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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병이 나서 안과에 갔다. 건대입구역 2번 출구에 있는 안과였는데 예약은 안되고 오후 6시30분까지만 병원에 도착하면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간호사는 말했다. 마침 인근 롯데시네마에서 <7번방의 선물> 일반시사회에 가야 하는 상황이라 평창 집에서 원주를 거쳐 고속버스를 타고 시간 맞춰 병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서 6시29분에 전화를 했다. 딱 5분, 아니 3분만 기다려달라고 사정했다. 간호사는 확신은 못하겠지만 일단 의사에게 말은 해두겠다고 했다. 헐레벌떡 병원 문 앞에 도착하니 왠지 의사일 것 같은 느낌의 30대 후반 남자가 막 문을 나서고 있었다. 내 직감이 맞았다. 모자를 들어올려 시뻘건 왼쪽 눈알을 보여주며 “이렇게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데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선생님? 원주에서부터 오느라 3분 늦은 거예요. 제발 처방전이라도 좀 써주세요. 모레 중요한 면접이 있거든요” 하고 통사정을 했다. 그
[SO WHAT] 치료받지 못한 자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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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제이의 <모더니티의 시각 체제들>이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그가 시각에 ‘체제’(regime)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우리 시각(vision)이 그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역사적/사회적 담론의 산물인 ‘시각성’(visuality)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리라. ‘시각성’은 특정한 시기에 주체와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과 하나가 되어, 그 자체가 하나의 ‘체제’를 이루게 된다.
가령 르네상스의 원근법을 예로 들어보자. 거기에서 중세 예술의 토대를 이루던 초월적인 ‘신의 빛’(lux)은 이제 인간의 눈에 지각되는 빛(lumen)으로 대체된다. 중세의 자연이 보이는 것의 바탕에 깔린 신성한 의미를 해독해내야 하는 거대한 텍스트였다면, 원근법에서는 근대적 자연이, 말하자면 수학적/기하학적 공간으로서 자연이 등장한다.
아울러 원근법은 회화의 기법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근대적 주체’의 형성에 관한 데카르트의 철학의 상징이자, ‘근대적 권력’의 작동방식, 즉 푸코가 말한 ‘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시각성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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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공>(Le Ballon,1899). 때로는 붉은 점 하나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 해일에 아들을 잃은 <더 임파서블>의 헨리(이완 맥그리거)에게 마지막으로 본 아이가 갖고 놀던 빨간 공이 그랬듯이.
*1월8일 일기에 <더 헌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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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 피신 몰리토 파텔(수라즈 샤르마)의 취미는 우표 수집이 아니라 종교 수집이다. 어린 파이는 힌두의 신 크리슈나의 입속에 들어 있었다는 우주의 형상을 상상하며 황홀해하고,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외동아들을 보내 죽게 했다는 신약성서의 이야기가 말도 안된다고 반응하면서도 매료된다. 소년은 한 종교의 신에게 다른 신을 소개해주어 고맙다고 기도까지 한다. 말하자면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신자가 된다는 일의 의미는 아무개 신을 만물을 창조하고 관장하는 유일한 절대자로 섬기는 행위라기보다 그 종교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까다로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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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며 자동적으로 입담이 거칠어진다. 광고 속 조인성이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스테이크 타령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팬심이 들끓어 그 집 스테이크 맛이 싹 달아난다. 이 상태면 광고 효과 제로다. 김수현이 연기 에너지를 마구 분출하고, 송중기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착한 얼굴로 치고 나오는 세상에 조인성이 저럴 때는 아니지 싶었다. 애꿎게도 한동안은 <권법>을 준비 중인 박광현 감독에게 조인성 책임론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충무로에서 전에 없는 SF 히어로물을 만든다고 하곤, 예의 열과 성과 에너지를 모두 보여주고선,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은 조인성과 함께 펑펑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던 박광현 감독은 ‘곧 들어갑니다’라는 말로만 그를 묶어둔 장본인이다. 조인성이 자의로 발목을 잡힌 건 분명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꿈쩍 않은 채 그의 재가만을 기다리는, 분명 괜찮은 시나리오를 하나둘 남김없이 고사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TV를 켜니 또다시 스테이크 광고
[조인성] 우아한 파격 조인성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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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벽서라고 불렸다. 개인적 감정을 담은 투서도 있었지만, 체제비판적인 익명서도 공개 장소에 게시되곤 했다. 옥사와 사화의 빌미가 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처형되었다. 벽서는 대중매체도 없고 표현의 자유도 없던 시절, 백성이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지만, 조선의 통치자들은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했다. 벽서를 게시한 자는 교형에 처했고, 소지만 해도 곤장으로 처벌했다.
