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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구마사제인 패트릭(더그 브래들리)은 라울(빅터 마라나)과 의사 올리비아(카일라 필즈)와 함께 악마가 들린 소녀 헉슬리를 구하려 24시간 동안 진행되는 퇴마의식에 임한다. <엑소시스트: 더 데빌>의 원제는 <엑소시스트>(1973)의 원제 끝에 s자를 더한 ‘The Exorcists’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엑소시스트>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그 명성에 무임승차하는 영화로 보인다. 우선 한편의 영화라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완성도가 부족하다. ‘왜 퇴마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생략한 채 곧장 퇴마의식을 행하는 전개를 선택한 탓이다. 또한 영화엔 맥락 설명이 전무해 감정을 이입할 여지가 적다. 퇴마 중에도 경문을 매뉴얼 읽듯이 말하는 배우의 기계적인 연기도 몰입을 방해한다. 템포는 느리며 모든 상황이 대사로 전달돼 지루함을 유발한다. 크리처 디자인도 <엑소시스트>를 재탕한 수준이고 엑소시즘과 좀비 장르를 섞은 설정도 설득력이 없어 무리수
[리뷰] 퇴마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더 룸>을 보는 듯한 낯부끄러움, <엑소시스트: 더 데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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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절의 시대다. 인간관계에서 불편한 타자를 가차 없이 차단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그들과 공존해야 하는 상황은 찜찜함을 넘어 모종의 공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스픽 노 이블>은 바로 그 공포를 겨냥한다. 전형적인 중산층인 벤(스콧 맥나이어리) 가족은 휴가지에서 패디(제임스 매커보이) 가족을 만나 친구가 된다. 패디 가족은 벤 가족을 시골에 있는 저택에 초대한다. 벤의 아내 루이스(매켄지 데이비스)는 채식주의자인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는 등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무례한 패디의 행동에 계속 불편함을 느낀다. 영화는 시골과 문명사회의 가치관 충돌을 그려낸 포크 호러의 공식을 영리하게 뒤집는다. 난민과 하층민 등 타자를 보는 서구 중산층의 불안감을 도발적으로 그린 초반부가 특히 독창적이다. 사실적 액션과 원맨쇼에 가까운 제임스 매커보이의 호연이 눈길을 사로잡지만, 이에 비해 빌런의 설정에 구멍이 많다는 단점이 더욱 눈에 띈다.
[리뷰] 손절과 안온다정함에 대한 현대적 우화와 블룸하우스 호러 사이의 불협화음, <스픽 노 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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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중공업 대리인 준희(장성범)는 인사팀에 발령된 후 구조조정 업무를 맡는다. 150명의 해고자를 추리는 과정이 내킬 리 없지만 회사를 위한 일이란 생각에 인사팀은 신속하게 일을 진행한다. 회사의 의견을 잘 받아들일 직원을 근로자 대표로 선발한 뒤 해고 대상자 선발 기준을 세우려 하지만, 사태를 파악한 또 다른 직원들이 반발하고 나선다. <해야 할 일>의 화자는 해고 당사자가 아닌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실무자다. 직접적인 실행자이자 관찰자로서 준희는 상황을 폭넓게 살핀다. 그의 눈을 통해 본, 영화가 그리는 구조조정의 핵심은 회사와 직원간의 싸움이 아니며 결국 직원들 사이의 갈등만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상의 문제는 그대로지만, 이 상황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다루거나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은 채 현실감 있게 전달한 것이 <해야 할 일>의 미덕이다. 박홍준 감독이 조선소 인사팀에서 4년간 근무한 실제 경험담이 반영됐다.
