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법에 대한 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지 뭐라도 하는 건지 혼란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은 책이니까 그 정도는 봐주고 넘어가자. 책의 제2장 “단순한 세계의 유령들”은 디지털 디톡스 휴가에서 시작해, 사회를 떠나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세운 사람들의 역사를 되짚는다.
제일 먼저 나오는 건 에피쿠로스학파다. 쾌락주의라는 말 때문에 오해받곤 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사실 쾌락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오히려 절제와 평온을 중시하는 철학이다. 그들은 아테네 변두리에 세운 정원 학교에서 자급자족하며 소박하게 살았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닌데 새삼 다시 호기심이 갔다. 특히 그들이 공동체를 정원이라고 불렀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어디 한번 검색해볼까… 에피쿠로스 정원으로 검색하니 수많은 결과가 떴다. 오랜만에 이름을 듣는 아나톨 프랑스의 산
[정지돈의 구름과 멀티태스킹하기] 검색의 저주
-
<키메라>는 필름으로 촬영됐다. 영화용 디지털카메라는 최근 6K를 넘어서 12K의 사양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디지털 시대에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왜 필름으로 영화를 만든 것일까.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눈길을 끈 것은 영화 프레임의 테두리였다. 이를 인지한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영화 보기를 체험하게 된다. <키메라>는 프레임 테두리 위에 앉은 먼지의 움직임을 봐야 하는 영화다. 이 먼지는 필름 게이트에 앉은 먼지들의 그림자가 필름 위에 남긴 흔적들이다. 촬영 당시 그 공간과 시간 안에 있었던, 눈으로 보이는 가장 작은 존재의 흔적들이다.
영화의 프레임 테두리를 중점으로 보면 재미난 것들이 많이 보인다. 카메라의 움직임, 배우들의 동선, 인물들의 배치, 컷과 컷 사이 간격, 몽타주의 방향성, 프레임 안 여백의 감흥, 주인공의 감정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는 사물들의 감정, 외화면의 이미지와 사운드, 디지털 상영에서 보편화된 블랙 마스킹 위의 이미
[박홍열의 촬영 미학: 물질로 영화 읽기] <키메라>, 카메라의 고고학, 필름 게이트와 화면비로 보는 존재의 기록
-
2007년부터 2024년까지 배우 안소희의 궤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원더걸스로 데뷔해 단 한줄의 가사로 자신의 끼를 온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이후 이재용, 김종관, 연상호, 윤가은 감독의 러브콜을 받으며 스크린이 미더워하는 배우로 안착했다. 최근 대학로 연극무대 데뷔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탄탄대로와 우여곡절을 모두 통과한 30대 배우 안소희는 지금 <대치동 스캔들>의 주연배우로 관객을 만날 준비 중이다. 영화 속 안소희가 분한 윤임은 대치동 중학생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는 국어과 일타강사다. 그는 대학 시절 소설가를 꿈꿨지만 절친했던 학과 동기 기행(박상남)과 나은(조은유)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 꿈을 접고 고독한 학원강사로 살아간다.
윤임은 자신이 담당하는 학교의 국어과 교사가 된 기행과 10년 만에 재회해 두 차례 문제 유출 스캔들에 휘말리지만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제 앞길을 홀로 돌파하려는 영화 속 윤임과 달리, 안소희가 인터뷰 중 가장 많
[커버] 수많은 도움으로 만든 낯선 사람, <대치동 스캔들> 안소희
-
송경원 지음 / 바다출판사 펴냄
글을 읽다보면 필자의 태도가 감지되는 경우가 있다. 주어진 분량 안에서 자기 논지를 명확히 써내리는 데에 집중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독자에게 말을 걸 듯 글을 풀어가는 이도 있다. 좋고 나쁨의 문제라기보다 화법의 특성과 관련된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종종 책 너머의 필자에게 대화를 걸고 싶게 만든다. 이미 완결된 글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송경원 <씨네21> 편집장의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 역시 그런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송경원 편집장은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평론가로 등단한 뒤 2012년 <씨네21>에 취재기자로 입사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 평론집엔 “15년간 영화와 대화를 나눈 한명의 필자가, 영화의 어떤 부분에 반응해왔는지 되돌아본 고백의 궤적”이 담겨 있다. 분석 저변엔 “자신을 감동시킨 영화에 최대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고, 이를 확인하
씨네21 추천도서 -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
-
-
최지은 지음 / 창비 펴냄
푸른 하늘 위로 흩날리듯 반짝이는 초록 잎사귀들. 표지를 들여다볼 때마다 창문 너머로 초여름 한낮의 풍경을 내다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나면 책장 넘기는 일이 한결 산뜻해졌다. 하지만 <우리의 여름에게>에서 최지은 시인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그리 가볍지 않다. 10살이 채 되기 전부터 어머니, 할머니, 아버지의 부재를 차례로 겪으며 느낀 깊은 상실감, 외로움. 시인의 가난과 결핍을 곱게 바라보지 않던 주변 어른들이 남긴 상처에 관한 내밀한 고백들이 책에 빼곡하게 담겼다. 어른이 되어서야 마주한 마음속 어린이의 말에 최지은 시인이 기꺼이 귀를 기울이며 유년의 경험을 복기한 결과다.
