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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은 점에서 멈추지 않고 시차를 둔 채 선으로 이어져, 결국 면의 형태까지 퍼져 나간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처음 본 후 떨리는 손으로 메모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간혹 굳이 언어로 옮겨 적는 것에 회의나 한계가 느껴지는 영화가 있는데 딱 그런 (기분 좋은) 무력감 혹은 도전정신을 안겨주는 작품. 오프닝에서 이미 끝남.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장면을 지나 낙원 같은 호숫가 수면 아래 지옥도가 감지될 때, 그 불온한 낙차가 모든 걸 집어삼킨다. 쨍하고 밝고, 푸르게 끔찍하다. 괴물 같은 영화.”
실은 이건 나중에 카페에서 생각을 정리해 기록한 버전이다. 극장에서 끄적인 메모장 제일 앞 페이지에는 그냥 딱 한마디만 적혀 있다. “와우….” 시간이 지난 뒤 말줄임표의 여백을 채워보려 애썼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개봉을 앞둔 영화를 1년 만에 다시 보고 똑같이 적는다. 와우. 그러곤 펜을 놓았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우리는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사유의 보석함을 채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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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5일 개봉하는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줄곧 그로테스크한 감각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렸던 조너선 글레이저가 역사의 표층을 자신다운 언어로 파헤친 충격적 시도라 할 만하다. 유대계 영국인인 글레이저 감독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올라 할리우드 청중이 보내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비판했듯,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일상을 해부하는 위험한 길을 걷는다.
조너선 글레이저의 영화가 국내 개봉한 것은 <언더 더 스킨>(2014) 이후 무려 10년 만. <섹시 비스트>(2000), <탄생>(2004), <언더 더 스킨> 이후 네 번째 장편을 내놓은 과작의 감독 글레이저에게 기다림은 곧 영화 전반을 압도하는 장악력을 축적하는 시간에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선사한 충격파를 시작으로 일찌감치 문제작으로 떠오른 <존 오브 인터레스트
[특집]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가능한 한 모든 면에서 정확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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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내일로>는 감독의 이름을 모르고 감상해도 난니 모레티의 신작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탈리아의 정치 풍경부터 죽음, 상실 같은 묵직한 소재를 과감하게 포획하면서도, 시네마에 대한 발랄한 애정을 놓지 않았던 모레티의 인장이 뚜렷하다. 영화에서 주인공 조반니(난니 모레티)는 힘겨운 제작 환경과 쉽지 않은 인간관계에 분투하면서 영화를 계속 찍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찬란한 내일로>는 희망 어린 시선으로 그리는 메타 시네마다. “‘이제 막 시작된’ 커리어의 이정표를 찍고 싶었다”는 난니 모레티를 화상으로 만났다.
- <찬란한 내일로>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 관한 영화다. 이런 형식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 몇해 전에 1956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각본을 쓴 적이 있다. 한동안 준비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중단하고 <일층 이층 삼층>(2021) 촬영에 돌입했다. 그런데 <일층 이층 삼
[인터뷰] 여러 소재와 시간, 차원이 공존하는 영화, <찬란한 내일로> 감독 난니 모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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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이를 영화를 만들어본 적 없는 관객도 수많은 ‘영화 만들기 영화’를 통해 학습해왔다. <찬란한 내일로> 속 영화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가 5년 만에 만드는 제목 미상의 신작 영화는 프로덕션 내내 난항‘만’ 겪는다. 처음 함께한 제작자 피에르(마티외 아말릭)는 가끔 현장에서 이상행동을 하고 주연배우 베라(바르보라 보뷸로바)는 대부분 감독과 상충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생 조반니의 영화를 제작한 아내 파올라(마르게리타 부이)는 조반니에게 별거를 선언하고 딸 엠마(발렌티나 로마니)는 부모보다도 연상인 폴란드 대사 예지(예지 스투흐르)와 열애 중이다.