[리뷰] 불온한 시스템 아래 인간의 존엄 따윈 얼마나 미력한가,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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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속밴드를 만들어 첫 라이브 공연을 마친 기타리스트 고토 히토리(아오야마 요시노)와 멤버들은 다음 무대로 히토리가 다니는 고등학교 축제의 공연을 결정한다. 처음엔 많은 관객 앞에 서기를 꺼렸던 히토리지만, 다른 선배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난 뒤 용기를 얻게 된다. 그렇게 오른 공연 무대엔 예상보다 더 많은 관객의 호응이 따르고 이에 흥분한 히토리는 뜻밖의 기행으로 무대를 마친다. <극장총집편 봇치 더 록! 전편>에 이어서 12부작 TVA <봇치 더 록!>을 재편집한 극장판이다. 원작의 9~12화 주요 부분을 정리했다. 작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축제 시퀀스에 큰 힘을 들였다. 하지만 일상 이야기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적절히 추가된 O.S.T와 합리적인 몽타주 편집으로 인해 TVA 재편집의 별다른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TVA와 조금 다르게 꾸려진 결말 역시 극장판만의 감동을 느끼게 한다.
[리뷰] 이질감 없이 매끄러운 재편집, 이야기는 덜고 음악은 많이, <극장총집편 봇치 더 록!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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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앨범을 내고 홀연히 사라진 싱어송라이터 터커 크로우(에단 호크). 애니(로즈 번)는 그를 광적으로 추종하는 던컨(크리스 오다우드)과 권태로운 생활을 보내는 중이다. 자신보다 록스타가 우선인 남자 친구에 대한 질투였을까. 애니는 던컨이 운영하는 팬카페에 그의 우상을 비판하는 글을 게시한다. 매서운 혹평에도 가식적이지 않은 태도가 마음에 든 터커는 곧바로 인터넷 속 익명의 그녀에게 연락을 건넨다. 15년을 함께한 연인이 바람 피운 사실을 알게 된 여자. 무성한 소문과 달리 알코올중독으로 허송세월을 보낸 남자. 두 사람 사이에 진실한 대화가 오가고 마침내 그들은 런던에서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약속한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산뜻한 템포가 영화를 감싸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위로를 건넨다. 성숙하고 여유로우며 때로는 발칙한 <비포> 삼부작의 대화가 그리운 관객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영화다.
[리뷰]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뒤돌아보는 당신에게, <줄리엣, 네이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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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부산대학교 최초의 페미니즘 축제 ‘마녀들의 카니발’이 개최되기 전. 일찍이 부산을 터로 삼고 여성 권리 신장 운동을 전개해온 선배 마녀들이 있었다. 옛 동지의 부름에 모인 노동운동가 6인은 근로기준법 교육과 사회운동 조직화의 거점이었던 1988년 ‘부산근로여성의집’ 시절을 회상한다. 1세대 여성주의자들의 투쟁은 부산여성장애인연대 설립, 완월동 성 착취 반대 운동, 대학 내 반성폭력 학칙 제정 운동, 청소년 ‘스쿨미투’로 이어지며 40년 부산여성운동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전설의 여공: 시다에서 언니되다>(2011)에서 여성 구술 생애사의 영상화를 시도한 바 있는 박지선 감독이 구술과 채록 기법을 다시 한번 적용했다. 관객이 마음을 주고 따라갈 주인공 격 사건과 인물이 부재하다는 한계가 명확하나 부산, 여성, 그리고 사회운동을 키워드로 엮어낸 주제에 대한 교육적 열망을 일정 부분 충족시킨다.
[리뷰] 가부장제 심은 곳에 페미니스트 난다, <마녀들의 카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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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유명 팝스타의 콘서트장을 찾은 다정한 아버지 쿠퍼(조시 하트넷). 인파 속에서 딸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그는 콘서트장 일대에 배치된 특수부대와 경찰 인력을 보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친근함을 무기로 관계자에 접근해 알아낸 사실은 이 모든 상황이 12명을 토막살해한 연쇄살인마 ‘도살자’를 잡기 위한 덫이라는 것. 쿠퍼가 바로 그 도살자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을 수 없다. 그는 필사의 탈출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연출한 <트랩>의 주인공은 살인마다. 평범한 인물이 수세에 몰렸을 때 느끼는 공포 심리가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 처한 악인이 어떻게 난관을 돌파할지를 보며 관객은 중심인물에 어디까지 공감하고 몰입할지를 시험당한다. 예측할 수 없는 중반의 국면 이후 전개는 여러 번 방향을 뒤튼다. 팝스타와 팔로워, SNS 라이브, 살인마와 프로파일러, 정신분석학과 무의식을 잠식한 환영의 요소가 잘 버무려진 스릴러다.
