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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러분들은 이 세트장에서 한편의 영화를 같이 작업하게 될 겁니다.” 첫 대사부터 극중극을 연상시키는 <바다호랑이>는 연극무대와 같은 공간에서 만들어졌다. 영화는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희생자 시신을 수습한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이야기를 그린 김탁환 작가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원작으로 삼았다. 김관홍 잠수사를 모델로 한 주인공 경수(이지훈)는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인해 잠을 못 이룬다. 그러던 중 동료 잠수사 창대(손성호)가 과실치사죄로 재판을 받게 되고, 경수는 그날을 떠올리며 무죄판결을 위한 탄원서를 작성한다. 푸른 조명만으로 수중을 구현한 촬영, 마임과 같은 동작으로 시신을 안고 헤엄치는 고통을 표현해낸 배우의 연기가 돋보인다.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 <대립군> 등을 연출한 정윤철 감독의 신작이자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리뷰] 여백을 채우는 공통의 기억, <바다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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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빛의 마술사이자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화파 중 하나였던 인상주의의 창시자.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는 자신의 말년에 지베르니 생가에 있는 수련 정원을 그리는 데 골몰한다. 모네가 백내장을 앓으며 번뜩이던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시기에 그는 250여점에 달하는 수련 연작을 제작한다. 캐나다의 논픽션 작가 로스 킹의 저서 <광기의 마법: 클로드 모네와 수련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는 모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수련 연작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 배우 엘리사 라소스키가 해설로 참여한 영화는 모네의 정원과 센강 그리고 지베르니의 자연경관을 그의 작품과 교차시키며 모네의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모네가 수련에 집착한 이유와 그의 캔버스에 담긴 희로애락의 정서를 흥미로운 관점으로 풀어낸 모범적인 후기 클로드 모네 입문서다.
[리뷰] 그의 정원은 결코 도피처가 아니었다, <모네의 수련. 물과 빛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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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가르치는 경민(정승민)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영원(이유하)은 물물교환식 과외를 진행하면서 서로에게 점차 이끌린다. 경민에겐 3년차 연인 선희(전한나)가 있지만 결혼이란 과제 앞에서 관계가 표류 중인 모양새다. 나아가려는 여자와 머뭇거리는 남자, 그 앞에 나타난 낯선 상대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향한 ‘레슨’이 되어줄 것이다.
경계 지대에 놓인 관계를 그리는 <레슨>엔 불안과 충동이 함께 일렁인다. <이인> <올 겨울에 찍을 영화> 등을 만든 김경래 감독은 각자의 방식으로 흔들리는 세 인물들의 감정을 일상 속 미세한 기류로 포착한다. 절제된 시선 속에서 확보된 서늘한 관능이 이 유예된 멜로드라마의 매혹이다. 욕망과 책임에 대한 한편의 느슨한 도덕극처럼 보이기도 하는 <레슨>은 삼각관계 속 미묘한 균열들을 수집해 내면의 풍경화로 완성시킨다.
[리뷰] 엇갈린 시간과 각도로 사랑을 배운다는 것. 구조와 관능이 공존한다, <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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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직선으로 내리쬐는 작은 시골 마을. 함구증 증세를 보이는 초등학생 오노다 아키는 다른 친구들과 쉬이 섞이지 못한다. 어느 날 같은 반 소부에 료, 이노하라 유타와 장난스레 뒤섞이다가 고슴도치 같기도, 강아지 같기도 한 후레루를 마주한다. 후레루는 예부터 섬마을에 전해내려온 전설의 동물. 후레루만 있으면 사람들이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전할 수 있다. 텔레파시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세 친구는 허물없이 빠르게 가까워졌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의 단층이 탄탄해졌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각기 다른 관심사와 취향이 생겨도 세 친구는 여전히 하나다.
