 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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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다뤄졌지만 두 영화가 계속 머리에 남았다. <레미제라블>과 <라이프 오브 파이>는 각기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영화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요청한다는 점에서 재론을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혁명가가 울려 퍼지고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광장 중앙의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시민군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바리케이드의 정상에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모두 돌아와 있다. 경찰에 사살된 젊은 혁명가들, 슬픈 사랑을 품고 눈을 감은 여인, 외롭고 고단한 생과 마침내 작별한 장발장, 그리고 혁명의 새벽을 지켜주지 못한 시민들까지. (그들이 부르지 않는) 장엄한 노래가 광장을 가득 채운다. ‘들리는가, 민중의 소리가….’ 그들은 모두 듣고 있다는 듯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에토스의 분열에도 <레미제라블>에 사로잡히다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이고도 당혹스럽다. 이 장면은 분명히 판타지다. 죽은 자와 부재자의 귀환이라는
[신 전영객잔] 어쩌면,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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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묻고 조진웅이 답하다
-그동안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배역을 많이 맡았는데, 부드럽고 젠틀한 역할을 맡고 싶은 의향은 없나._Hanna Lee(페이스북)
=어떤 역할이 올지 미리 알고 그에 대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배역을 맡았을 때, 그 당시 배우가갖고 있는 내적인 것들에 기반해 마음이 쏠리는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마음 가는 재밌는 배역이 있으면 하게 되더라.
독자가 묻고 곽도원이 답하다
-이제까지 본격적인 코믹 연기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코미디영화에 욕심이 있나. _angelyeeun13(미투데이)
=코미디에 대한 무한한 욕심이 있다. 개그맨들을 정말 존경하는데, 그분들은 자신을 낮추고 세상 사람들이 웃는 얼굴을 보며 행복해한다. 나는 그게 배우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인 것 같다.
독자가 묻고 문소리가 답하다
-조진웅, 곽도원, 김태훈, 이제훈씨 중 멜로 연기를 한다면 누구와 가장 잘 맞을 것 같나. _유미성(페이스북)
[분노의 윤리학] 배우 그리고 친구 사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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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잘하세요.” <친절한 금자씨>의 이 대사는 <분노의 윤리학>의 다섯 등장인물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살인자 주제에, 스토커 주제에, 바람 핀 주제에, 남들 등쳐먹는 주제에, 자기 잘못은 생각 안 하고 남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들을 ‘다 같은 나쁜 놈’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건 전적으로 배우들의 몫이었다. <분노의 윤리학>은 베테랑 배우 문소리, 곽도원, 조진웅, 김태훈과 청춘스타 이제훈이 선보이는 5인5색 ‘악인 캐릭터의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영화다. 장면마다 배틀을 벌이듯 서로 충돌하고 엉켜들며 캐릭터의 색깔을 사수하던 네 배우를 한자리에 불러모았다(군 복무 중인 이제훈은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다). 아등바등 싸우던 영화 속 모습과 달리 “인간적으로 너무 친한” 네 배우들의 수다는 두 시간이 훌쩍 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네 사람 모두 같은 소속사지만, 평소에도 개인적 친분이 있다고
[분노의 윤리학] 배우 그리고 친구 사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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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3월, 내가 가장 기대하는 영화는 제주 4.3 항쟁을 다룬 오멸 감독의 <지슬>이다. 한 사회 공동체에는 가능한 많이, 더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이 되어야 하는 사건들이 있다. 극단적 폭력성이 악랄한 사건일수록 다양한 예술작업이 후속되어야 한다. 예술은 ‘사건’의 가장 후미진 경계까지를 보듬으며 인간의 치유에 관여하는 숙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 항쟁’, 가장 가깝게는 ‘용산참사’ 같은 ‘사건’들은 그러므로 더 충분히 더 적극적으로 예술이 되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착각)하는 사건들에 대한 충분한 공유와 다양한 공감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과거의 사건은 너무도 흔히 현재의 사건으로 폭력적 재발을 감행하므로 더더욱 그러하다.
