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마스터클래스가 6일 경남정보대 센텀산학 캠퍼스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이창동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증명하듯 매진사례를 이뤘다. 관객들의 질문 역시 끊이지 않았다. 그는 매번 ‘어려운 질문이네요’라고 운을 떼며 질문을 비켜가는 듯 했지만, 그 대답을 다 듣고 나면 늘 질문의 핵심에 닿아 있었다.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연극, 소설을 두루 경험해온 그에게 영화와 다른 직업과의 관계를 가늠해보는 질문들이 많았다.
내가 다양한 직업을 경험한 것을 보고 내가 활동적으로 바쁘게 살아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타고난 게으름뱅이입니다. 무엇을 하면서도 그렇게 행복감을 느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잘난 척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에도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30대 후반 정도에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진로를 바꿨는데,이때는 작가로서의 삶과 재능에 대해 절망 상태였습니다. 마침 박광수 감독이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의 시나리오를 제안해왔고, 저는 조감독 자리까지 맡게 됐습니다. 일종의 ‘딜’이었죠(웃음). 보통 조감독은 감독이 되기 위한 과정의 일종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벌주기 위해 그 일을 했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했죠. 내가 소설 취재차 온 거라 오해한 스탭들은 이런 나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문성근, 명계남 등이 일명, ‘이창동 데뷔 위원회’를 꾸려 내가 <초록물고기>(1997)로 감독이 되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두 번째 영화 <박하사탕>(1999)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1980년대를 거쳐 온 386세대들이 잘 이해할 영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체감하기로 당시 30대보다는 20대가 이 영화를 더 좋아했습니다. 나도 마지막에 영호가 도달한 나이인 20살의 관객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40대의 주인공이 20대의 생애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순간으로 역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역행의 구조를 택한 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밀레니엄을 앞둔 당시, 모두들 시간에 대해 말했고 그런 영화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추상이 아닌 내가 경험한 것처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화장실에서 면도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늙게 됐을까? 다시 20살의 나로 돌아간다면 내가 이렇게 살지는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10분 뒤의 결과를 알고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그 행동이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순수하고 아름다운 20대에게 나중의 결과를 보여주고 원인을 보여주며 그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작품에서 역사와 관련된 것을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속의 삶의 의미를 봤으면 했습니다.
한때 나는 분단문학 작가로 명명될 정도였습니다. 영화를 하면서는 이와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 미뤄두고 있었지만, 분단문제는 한국인들에게 내면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 자신에게는 숙제처럼 남아있습니다. 아직은 충분히 숙성되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내 속에서 숙성돼 밖으로 나가겠다고 가슴을 치면 영화로 만들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담기보다는 질문을 담으려고 합니다. 나는 메시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오락영화를 보면 패턴화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런 메시지는 하나마나한 것입니다. 나는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하려하고, 관객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 자연스럽게 그질문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대답을 각자가 찾게 되는 그런 영화를 꿈꿉니다. 세상에 시나리오를 쓰는데 도움이 되는 책은 없습니다. 시나리오는 요령, 기술로 쓸 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고 할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내게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