그리고 이제 스무살. 섬마을을 떠나 도쿄에 상경한 이들은 기울어져가는 주택을 개조하여 함께 살아간다. 월셋집은 대도시를 부유하는 젊은이를 불안하게 하지만 내가 너고 네가 나 같은 단짝들은 동고동락하며 안정적으로 정착한다. 그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귀여운 후레루. 신비로운 의사소통 능력을 지닌
[리뷰] 인생에 불순물이 좀 섞여줘야 면역력도 커지는 법이지, <후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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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장뤼크 고다르의 9번째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가 필름 복원을 거쳐 미국에서 재상영된 순간.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시카고 리더>에 당대 주류영화를 향한 질책을 경유해 고다르를 향한 흠모를 남긴다. “끝없는 장난기, 하지만 그것이 의존하는 과부하의 미학은 대부분의 현대영화들의 단순화된 과잉 살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1989)의 감각적 폭격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전제에 근거하지만 <미치광이 피에로>의 창조적 과부하는 모든 것이 아직 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로젠봄의 감상으로부터 35년이 훌쩍 넘은 지금, <미치광이 피에로>의 국내 개봉에 관해 어떤 말을 적어야 할까. 여전히 관객의 해방에 기여하는 이 고전은 영화가 무의미와 광기를 포착하는 가장 적절한 매체일 수 있다고 말을 건다. 우리는 페르디낭(장폴 벨몽도)과 마리안(아나 카리나)이 충
[리뷰] 재개봉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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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그동안 너의 이름을 선뜻 부르지 못했어. 너에 대해 무지했지.” 대마를 ‘풀’이라 부르며 오래된 친구를 소개하듯 시작하는 다큐멘터리 <풀>은, <재춘언니> 등으로 노동자의 파업 현장을 기록해온 이수정 감독의 신작이다. 의사였던 권용현은 공황장애에 CBD가 효과가 있음을 스스로 경험하고 아픈 이에게 대마초를 건넸다가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농부 천호균은 남북 접경지역에서 ‘평화’라는 구호 아래 대마를 재배한다. 일년생 풀인 대마는 물과 비료 없이도 빠르게 성장하여 탄소를 흡수하는 친환경적 식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마는 ‘금지된 식물’이라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재배해야 하고 수확한 대마는 공무원의 참관 아래 줄기를 제외하고 땅에 묻어야 한다. <풀>은 대마 합법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대안적 삶을 따라가며, 해외 사례와 전문가 인터뷰,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그간 금기시되어온 대마의 진실을 친근하게 풀어낸다.
[리뷰] 목가적 풍경과 평온한 얼굴로 대마초라는 금기를 깨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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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 유튜버 호준(김호원)이 촬영차 지방의 한적한 낚시터를 찾는다. 곧이어 영화감독인 남 감독(성환), 그리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먼 길을 떠나온 배우 희진(임채영)이 등장한다. 호준은 처음엔 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머지않아 그의 과거가 밝혀지며 조용했던 낚시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박중하 감독의 <잔챙이>는 하고 싶은 말을 에두르지 않는 영화다. ‘잔챙이’는 선택받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인물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이며, 감독과 배우라는 특수 관계에 얽혀 있는 세 인물의 대화는 어차피 ‘영화 이야기’로 귀결된다. 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말 원 없이 뱉고 싶은 심정의 배우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한정된 장소에서 펼쳐지는 세 인물의 대사 주고받음이 인상적이다. 주연이자 각본, 제작을 맡은 김호원 배우는 24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리뷰] 일찍이든 늦게든 일어난 낚시꾼에게 기회가 온다, <잔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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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에츠코(아마미야 소라)는 초등학생 시절 달리기 선수를 목표로 살아왔으나 이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다니는 미츠히가시 고등학교에 도쿄에서 전학생 타카하시 리나(다카하시 리에)가 온다. 그녀의 꿈은 조정부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조정부가 부활한다는 소식에 곧바로 부원이 모이고 이들은 다 함께 대회에 나가려 한다.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는 사쿠라기 유헤이 감독의 애니메이션으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최애의 아이>에서 호시노 아이로 분한 다카하시 리에 등 유명 성우가 참여했다. 작품은 3D로 연출되었으며 전형적인 스포츠 동아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간다. 해안가 풍광을 살리는 작화와 인물의 감정선을 과장하지 않는 소박함이 인상적이다. 조정을 사실적으로만 그려 애니메이션만 줄 수 있는 쾌감이 살아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리뷰] 청춘이여 청량한 오늘과 쨍쨍한 내일을 향해 노 저어 나가라, <기빗올: 우리들의 썸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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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시대인 21세기에도 언어가 정치 투쟁의 도구로 자리할 수 있을까. <니캡>을 보고 나면 누구든 민족 고유의 언어를 힙합 비트에 실은 채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니캡> 속 항거의 주체는 니시(모 차라)와 리암(모글리 밥) 그리고 오도허티(DJ 프로비)다. 아일랜드 벨파스트에 사는 니시와 그의 친구 리암은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어를 수호하며 아일랜드어로 랩메이킹을 한다. 이들은 우연히 아일랜드어 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오도허티과 연을 맺고, 힙합 밴드 니캡을 결성해 아일랜드에 파란을 일으킨다. <니캡>은 힙합과 마약, 섹스가 내러티브 내에서 질펀하게 뒤엉키고 불안정한 청춘의 1인칭 내레이션과 힙노시스풍의 타이포그래피가 범람하는 영화다. 이같은 특성으로 인해 <트레인스포팅>의 추억을 떠올리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세 주인공은 실제 2017년부터 활동 중인 밴드 ‘니캡’의 멤버들이다.