최지은 시인은 2017년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첫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를 발표한 뒤 3년 만에 첫 산문집 <우리의 여름에게>를 내놓았다. 산문집에서 시인은 가족과
씨네21 추천도서 - <우리의 여름에게>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펴냄
무라카미 하루키의 집에 초대받아 스피커 앞 소파에 앉아, “보세요, 우리 집에 이런 레코드도 있답니다” 하며 보여주는 재킷을 구경하고 음악을 듣는 기분으로 읽는 책.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은 이 책에 실린 음반들에 대해 “개인적인 ‘호불호 보고서’”라고 적었는데, 기꺼이 파고들고 싶은 타인의 취향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나 싶다. 최근 조성진, 임윤찬의 활약으로 한국에서도 고전음악 팬층이 넓어지는 이때 가까이 두고 읽고 듣기 좋은 책이다.
하나의 곡에 여러 개의 해석을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구성으로, 각 음반에 대한 설명이 길지 않아 다소간의 아쉬움은 있으나 그렇게 얻게 되는 넓은 시야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원한 구성의 묘가 아닌가 싶다. 필연적으로 이 책을 읽기 위해 음악을 찾아 듣게 되는데, 책에서 다루는 음반을 정확하게 찾아내기 어려울 때도 많다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단정하게 해당 곡을 설명하고 각
씨네21 추천도서 -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2>
-
서장원, 예소연,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트랜스젠더인 토미는 성별정정을 위한 인우보증서를 필요로 한다. 그가 떠올린 사람은 오스틴. IT스타트업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오스틴은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를 그만두면서 외모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사지연장술을 받은 참이다. 그에게 인우보증서를 받을 수 있을까?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는 트랜스 남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삶의 조건과 그 조건이 요구하는 것들 사이에서 갈등하는 토미를 주인공으로 한다. 외모와 관련된 콤플렉스를 다루는 이야기가 주로 여성의 사정을 다루어왔다면 <리틀 프라이드>는 트랜스 남성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한다. 이 소설에는 보여지는 이를 타자화하지 않는 스트립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자신의 몸을 긍정한다는 일이 갖는 복잡한 함의를 생각하게 한다. 서장원은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누구도 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데, 오로지 다정함만으로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씨네21 추천도서 - <소설 보다: 여름 2024>
-
필립 로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비채 펴냄
한국에서는 필립 로스라고 하면 말년에 쓴 <에브리맨>이 잘 알려져 있다. <에브리맨>이 인생 전체를 돌아보는 통찰력에 방점이 찍힌 소설이라면 그의 1971년작 <우리 패거리>는 마치 기관총을 쏘듯 (미국) 정치와 사회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마흔 즈음의 젊은 필립 로스를 만날 수 있는 정치 풍자 소설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미국 대통령 트리키다. ‘사기꾼’으로 해석 가능한 ‘트리키’(Tricky)라는 이름(정확히는 트릭 E. 딕슨이다)을 대통령에게 지어준 데 더해,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실제 연설 내용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우리 패거리>는 닉슨 행정부를 향한 조롱과 독설을 유머로 다루는 소설이다. 뿐만 아니라 트리키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것으로 다루는 기자들 역시 이 희화화에서 빠지지 않는다. 누가, 혹은 무엇이 정치를 코미디로 만드는가? 정치인들이 그렇게 한다.
