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티 판의 <크메르루즈-피의 기억>(2003)에서 대단히 놀라웠던 순간은 과거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있었던 ‘S21’이라는 정치범 수용소의 간수와 생존자들을 대면케 하는 장면이다. 감독인 리티 판은 간수들에게 과거에 했던 일들을 그대로 ‘재연’하게 하는데, 그들은 희생자들을 고문하고 시체를 처리했던 끔찍한 일들을 대단히 범용한 제스처로 태연하게 재연한다. 리티 판은 원래 크메르루즈에 관한 재판을 영화화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학살이 진행되던 범용한 메커니즘을 그려내는 일의 필요성을 떠올려 내용을 바꿨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기억과 망각이다. 기억의 말소는 사건을 증언할 생존자가 절멸했다는 것에서, 그리고 희생자들(그리고 가해자들) 스스로가 끔찍한 기억을 견딜 수 없어 지워버리려 하기에 발생한다.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화가 또한 수용소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 기억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에 그는 수용소에 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예술 작업이란 그렇게 망각에의 저항, 혹은 불가능한 기억에의 표상작업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지만 망각과 기억의 문제로 시달린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영화를 만든 리티 판이22다. 1990년대 이래로 그는 크메르루즈의 학살과 상흔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이는 그의 내력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리티 판은 프놈펜에서 태어나 크메르루즈의 대학살 이후에 프랑스로 건너와 프랑스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했다. 과거의 끔찍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이 그곳을 떠나있음에도 결코 과거의 경험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헤어나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알고자 하는 욕망이 그를 영화학교에 가게 했고, 또 영화를 만들게 했다. 앙코르와트를 무대로 유적과 내전의 참상,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소년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낸 <앙코르의 사람들>(2003), 매춘부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괴된 캄보디아의 현재를 그려낸 <종이는 불씨를 감쌀 수 없다>(2007)등의 작품은 그렇게 계속된 내전과 학살 이후에 여전히 캄보디아의 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들이 됐다. 고통스런 기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장소로 되돌아가 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최신작인 <잃어버린 사진>(2013) 또한 크메르루즈가 지배한 1970년대 후반의 캄보디아의 비참한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과거의 역사를 담은 아카이브 영상들의 복원을 시도한다. 영화에는 그렇게 복원된 필름들이 도처에 삽입되는데, 하지만 그러한 영상들만으로는 대량학살의 기억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그러므로 비참한 역사는 소박한 흙 인형에 의해 재현된다. 아카이브 영상들과 추상화된 인형극이 교착하면서 역사의 표상이 시도된다. 리티 판에게 영상작업이란 역사의 소멸에 대한 저항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절멸과 부재에 맞서 역사의 표상을 시도하는 21세기의 사려깊은 고고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