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여행을 닮았다. 출발하기 전에 가장 설렌다. 도착하고 나면 몰랐던 세상이 펼쳐진다. 언젠가는 기어코 끝난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장의 사진과 기념품을 만지작거리며 물을 뿐이다.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에 참석한 사강(수지)과 지훈(이진욱)도 궁금해한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경로로 이별한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연인의 부재를 감당한다. 임선애 감독은 두 남녀를 끌어당기는 삶의 미스터리에 반해 그 회복과 치유의 나날에 동행했다. <접속>(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등 “90년대 한국 멜로의 정수”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 엔딩 크레딧을 보니 배우 수지가 기획자로도 참여했다. 연출을 맡은 배경은.
수지 배우가 오래 전부터 백영옥 작가의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화에 관심을 가졌다고 들었다. 제작사가 판권 구입 후 수지 배우를 먼저 캐스팅한 다음 내게 연출을 제안했다. <69세> <세기말의 사랑> 프로듀서였던 이승복 위드에이스튜디오 제작이사가 나를 감독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원작과 시나리오를 검토한 다음 내가 각색에 깊숙이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제작사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에 동의해 줘서 함께하기로 했다.
- 그 방향을 안내해 준다면.
어떤 장르든 그 안에 미스터리가 깃든 이야기를 좋아한다. 원작에서도 그 지점에 끌렸다. 사강과 지훈이 서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를 매력적으로 살리고 싶었다. 그다음으로는 두 사람이 겪는 실연의 핵심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중점적으로 고민했다. 소설은 감정을 세밀하고 집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매체지만, 영화는 그 분량을 다 소화할 수 없다. 실연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짧지만 제대로 보여주고자 오랜 연인인 지훈과 현정(금새록)의 베드신을 꼭 넣고 싶었다. 뜨겁지 않은, 굉장히 현실적인 베드신만으로도 둘의 연애가 처한 좌표를 딱 찍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사내 연인인 동시에 혼외 관계라는 특수성을 가진 사강과 정수(유지태) 사이는 어떻게 묘사하고 싶었나.
둘은 직장에서 위계 관계로 엮여 있기도 해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모든 조건을 다 떠나, 사강은 정수의 팔에서 자신의 것과 닮은 상처를 보고부터 마음을 준다. 관객에게 그 순간을 납득시키고 싶었다. 불륜을 결코 용인할 수 관객조차 이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사강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숙제였다. 정수를 연기한 유지태 배우도 그 부분을 잘 풀어내야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염려해 주셨다. 배우들과 계속해서 세심하게 대화하며 지금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 영화의 제목인 ‘조찬모임’을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도 중요한 과제였을 텐데.
안개 낀 새벽에 보면 폐건물처럼 느껴지는 낡은 건물에서 모임이 벌어지기를 바랐다. 그 장소가 양옥집을 개조한 것처럼 따사롭고 다정한 외관만큼은 아니길 바랐다. 내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안에 감도는 빛에는 약간의 온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둡고, 차갑고, 푸르스름한 가운데서 잠시 따뜻할 수 있도록. 어떤 테이블을 쓸 건지도 많이 고민했다. 소설을 읽을 때만 해도 인물들이 일자로 된 긴 테이블에 앉아 마주 보는 것을 상상했다. 그런데 미술감독이 원형 테이블을 권했다. 내 머릿속에는 없던 이미지였으나 물음표로 가득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원형이 재밌게 느껴지더라. 원형 테이블의 가운데를 뚫어 길을 트니 동선도 덜 답답해졌다. 여러모로 절묘한 선택이었다.
- 소설 속 모임에서는 ‘치유의 영화제’라는 이름 아래 <화양연화> <봄날은 간다> <러브레터> <500일의 썸머>를 상영한다. 이와 달리 영화에는 <접속> 포스터가 등장한다.
저작권 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고자 한국 영화를 골라야 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봄날은 간다>만 반영하고자 했다. 그런데 <봄날은 간다>에는 유지태 배우가 나온다! 이 무슨 세계관 충돌인가 싶어 다른 영화를 찾다 보니 <접속>이 어울릴 것 같더라. <접속>은 몇 번을 봐도 모던하고 세련된, 내게는 한국 멜로의 정수와도 같은 작품이다. 포스터 카피가 ‘언젠가 만날 것 같은 사랑’인 데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라는 대사도 있지 않나. 그게 꼭 우리 영화 속 인물들의 상황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접속>의 두 남녀가 탁 스치는 장면을 오마주했다.
-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을 찍는 동안 또 어떤 로맨스를 추억했나.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염두에 두고 찍은 장면이 있다. 사강과 지훈이 일본 공원에서 원신 원컷으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 사강과 지훈은 극 중반에서야 직접 대면한다. 이야기의 분기점이 되는 그 순간을 너무 설레지도, 너무 건조하지도 않게 구현하기 위해 배우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나.
이 장면에 임하는 수지 배우와 진욱 배우의 입장이 약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강과 달리 지훈은 오랜 연애를 끝낸 사람아닌가. 사강과 지훈이 티키타카를 잘 해나가며 ‘설렘 포인트’를 맞이하더라도 지훈이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다. 그래서 진욱 배우에게 웃음기를 거둬달라는 요청을 자주 했다.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배우들과 면밀히 모니터했다.
- 문득 사강과 지훈에게서 감독의 전작 <세기말의 사랑> 속 인물들과 닮은 구석을 발견했다. 한 사람은 유부남을 좋아했고, 한 사람은 오랜 관계의 종말을 예감한다.
‘돌봄’이라는 키워드도 공유한다. 특히 사강은 엄마를, 지훈은 장애가 있는 형을 돌봐왔다. 종류는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가족을 챙겨온 두 사람이기에 사랑과 연애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도 튕겨져 나오는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라 느꼈다.
- 세 번째 영화에 이르러 그간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본다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촬영을 마치고 편집하면서 생각한 건데, <69세> <세기말의 사랑>을 포함해 내 모든 작품 속 화두는 ‘햇빛’이었던 것 같다. 세 편의 장편영화 모두 엔딩에서 햇빛이 중요했다. <69세>는 성폭행 피해를 경험한 노인이 햇빛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이야기다. <세기말의 사랑>은 직사광선 아래 앉은 주인공의 말간 얼굴로 끝난다. 공교롭게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의 사강도 강렬한 햇빛을 받는다. 그림자 속에 숨던 친구가 말이다. 기내에서 지훈을 다시 만나 마지막 대사를 할 때, 그의 뺨에 드디어 빛이 닿는다. 인간은 태아 때부터 어둠에서 빛으로 가려는 본능이 있다고 하더라.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내게도 그런 감각이 있는 걸까 싶다.
Director’s Box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거치며 극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임선애 감독은 마흔 편이 넘는 장편영화의 스토리보드를 그렸다. 연출 데뷔 이전부터 이야기를 눈에 보이게 하는 기술을 체화한 것이다. 그 공력은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KNN관객상 수상작 <69세>(2019)에 이어 <세기말의 사랑>(2023)에서 만발했다. 성폭행 피해자의 자존, 외톨이들의 우정 등 다채로운 여성 서사에 귀 기울여온 임선애 감독은 세 번째 작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으로 또 한 번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껴안았다. 늘 그래왔듯, 그 포옹은 스크린 너머로 온기 어린 안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