씨네21 추천도서 - <우리 패거리>
-
우리 패거리 - 필립 로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비채 펴냄
소설 보다: 여름 2024 - 서장원, 예소연,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2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우리의 여름에게 - 최지은 지음 / 창비 펴냄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 - 송경원 지음 / 바다출판사 펴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6월의 책
-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이노센트>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특정 신에선 분명 악한 행동인 걸 알면서도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아역배우들에게서 그런 연기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건 감독의 역량일 것이다. 영화를 본 뒤 메모장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적었다. 촬영 중인 작품이 있어 고민이 많았는데 저 배우들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생각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O.S.T
영화 사운드트랙을 많이 듣는다.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을 때 충전되는 느낌이라 <버닝> O.S.T도 자주 들었고 연기 준비할 때에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O.S.T를 자주 들었다. <세기말의 사랑>을 연기할 당시에도 그랬다. 그 노래들을 들으면 내가 내 꿈을 눈앞에서
[LIST] 노재원이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
애콜라이트
디즈니+ | 8부작 / 감독 레슬리 헤들랜드 / 출연 어맨들라 스텐버그, 이정재, 매니 저신토, 다프네 킨 / 공개 6월5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인기 프랜차이즈에 수사물 한 스푼, 가볍고 새로운 맛
<스타워즈> 시리즈의 팬들에게 반가울 소식이다. 배우 이정재의 출연으로 한국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디즈니+ <애콜라이트>가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애콜라이트>는 <스타워즈>의 메인 시리즈인 ‘스카이워커 사가’에서 벗어나는 첫 시리즈물이다. 은하제국이 수립되기 100년 전, 평화를 수호하는 제다이 기사단은 오랜 기간 황금기라 불릴 만한 평화의 시기를 누려왔다. 한편 어둠의 세력은 조용히 포스를 사용하는 법을 익혀왔으며 제다이 마스터 인다라(캐리앤 모스) 살해를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인다라 살해의 용의자로 오샤(어맨들라 스텐버그)를 지목한다. 그러나 곧 진짜 범인은 오래전 죽은
[OTT 리뷰] ‘애콜라이트’ ‘고질라 마이너스 원’ ‘하이라키’
-
미국으로 떠났던 재벌 3세 송도영(전도연)이 딸 강해나(이지혜)와 함께 귀국해 집으로 향한다. 도영의 집은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으로 16살 생일에 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이다. 가족과의 반가운 해후도 잠시, 대를 이어 세습된 송씨 가문의 기업은 무능한 오빠 송재영(손상규)의 경영 실책으로 파산 위기에 처한다. 송씨 가문의 운전기사로 복무했던 아버지를 둔 사업가 황두식(박해수)은 도산을 막을 방법으로 벚꽃 동산의 재개발을 제안한다. <사이먼 스톤 연출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동산>을 대극장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공연의 제목에 유명 연출가의 이름을 명기한 것은 괜한 공치사가 아니다. <사이먼 스톤 연출 ‘벚꽃동산’>은 작품의 연출이자 각색 작가인 사이먼 스톤의 필치가 고전을 통제해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가가 시대와 배경 설정을 자유로이 바꿀 수 있는 연출가 중심의 무대.-편집자)로 재창조한 사례다. 19세기 말
[CULTURE 스테이지] 사이먼 스톤 연출 ‘벚꽃동산’
-
“부자 남편 만나 팔자 펴라. 어차피 네 힘으로 인생 성공 못한다”는 황당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유언뿐 아니라 계모와 언니들과 (계모 뱃속의) 동생, 그리고 빚도 함께 남겼다. 생존을 고민하던 신재림(표예진)은 유언대로 상류층 사교 클럽인 ‘청담헤븐’에 입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담헤븐 대표이자 “MZ세대 재벌 8세” 문차민(이준영)과 엮이게 된다. 티빙 드라마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의 주된 설정만 보면 이 무슨 구시대적 발상인가 싶다. 하지만 드라마는 고전 동화 <신데렐라>와 ‘K드라마’가 무수하게 반복한 클리셰를 ‘대놓고’ 비틀며 의외의 웃음을 유발한다. 발랄하고 전복적인 ‘B급’ 유머만 있는 게 아니다.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아닌 “흙투성이 흙수저”로 ‘재림’한 주인공을 통해 요즘 청년의 현실과 가치관을 영리하게 반영한다.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가 소환한 요즘 청년은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 한복판에서 자조하
[오수경의 TVIEW]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
-
<씨네21>과 <CITYBOY_LOG>가 다시 뭉쳤다.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 도쿄에서의 만남 이후 약 반년 만의 재회다. <CITYBOY_LOG>는 VOL.3에 돌입하며 약간의 변화를 꾀했다. 알콩달콩 연애 중인 이재준과 이지한 커플의 이야기 위로 새로운 도시 소년들이 등장한 것이다. 재준의 연습생 동기 임정규는 모두에게 자상한 남자다. <CITYBOY_TRIP>을 촬영하러 온 FD 황윤제는 지한의 눈총 속에 첫눈에 꽂힌 재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지한처럼 모델 출신 배우인 이동섭은 지한에게 마음이 가지만 재준과 지한의 사이를 알고 속앓이를 한다. 얽히고설킨 다섯 남자는 VOL.3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함께 화보를 찍는다. 서로를 견제하며 상대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으려는 다섯 남자들은 이후 어떤 관계로 나아갈까. 이들의 엇갈린 사랑의 작대기 속으로 <씨네21>이 들어보았다.
스튜디오에서 프로필 촬영 중인 뉴
[씨네스코프] VOL.3 마지막 에피소드 촬영 현장기, 사랑은 이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