표현의 자유를 헌법에 모셔둔 채 시민의 일반의지를 존중한다는 근대사회의 안온한 안뜰의 누군가가 보기에, 힘없는 백성이 벽서를 게시하고 칠흑 같은 골목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풍경은 그렇게 낯설고 기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여기는 골목에 대자보 한장 붙였다는 이유로 청년들이 고문을 당했던 그 악몽의 군사독재 시절을 경유한 한국이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벽서를 금지당한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그것도 ‘더불어 잘 사는 복지 마포’라는 슬로건을 염치없이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마포구 벽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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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말 한마디가 또 다른 억측을 낳고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라….” <남쪽으로 튀어>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던 지난해 8월, 임순례 감독은 연출권을 침해받았다며 촬영을 중단하고 현장에서 하차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현장에 복귀했다. 당연히 말들이 많았다. 제작자와 주연배우간에 마찰이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그 마찰의 수위를 궁금해했다. 하지만 임순례 감독은 말을 아꼈다. 공개된 사실을 감추진 않았지만 적극적인 해명 또한 하지 않았다. 6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어오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스스로도 정리의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원작을 각색하는 작업부터 한여름 섬에서의 촬영까지 고단한 일의 연속이었다는 <남쪽으로 튀어> 개봉을 앞두고 임순례 감독을 만났다. 인터뷰 말미, 국민의 의무 따위 안중에 없는 주인공 최해갑이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훌쩍 떠나듯 임순례 감독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지도
[임순례] 너무 정색하기 싫어서 코미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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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나 논문 혹은 기사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 글쓰기를 할 때는 하나뿐인 모니터가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지곤 한다. 여러 개의 웹페이지나 문서를 하단에 쌓아두고 작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요한 내용을 찾으려면 하나하나 헤집어야 하는 것도 문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고작 두세 문단을 타이핑하고 난 뒤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시스템뱅크의 온랩 1302는 이런 상황에 해결책이 돼줄 노트북용 듀얼 모니터다.
시스템뱅크의 온랩 1302는 드라이버 설치 없이 USB만으로 컴퓨터와 연결하는 방식이라 간편하고, 13.3인치, 두께 8mm, 무게 654g의 아담한 사양 덕분에 휴대 또한 용이하다. 필요할 경우 휴대폰이나 디지털카메라와 연결해 저장된 사진을 크게 보는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LED 모니터로서 소비전력이 낮고 발열량이 미비하다는 것 또한 눈에 띄는 장점이다. 어쩌면 작업 능률을 2배까지 올릴 수 있는 똑똑한 소비가 될 듯. 그렇다면 18만5천원이
[gadget] 두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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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1. 스마트폰이나 스마트패드를 연동하면 리모컨이 장착된 수화기만 들고 다니며 좀더 편안한 통화를 즐길 수 있다.
2. 스마트폰만 사용할 때에 비해 한결 향상된 음질과 출력을 제공한다. 음악 감상용으로도 무리가 없을 수준.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하면 편리하게 다자간 회의 통화를 할 수 있다.
3. 하지만 과연 스마트폰이 통화만을 위한 기계일까? 통화보다 SNS 이용이 잦은 사람에게는 그리 활용도 높은 제품이 아닐지도 모른다.
2001년에 제대를 하고 보니 2년 반 동안 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대학가를 점령했던 이스트팩은 죄다 자취를 감추었으며 곱절쯤 빨라진 인터넷 속도는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입대 전까지만 해도 삐삐를 차고 다녔던 나는 드디어 첫 휴대폰을 구입했다. 공중전화 앞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의 줄이 부쩍 짧아지다가 아예 사라진 것도 그 무렵이었을 거다. X세대들은 요금에 대한 걱정은 한달 뒤로 미뤄둔 채 쓸데없는 문자를 주고받곤 했다. 그렇게 휴대전화를 일상의 기
[gadget] 스마트폰을 더 편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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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남루한, 직업은 (야설)작가. 통장잔고는 3320원에 월세는 5개월치가 밀려 있다. 전직 (에로)영화 감독으로 지금은 인터넷 (성인)사이트 운영자인 그의 지인의 해설에 따르면 루한씨가 야설작가가 된 것은 이름에서부터 운명지어진 것으로, “네가 남씨이기 때문에, 네 이름은 ‘남자의 크고 넓은 봉우리’를 뜻하는 거야. 너야말로, 이 시대의 짓밟히고 억눌리고 초라해진 남성들의 봉우리를 다시 ‘크고 넓고 거대하고 굵직하게’ 일으켜 세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보내진 인물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를 이렇게 소개할 수도 있겠다. 조만간 소설집을 계약할 예정인 등단 작가.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삼촌이라고 부르며 한 남자를 소개한다. 그리고 루한은 삼촌이라 불리는 정신병자이자 전 세계챔피언 복서이자 매미 애호가, 그러니까 매미 에너지 연구는 20년, 복싱은 8년 하고 무도(<무한도전> 말고 舞蹈) 인생은 3년을 보낸, 어딘가 허경영을 연상시키는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는 일을 맡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구라의 능력자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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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면 당연히 그 안의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마련이다. 