[리뷰] 정작 자신은 해방시키지 못하는 출구의 아이러니,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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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전쟁 이전의 사이버트론 행성. 변신 능력이 없는 지하 광부 오라이온 팩스(크리스 헴스워스)와 D-16(브라이언 타이리 헨리)은 영웅의 꿈을 꾼다. 존경하는 지도자 센티넬을 돕기 위해 지상으로 향한 둘은 성웅의 추악한 이면을 목격하고 만다. 정의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지와 협력, 또는 힘과 공포다.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신작 애니메이션영화 <트랜스포머 ONE>은 한때 절친한 사이였던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의 과거를 친절하고 직선적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캐릭터의 정체성과 공명하는 스타 배우를 택한 캐스팅 전략이 주효하다. 여기에 80년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매력을 조합한 금속성의 질감 표현, 짜릿한 질주 액션으로 가득한 후반부, 블록버스터 전문가 브라이언 타일러의 음악이 더해져 두터운 생동감과 박진감을 선사한다.
[리뷰] 실사보다 뜨겁게 마찰하고 전도하는 금속성 애니메이션의 열감, <트랜스포머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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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안하무인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통쾌하게 체포한 서도철(황정민)이 9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강력범죄수사대 형사들과 밤낮없이 일하며 자기만의 정의를 계속 실천해나간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 속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건 사람들이 열광하는, 또 다른 정의 ‘해치’다. 해치는 온라인상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사건의 가해자를 찾아가 그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되갚아준 뒤 살인으로 마무리하는 끔찍한 연쇄살인범이다. 반복된 솜방망이 처벌에 불신이 커진 대중은 이 극악무도한 살인자를 두고, 선악을 구별하여 정의를 이루는 전설 속 동물의 이름을 붙였다. 해치를 잡기 위해 막내 형사 박선우(정해인)까지 팀에 합류시킨 서도철은 시원한 성격답게 단서를 빠르게 추적하지만 함정에 빠진 듯 자꾸만 다른 사람을 해치로 오인한다. 한편 <베테랑2>는 서도철의 삶에 더 깊이 관여한다. 서도철의 질주를 자극하기 위해 아내 주연(진경)의 따끔한 한마디를 빌렸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리뷰] 답안지는 여러 개, 윤리와 딜레마를 발판 삼은 동시대적 질문, <베테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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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얼굴에 근육질 몸매, 다정한 성격에다가 의사라는 직업까지. 라일(저스틴 발도니)은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다. 릴리(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서 가까워진다. 하룻밤의 만남으로 끝날 것으로 생각한 인연은 보스턴에서 다시 시작된다. 릴리의 동업자 알리샤의 오빠가 바로 라일이었던 것이다. 둘의 사랑이 불타오를 즈음 릴리는 첫사랑 아틀라스와 재회한다. 이 영화는 <애프터> 등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를 뒤집으며 그 안에 은폐된 젠더 폭력의 속살을 뒤집는 동명 원작의 의의를 계승한다. 맨박스와 남성성에 관한 책을 쓸 만큼 페미니즘에 관한 이슈에 꾸준하게 목소리를 낸 저스틴 발도니가 주연과 감독으로 활약하며 영화에 치밀함을 더했다.
[리뷰] 로맨스 장르 너머의 데이트 폭력을 마주하는 용기, 혹은 길티 플레저, <우리가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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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직군 경험 제도를 통해 변호사로 활동하는 사카마 치즈루(구로키 하루)는 인권변호사 츠키모토 신고(사이토 다쿠미)와 함께 히오미 마을의 환경오염을 조사한다. 오래된 앙숙이자 동료인 이루마 미치오(다케노우치 유타카)도 때마침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다. 그가 맡은 재판의 배경은 방위성이 연관된 이지스함 침몰 사건. 별개인 줄 알았던 두 사건 사이의 연결고리가 서서히 드러난다. 2021년 <후지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이치케이의 까마귀>의 극장판으로, 법대에서 원고석으로 자리를 옮긴 치즈루가 새 시야에서 마주하는 법과 정의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드라마 후속 극장판의 공식을 따르듯 선 굵은 서브 캐릭터와 다단한 반전, 러브라인까지 보강했지만 대부분 전형적인 변주에 머문다. 무엇보다 작중 사건의 혼탁한 인과관계가 진실의 속성에 대한 고찰로 충분히 이어지지 못한다.