바람과 대척을 이루는 현실 앞에서
관객은 조반니의 신작을 두고 찬란한 내일을 낙관하기 어렵다. 오히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결말을 비관하게 된다. 희망을 놓지 않고 영화제작의 투지를 불사르는 작중 캐릭터는 조반니가 유일하다. 감
[기획] 과거에 서서 영화의 미래까지 사랑하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픽션 페르소나는 어떤 변화를 관통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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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 시네마의 거장 난니 모레티가 국내 개봉작으로는 9년 만에 신작 <찬란한 내일로>로 돌아왔다. <찬란한 내일로>는 난니 모레티가 또 한번 감독 본인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이야기를 끌어와 만든 영화다. <나의 즐거운 일기>(1994)부터 시작된 그의 픽션 페르소나 조반니가 어김없이 영화에 등장하고, 5년 만에 현장에 출근한 조반니는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개념에 상대가 뜻을 같이하길 바라며 누굴 만나든 ‘영화란 무엇인가’를 설교한다. 그리하여 <찬란한 내일로>는 모레티가 21세기에 만든 그 어떤 작품보다 미우나 고우나 영화를 향해 경애를 한껏 바치는 작품이 된다. 산전수전 속에 영화를 만들었고 또 만드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시네마의 화창한 앞날을 바라는 난니 모레티의 신작을 돌아보았다. 난니 모레티와 나눈 인터뷰는 영화를 사랑하는 길로 향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에
[기획] 미우나 고우나, 영화를 만든다 - <찬란한 내일로> 리뷰와 난니 모레티 감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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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는 스크린에 물리적으로 구현 가능한 시청각적 쾌감, 그 지평선 너머를 향해 질주해온 시리즈다. 하지만 의외로 이번 신작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보여주는 것’만큼 ‘들려주는 쪽’에 무게를 싣는다. ‘매드맥스 사가’라는 부제답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역사가의 내레이션으로 문을 여닫는 형식은 마치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퓨리오사’라는 전설을 설화로 풀어낸다. 바로 이 점이 <퓨리오사>의 빼어난 성취이자 동시에 아쉬운 점이다. <퓨리오사>는 (예상 밖으로) 서사적인 완성도가 탁월해진 반면 (기대보다) 직관적인 쾌감은 옅어졌다. 한마디로 전작들과 달리 도파민이 무작정 분출되진 않는다.
광기에서 이성으로
어쩌면 이 아쉬움이야말로 조지 밀러의 명확한 의도로 보인다. 영화 말미 복수의 천사로
[비평] 지옥에도 도파민이 필요하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는 있고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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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리퀄인가
프리퀄은 불리한 게임이다. 권리금을 지불하지 않고 전작의 인지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행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창작자 입장에선 기본적으로 시퀄보다 따르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본편’이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결말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분노의 도로>)라는 역사적 걸작이 결말인 영화다. 다시 말해 <퓨리오사>가 보여주는 액션 시퀀스들의 결과물, 예컨대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고 누가 어디를 얼마큼 다치는지에 관한 상세 정보를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승패 결과와 스코어를 알고 보는 스포츠 경기만큼 김빠지는 게 없는 것처럼, 어차피 우승자가 정해진 <퓨리오사>라는 카 체이싱 경주를 <분노의 도로>만큼 박진감 넘치게 만드는 것은 당연히 어렵
[비평] 위대한 역사가의 일 - 결말을 아는 프리퀄에 주인공을 ‘다시’ 세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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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기는 아우가 있을까. 조지 밀러 감독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프리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를 두고 따져봐도 좋겠다. 김철홍 평론가는 형 못지않은 아우가 “전편의 자장에서 벗어났다”라는 상찬부터 올렸다. 반면 송경원 평론가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안정적 서사를 택하면서 <매드맥스> 시리즈의 고유한 광기를 잃었다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들의 설왕설래를 읽은 뒤 어느 쪽에 손을 들 것인가.
*이어지는 기사에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비평이 계속됩니다.
[기획] 새로운 탄생 설화 VS 느슨해진 광기,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찬반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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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입학 직후 3월, 체육 교사가 배구공을 뿌렸다. 순간 한 친구와 눈이 마주쳤고 말없이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언더핸드와 오버핸드를 번갈아 구사하며 우리는 무아지경이 되었다. 공이 땅에 처음 떨어진 것은 종이 울린 직후. 그 친구와 나는 국민학교 배구부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이였다. “한 시간은 기본이지.” “기억나냐? 떨어트렸다가 대가리 박고 컴퍼스처럼 돌았던 거.” 어릴 적 몸에 각인된 것은 여러 편의 시퀄을 연출했다. 배구부에서 높인 점프력으로 구미 지역 국민학생 높이뛰기 대회에서 3위를 했다. 강원도 전·의경 체육대회에선 최우수 공격수였고, 대학 수업 때는 체대생들도 내 스파이크와 서브를 받지 못했다. 지방의원 시절에는 주부배구팀의 트레이너였다. 요즘은? ‘직관’은 곧잘 갑니다, 끙.
국민학교 5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전문 코치가 부임해왔다. 라이트 공격수 겸 블로커로 발탁됐다. 주 44시간짜리 동계 훈련은 질적으로도 ‘지옥 훈련’이었다. 시대에 걸맞게(?) 몽둥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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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이하 <새로운 시대>)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는 모두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다. “교만의 대가로 몰락”(<새로운 시대>)하거나 또는 “인류가 스스로를 파괴”(<퓨리오사>)한 결과로 도래한 또 다른 세계에 남겨진 자들에 대한 영화. 일주일 사이로 서로 연관된 두편의 영화를 본 후 머릿속에 남겨진 몇몇 이미지들이 있었다. 디지털이 덧입혀지지 않은 인간의 몸과 퓨리오사의 기계 팔.