[리뷰] 필요한 도발, 유효한 저항. 우리 시대의 <트레인스포팅>이 될 자격이 충분해, <니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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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강사 유정(한채영)은 지인에게 명품 의류를 수입하는 CEO 선희(현우성)를 소개받는다. 선희의 정체는 불법을 일삼는 건달이다. 그는 유부녀인 유정에게 명품 의류를 선물하는 등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유정의 친한 동생 강수(장의수)는 선희의 사악한 계략을 알아차리나 때는 늦었다. <악의 도시>는 아침드라마의 황태자로 불린 현우성 배우의 입봉작이다. 한채영 배우가 8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목을 끈다. 영화의 만듦새는 전반적으로 아쉽다. 우선 범죄물로의 매력이 떨어질뿐더러 각 캐릭터의 이야기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플래시백으로 캐릭터의 서사를 보충하려고 애쓰지만 되레 서사의 중심을 흩뜨려뜨는 역효과를 낳는다. 약물 강간 등 성폭력을 재현하는 태도도 문제다. 성폭력이 용인 되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대신 인간에 대한 믿음이란 추상적인 문제로 갈무리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리뷰] 인간혐오로 논점을 얼버무리기, <악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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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산골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번진다. 물귀신에게 잡혀간 사람들이 머리가 잘린 채 발견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탐정 키엔(꾸옥 후이)이 조사를 시작한다. 문 부인(응옥 지엡)의 잃어버린 조카 응가를 찾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수사를 이어가던 키엔은 이 사건에 생각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의 과거가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을에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귀신이 키엔까지 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빅터 부 감독의 신작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는 베트남 산골 마을이라는 독특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다. 탐정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려 노력하는 대신 이야기 자체에 공을 들여 정면 승부를 꾀한다. 극이 다소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배경 특유의 음산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이를 보완한다.
[리뷰] ‘넥스트 키엔’을 기대하게 만드는, <탐정 키엔: 사라진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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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멕시코시티, 작가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된 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리는 곁을 지켜줄 상대라면 가리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의 호의는 종종 불쾌한 추파로 오해되거나 자신을 겨냥한 조롱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외로움으로 방황하던 리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유진(드루 스타키)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유진에게 마음을 빼앗긴 리와 달리 유진은 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유진에게 “일주일에 두번 정도만 다정하게 대해달라”며 리는 어떻게든 유진과 마주할 시간을 가지려 한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로 유진에 대한 리의 갈망은 더욱 강해졌지만 유진은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어느 날, 리는 상대와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약초 야헤에 관해 듣는다. 어떻게 해서든 유진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리는 야헤가 있다는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정글로 유진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진의 숨겨진 진
[리뷰] 몽환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사랑의 실험,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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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귀도(로베르토 베니니)는 작은 서점 운영을 꿈꾸며 로마로 이주한다. 유대인 차별과 늦은 행정 처리로 인해 호텔에서 일하던 그는 학교 선생인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와 사랑에 빠진다. 이미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도라는 귀도와 가정을 꾸리고 아들 조슈에(조르조 칸타리니)와 단란한 생활을 이어간다. 조슈에가 5살이 됐을 무렵 이탈리아 정부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수감시키고 조슈아와 귀도도 군인들의 손에 붙들린다. 가족의 소식을 접한 도라 역시 수용소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귀도는 조슈에가 겁에 질릴 것을 염려해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게임의 일환이라 속이고 1000점을 먼저 따는 우승자에게 선물로 탱크가 수여된다고 전한다. 어느 날 장교가 증거 인멸을 위해 수감자들을 전부 사살할 것이란 소식을 들은 귀도는 조슈에를 숨겨두고 아내 도라를 찾아 나선다. <인생은 아름다워> 는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개인의 삶을 투과해 홀로코스트
[리뷰] 재개봉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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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세찬 감독의 다큐멘터리 <빛의 혁명, 민주주의를 지키다>는 2024년 12월3일부터 윤석열 탄핵 선고일까지 꺼지지 않았던 광장의 열기를 담으려 노력한다. 12월3일 밤에 국회로 나선 익명의 시민, 재치 넘치는 깃발과 응원 봉을 들고 시위를 축제로 만든 청년,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봉준투쟁단과 키세스 군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등이 영화에 인터뷰로 참여했다. 푸티지와 언론 보도, 정치인과 교수, 신부, 시인 등 전문가의 인터뷰가 광장을 의미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실시간으로 제작된 다큐임을 참작하더라도 다양한 의제를 다루며 최소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 애쓴 점이 인상적이다. 앵커 출신 안귀령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의 내레이션도 다큐에 안정감을 더한다. 다만 지나치게 친절한 구어체의 내레이션 대사, 쟁점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 큼지막한 타이포그래피 및 그래픽 등 낡은 감각의 연출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리뷰] 교실에서 많이 틀어줄 듯한 교과서다운 다큐, <빛의 혁명, 민주주의를 지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