지슬. 제주 방언으로 ‘감자’라는 뜻의 이 영화가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했다. 제주는 4.3의 트라우마가 현재형인 곳이다. <지슬>의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지슬>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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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통해 ‘인품으로나 능력으로나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며 우스개를 하던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는 탈락했다. 대신 명필름 이은 대표가 지난 1월30일 열린 총회를 통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의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됐다. 전임 차승재 대표가 3번 연임했으니 6년 만의 새 얼굴이다. 올해는 연초부터 <7번방의 선물>이 700만명을 넘기면서 지난해 극장 관객 1억만명 시대의 활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이른바 영화계 활황의 시점이다. 제협이 이 시점에서 영화인들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 풀어나가야 할 시급한 문제는 무엇일까. 회장직의 바통을 막 이어받은 이은 대표를 만나 각오를 들었다.
-제협 회장으로 선출된 걸 축하한다.
=축하를 받아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웃음) 영화계에서는 이런 성질의 일을 두고 ‘공익근무’라고 한다. 각자 프로젝트나 할 일이 산더미인데 동료를 위해, 업계를 위해 대신 나서주니 공익근무란 말이 생긴 거다. 차승재 대표가 6년 동안 회장직
[이은] “이제 영화산업 총량의 발전을 생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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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가 헤드폰 시장은 ‘들리는’ 건 기본이고 ‘보이는’ 것에도 많은 신경을 쓴다. 외부에 노출해야 하는 제품이다 보니 패션 액세서리로서의 기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패션 헤드폰으로 입지를 굳힌 소울 바이 루다크리스나 닥터 드레 등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다 보니 기존의 헤드폰 제조 업체들도 보이는 부분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다.
유럽 헤드폰 시장점유율 1위인 젠하이저가 발매한 모멘텀 블랙 역시 ‘보이는 헤드폰’을 지향하려는 작은 시도다. 검은색 가죽의 깔끔한 디자인과 함께 레드 스티칭으로 독특한 매력을 선보인다. 세련됨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오버하지는 않는 것이 이 제품의 매력이다. 헤드폰의 기능성을 우선시해온 젠하이저의 고집이자, 너무 튀는 건 싫은 보수적인 소비자층에 어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가격은 50만9천원. 2년간 국제보증기간이 제공된다.
[gadget] 보이는 헤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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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158.6×83.2×9.9mm
무게
210g
특징
1. 현존 최대. 5.9인치 풀 HD IPS 디스플레이.
2. 1300만 화소의 카메라. 적절한 해상도.
3. 반원 모양의 둥근 외곽. 그립감이 아주 좋다.
4. 잠금해제와 스크롤이 가능한 후면 터치 패드. 크기의 불편함을 해소해준다.
5. 번들 이어폰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훌륭한 이어폰.
6. 화면 이동 없이 한번에 사용하는 화면분할 UI.
아이폰이 처음 세상에 등장할 즈음, 누군가가 말했었다. 이제 휴대폰 하나로 모든 걸 다 하게 되는 시대가 왔다고. 스마트폰 하나로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검색도 하게 될 거라고. 말하자면 스마트폰이 일상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왔다고.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스마트폰은 과장을 조금 보태면 화장실에서 휴지로 밑을 닦을 때만 내려놓는 무언가가 된 지 오래다. PC의 페이지뷰보다 모바일 페이지뷰가 10배가량 많다니 그 파괴력은 어마어마하다.
얼마 전 팬택의 베가
[gadget] 식스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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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관련되었다고 믿고 싶은 것들이 사실 그 무엇보다 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취향이 그럴 텐데, 마치 타고난 어떤 것인 양 포장되곤 하지만 돈이 가져다주는 ‘구매 가능함’의 너른 정도가 경험의 폭을 결정짓고, 결국 취향이라는 모호한 무엇을 형성한다. <디자인의 탄생>은 18세기 중엽부터 현재까지 주요한 디자인의 특징들을 순례한다. 당연히 도판 자료가 풍부하고, 글과 이미지는 서로 호응하며 시간을 다음 페이지로 밀어낸다. 그리고 디자인이 탄생하고 변신하고 진화하는 매 순간, 자본과 생산성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대중의 취향에 관여하는지를 꼼꼼하게 드러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편집장 미란다 프라이슬리가 패션을 무시하는 앤디 삭스에게 패션에 대해 일침을 가하던 장면을 기억하는지. 이 책은 그 한마디를 지적으로 다시 경험하게 만든다.
이 책이 디자인이라고 통칭하는 세계가 워낙 드넓다보니, 영화 세트 디자인도 도마에 오른다. 독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물건의 사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