소설가 고종석의 새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는 제목의 ‘해피’라는 단어 때문에 오히려 ‘언해피’한 가족의 이야기가 먼저 그려지는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이 맞았다. <해피 패밀리>는 핏줄로 이어져 있기에 어떤 타인보다 가까울 수밖에 없으나 그러기에 더 잔인한 ‘가족’의 허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가족 구성원의 이름을 딴 챕터로 나뉘어 있다. 한민형, 한진규, 민경화 등 가족 구성원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딴 챕터 안에서 개인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모두의 사연을 모아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는 개인의 초상화를 모아 만든 기이한 가족사진이 되는데 재밌는 것은 사진이 완성될 때 이 가족이 품은 비밀 또한 실체를 드러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해피 패밀리>는 모든 이의 입을 빌려 최후의 진실까지 달려나가게 만드는 서사구조가 매력적인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이 털어놓는
[도서] 어쩌면 그의 마지막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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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월31일~2월17일
장소: 게릴라극장
문의: 02-763-1268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감옥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아일랜드>는 메시지가 갖는 묵직한 무게와 첨예한 문제의식 덕분에 공연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켜온 문제작이다. 1977년, 구히서 역, 윤호진 연출, 그리고 이승호, 서인석의 열연으로 무대에 올랐던 초연 무대는 당시 우리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엄청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작가 아돌 푸가드는 감옥에서 연극 <안티고네>를 준비하는 두 죄수의 극중극을 통해 흑백 인종문제를 넘어 법과 권력, 국가와 개인적 삶, 자유에 대한 갈등을 다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워낙 다루는 주제가 돌직구적이고 ‘센’ 작품이다 보니 작품의 인지도에 비해 공연이 자주 되지는 않는 편인데, 지난해 젊은 연극인 집단인 ‘프로젝트 아일랜드’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공연을 올려 시선을 모았다. 대본 전체를 새로 번역/각색하고, 작품의
[공연] 묵직한 무게를 지고 가는 두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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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3월31일까지
장소: LG아트센터
문의: 02-6391-6333
뮤지컬 <레베카>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와 마찬가지로 대프니 뒤 모리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하지만 소설과 히치콕의 영화를 모두 본 사람이라면 뮤지컬 <레베카>가 히치콕 영화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뮤지컬과 영화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그건 히치콕에게 물어보면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무덤 속에 있는 그는 아마도 이 뮤지컬의 캐릭터가 가진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장 눈여겨봤을 테니까. 이렇듯 뮤지컬 <레베카>는 영화보다 더 입체적이고 힘있는 주인공들을 내세워 관객을 사로잡는다. 특히 영화에 비해 더욱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막심이나 댄버스 부인 같은 캐릭터는 뮤지컬 <레베카>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다.
뮤지컬 <레베카>는 맨덜리 대저택을 짓누르는 망령 같은 존재 ‘레베카’
[공연] 레베카는 밤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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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기존의 R&B와 비교해 좀더 감성적이고 몽환적이며 공간감 넘치는 사운드를 들려주고, 다른 장르와의 교류에도 적극적인 음악. 요즘 유행하고 있는 PBR&B(Pabst Blue Ribbon+R&B, R&B 중 새롭고 독특한 음악을 일컬으며, 프랭크 오션, 위크엔드, 미구엘의 음악을 부르는 명칭으로 쓰인다-편집자)에 대한 대략의 거친 설명일 텐데, 미구엘은 ‘PBR&B 현상’을 이끌고 있는 음악가이다. R&B를 기본으로 팝, 일렉트로닉, 훵크 등의 장르가 기막히게 맞물려 돌아간다. 여기에 미구엘의 보컬이 더해지며 새롭지만 친숙한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프랭크 오션은 신선하다고 느꼈다. 위크엔드의 세장짜리 앨범을 접했을 땐 꽤 진지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가, 데뷔 앨범을 확장한 미구엘의 2집을 음미하면서는 앨범의 의미와 싱글로서의 가치를 함께 생각해볼 수 있었다.
[MUSIC] 장르의 이종교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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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수는 그동안 왜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을까. 15년 만에 출연하는 영화인데 왜 좀더 개성있는 캐릭터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첫사랑과 결혼해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은 어떨까. 40대 여배우로서의 고민은 뭘까. 꾸준히 드라마로 만나온 배우였기에 신비감보다는 익숙함이 앞섰다. 그런데 정작 오연수는 미지의 이름이었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남쪽으로 튀어>에서 최해갑의 아내 안봉희 역을 맡은 오연수를 만났다. 다섯 가지 키워드로 배우 오연수를 탐구해보았다.
15년 만의 외출
“예전에 영화할 때는 스포츠지 두세 군데 인터뷰하면 끝이었는데 매체가 이렇게 많아진 것도 놀랍고, 이런 일대일 인터뷰도 새삼스럽다. 마지막으로 영화한 게 98년이었으니까.” 오연수는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일부러 영화와 담을 쌓은 건 아니었다. 그저 “TV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아”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연수] 우리는 아직 그녀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