[리뷰] 관성으로 돌파하고 여백으로 무마하기, <극장판 이치케이의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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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파트너 자비에(프랑시스 윌리엄 레움)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철학 강사 소피아(마갈리 레핀 블롱도)에게 불현듯 새로운 자극이 찾아왔다. 불같은 사랑의 주인공은 별장 수리를 위해 고용한 인테리어 업자 실뱅(피에르 이브 카디날)이다. 첫 만남부터 뜨거운 사랑을 알려준 실뱅과 오랜 시간 친구처럼 지낸 자비에 사이에서 소피아는 완벽한 사랑의 대상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만약 육체와 정신을 저울에 올린다면, 사랑의 무게추는 과연 어디로 향할까. 모니아 쇼크리의 신작 <사랑의 탐구>는 욕망과 사랑, 육체와 정신의 오랜 난제를 사랑의 좌표 위로 내던진다. 양극단에 놓인 두 남자 사이를 왕복하는 소피아는 유구한 논쟁의 해석적 연구자인 셈이다. 온전한 사랑을 위한 소피아의 질적 연구의 궤적은 극단적인 줌인-줌아웃과 파편적인 프레임 배치를 통해 세세히 그려진다. 제76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됐다.
[리뷰] 사랑의 저울질에 평형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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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강도단의 보스 메이슨(존 트래볼타)은 이제 지쳤다. 사랑하는 아내 아멜리아(크리스틴 데이비스)가 실은 FBI 요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손을 씻고 잠적하려던 그는 동료 숀(루카스 하스)의 손에 이끌려 마지막 금고털이 작전에 합류한다. 그러나 강도단은 FBI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메이슨은 FBI측 협상인으로 나선 아멜리아와 통화하며 플랜 B를 준비한다. ‘암호화폐 지갑을 노리는 강도단의 코믹 액션 케이퍼 무비’라는 문구에서 떠올릴 수 있듯 <캐시 아웃>은 가볍고 날쌘 웃음이라는 담백한 목표를 정조준한다. 피자를 주문하며 건물 밖 저격수의 수를 묻는 메이슨처럼 능청스러운 영화는 쉼 없이 스크린 건너 관객의 입꼬리를 움직이려 한다. 앙상블을 결속하는 존 트래볼타의 관록이 빛난다. 산만한 드론숏과 거친 커팅의 액션 등 단점이 뚜렷함에도 우직하게 주파하는 오프로드 드라이빙의 솔직한 매력이 즐겁다.
[리뷰] 우직한 오프로드 드라이빙의 솔직한 매력, <캐시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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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오빠 부대라는 팬덤을 보유한 한국 최초의 아이돌, 트로트의 황제. 그 어떤 수식어를 써도 올해 데뷔 60주년을 맞이한 남진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빠, 남진>은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최상급 전기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소극장에서 <님과 함께>를 부르는 무대로 시작한다. 악기를 최소한으로 편성한 <님과 함께>의 무대 구성은 인간 남진의 소박함을 반영한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인생은 인연이라고 고백하는 남진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그의 가수 인생이 펼쳐진다. 쟈니 리 등 동료와 음악 평론가의 증언은 한국의 잔혹한 근현대사와 공명하는 남진의 음악과 삶을 입체적으로 되살린다. 특히 암울했던 시기에 대중을 위로했던 슈퍼스타이자, 군부독재의 정치적 외압을 받았던 야인 남진의 삶을 극적으로 과장하기보다 담백하게 따라가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리뷰] 소탈하면서도 웅장한, 거인 남진의 이름에 어울리는 최상급의 헌정 영화, <오빠, 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