연약한 인간의 몸에 대하여
그 어떤 인물 형상과 액션도 디지털로 그려낼 수 있는 시대에 그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몸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이 질문의 시작은 <새로운 시대>의 한 장면에서 비롯됐다. 내게 <새로운 시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말과 지성을 잃은 인간 무리(또는 에코들)가 냇가에서 유인원에
[비평] 연약한 인간의 몸과 기계 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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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딸 손 하나 건드리기만 해… 가만 안 둬.’ 2023년 6월, 엄마가 보낸 문자메시지다. 촬영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엄마와 통화를 하던 중 평상시에는 잘 이야기하지 않던 서러움을 그날따라 구구절절 술회했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유난히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던 날. 잘 준비를 마치고 핸드폰을 열었는데 엄마에게서 온 문자 한통. 그것도 두 시간쯤 지난 후였다. 가만 안 둬. 그 짧은 문자 한통으로 날 울리는 모든 것을 무찔러주는 슈퍼우먼이 우리 엄마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세 자녀 중 막둥이로 태어난 나에게 엄마는 강인하기만 했었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서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엄마에게 뭐든 물어보았고 허락을 맡았다. 엄마는 나에게 백과사전이었다.
좋아하는 오래된 기억 중 하나. 다음날 학예회 준비로 노래 연습을 하던 4~5살의 나. <바둑이 방울>이라는 동요를 텔레비전을 보며 누워 있는 엄마 앞에서 연신 불러댔다. 내가 20번을 부르면 엄마는 20번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세상의 모든 선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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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에 중심이 몇개 있을까요?” 몇년 전 한 민주노조의 워크숍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결국 편집에는 쓰이지 않은 그날의 촬영본이 문득 떠올라 외장하드 폴더를 열었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이 공간에서 각자 중심, 가운데라고 생각하는 곳에 서보라고 말한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맞히려고 노력 안 해도 돼요.”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간의 끝에서 끝까지 거리를 재는 사람이 있고, 무대 위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벽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 혼자 서 있기도 하고 무리 지어 모여 있기도 하다. 이제 각자 자신이 왜 이곳을 중심으로 삼았는지 설명한다. 저마다 중심에 대한 정의가 다르고, 중심을 잡는 기준도 다르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사실 오랜만에 그날의 촬영본을 열어본 건 이 말을 다시 보고 듣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각자 왜 거기 섰는지는 알겠는데, 그런데 거기가 계속 중심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아도 괜찮을까.”
그날 서
[장윤미의 인서트 숏]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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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사샤(사라 몽페티)에겐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뱀파이어지만 살생이 두렵고, 죽어가는 인간을 보면 식욕 대신 동정심을 느낀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 끼니인 피조차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버스킹만 하며 살아가는 사샤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사샤의 부모는 딸을 사촌 언니 데니즈(노에미 오패럴)의 집에 보내 뱀파이어로서의 욕망을 일깨우려 한다. 한편 사샤의 눈에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외톨이 소년 폴(펠릭스 앙투안 버나드)이 들어온다.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는 영화가 오랫동안 재현해온 뱀파이어가 보여온 관능성과 소수자성을 청소년 성장 내러티브로 풀어낸 작품이다. 각본가와 연출자의 상상력을 좀더 정밀하게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부분이 더러 있지만, 뱀파이어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새로 만들고 그 세계의 규칙을 손수 지으려는 시도가 인상적이다.
[리뷰]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청소년 성장 내러티브로 풀어낸 뱀파이어의 관능성과 소수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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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장 나오토(시게오카 다이키)는 교통사고로 아내 미유키(퍼스트 서머 우이카)를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진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아들 하루토(쇼가키 미나토)는 어머니의 손가락을 땅에 묻고 회생의 주문을 외운다. 소년의 주문으로 땅에서 험한 것이 자라날 즈음, 나오토의 직장 동료였던 웹 영상감독 히로코(하시모토 간나)에게 불길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일본 호러를 대표하는 나카타 히데오의 신작 <금지된 장난>은 강령술을 소재로 미스터리를 파헤친다. 죽은 어머니를 살리려는 소년의 주술이 저주가 된다는 설정은 날카롭게 공포를 세공하던 감독의 장기에 비해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동기는 심지어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파악할 수 있다. 오히려 낡은 동기와 단조로운 설정을 무마하려 단락마다 넣은 유머 코드, 조악한 그래픽이 호러영화보다는 B급영화로서 가능성을 발견하게 한다.
[리뷰] ‘금지된 장난’, 낡고 조악한 장난질에 그친 강령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