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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침묵하지 않는다. 수면 아래 사는 모든 생명이 크고 작은 움직임으로 생동함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역동적인 해양생태계의 소리가 잦아든다면 이는 곧 바다가 다급히 구조 요청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큐멘터리 <씨그널: 바다의 마지막 신호>는 서서히 죽어가는 바다의 위기를 온몸으로 겪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만난다. 스페인의 해양음향학자, 제주도의 해녀, 멕시코의 해양생태공원 관리자, 세이셸의 환경운동가, 호주의 수중 사진사와 인도네시아의 어부까지. 각자가 경험한 위기의 징후는 전부 다르지만 삶의 터전인 바다가 위협받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모두 동일하다. 해양생태계를 담은 수중촬영과 바다의 소리로 구성된 영화는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를 눈과 귀로 체험하게 한다. 3천여명의 그린피스 회원의 후원으로 제작됐다.
[리뷰] 두 귀로 절실히 느껴야 할 공동의 위기, <씨그널: 바다의 마지막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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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를 형제로 둔 범재는 괴롭다. 유명 웹툰 작가 주경(김용지)을 언니로 둔 만년 지망생 단경(김현수)의 처지가 그렇다. 함께 일하던 미술 강사 동료도 데뷔에 성공하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그는 의뢰를 받고 그림을 그리는 커미션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후 낮에는 언니의 도움으로 거장 만화가 진필(남명렬)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밤에는 다크웹에서 커미션을 받는 이중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단경은 자신이 그린 고어물과 닮은 살인사건을 발견한다. 신재민 감독의 <커미션>은 동인 문화에서 만연한 거래 방식인 커미션을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다. 만화계의 문하생 구조와 커미션의 자유도를 대비시키며 재능을 둘러싼 비뚤어진 욕망을 표현한다. 다만 서브컬처를 소재로 삼을 때 자주 겪는 얕은 표현 수위가 실제 문화와 거리감을 조성하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제29회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상영작이다.
[리뷰] 천재 앞에 선 범재처럼 소재에 비해 밋밋하다,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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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로 돌아온 남자 제레미(펠릭스 키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알랭 기로디의 신작은 표면적으론 실종 사건을 다루는 범죄스릴러지만, 실상은 정체된 공동체에 감돌기 시작한 성적 충동이 우스꽝스럽게 재연된 한편의 꿈 같다. 영화는 동네 빵집을 운영하던 남자의 장례식으로 시작해 예기치 못한 또 다른 죽음과 그 이면에 얽힌 욕망을 들춘다. 제레미는 남편의 죽음 이후 혼자 남은 마르틴(카트린 프로)의 집에 머무는데, 그의 아들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은 이를 못마땅해하고 이웃 친구 왈테르와의 관계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미세리코르디아>는 포괄적 의미의 ‘퀴어’ 시네마다운 에너지로 가득하다. 기로디는 폭력과 성적 긴장 사이를 기괴한 유머로 잇고, 돌출적인 사건과 정서를 이보다 더 태연할 수 없는 무표정으로 제시한다. 도덕의 제약을 비껴선 인간의 정동이 자비를 뜻하는 제목과 함께 은밀한 자취를 남기는 영화다.
[리뷰] 욕망과 도덕의 야생에서 솟이난 고귀한 독버섯처럼, <미세리코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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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 다른 모리 코고로 탐정의 활약이 극장판을 장악한다. 지금으로부터 10개월 전, 눈 덮인 숲속에서 한 남자를 좇던 나가노현 야마토 칸스케 경부는 갑작스러운 총상과 함께 눈사태를 맞닥뜨린다. 한편 평온한 저녁을 보내던 모리 코고로는 형사 시절 절친했던 동료 와니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10개월 전 눈사태에 관해 묻던 그는 코고로 가족과 만나기로 하지만, 약속 장소에서 총격을 받아 사망하고 만다. 두 갈래로 나뉘어 질주하는 플롯은 나가노현 형사 3인방과 코난의 두뇌 싸움을 통해 단 하나의 결말을 집요하게 찾아내고 만다. 무엇보다 <명탐정 코난> 특유의 코믹함과 경쾌함을 책임졌던 모리 코고로는 이번 극장판에서 진중하고 냉철한 면모를 쏟아낸다. 그간 본 적 없는 모리 코고로의 진가를 발견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세계관 내 최고 사격수로서의 한끗이 실려 있다.
[리뷰] 당연하게 여겼던 인물이 주인공이 된 순간, 말 못 할 벅차오름,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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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전문 유튜버 레인맨(마미야 쇼타로)은 직장 동료 야나오카(DJ 마쓰나가)에게 2층짜리 주택의 설계도를 건네받는다. 미스터리 마니아 괴짜 건축설계사 쿠리하라(사토 지로)는 그 설계도를 보자마자 집의 구조가 누군가를 납치하고 살인하는 데 적합하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공교롭게도 그 인근에서 토막 난 시체가 발견된 적이 있다. 다음날 레인맨에게 그 집에서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의문의 여성(가와에이 리나)이 다가온다. <이상한 집>은 괴담 유튜버 우케쓰가 유튜브에서 2470만뷰를 달성한 괴담을 바탕으로 쓴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의 완성도는 미흡하다. 모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원작의 스산함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전형적 J호러의 연출을 되풀이한다. 미스터리 장르의 전반부와 <이누가미 일족>풍 스릴러의 후반부 사이의 이음매도 희미하며 비주얼과 설정도 독창적이지 않다.
[리뷰] 그저 ‘무서운 집’을 보고 싶었다, <이상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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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제작자, 양조장 직원, 염부, 재활용 공장노동자, 전파사 주인, 프리랜서, 식당 주인, 사무직 종사자, 육아휴직 중인 여성 등 <일과 날>은 9명의 출연자들의 일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 혹은 실험적인 작업을 꾸준히 해온 박민수, 안건형 감독이 협업한 영화로 수년간의 취재 기록이 담겼다. 유사한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그러하듯 화면 밖의 연출자와 출연자가 대화하는 구도를 취하는 대신 <일과 날>은 출연자의 일터에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이들의 업무를 지켜본다. 이 과정은 원테이크로 촬영됐으며 하나의 숏 안엔 한명의 출연자가 담겼다. 개개인의 내레이션을 통해 업무에 부여된 노고와 일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지만 카메라는 필요 이상으로 대상과의 거리를 좁히진 않는다. 이들의 일터를 바라만 볼 뿐 함부로 판단하진 않겠다는 의도가 읽히는 거리감이다. 대상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개인의 내밀한 고민부터 사회문제까지 아우르는 다큐멘터리다.
[리뷰] 반복된 일과, 어쩌면 인간다움을 느낄 마지막 보루, <일과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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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대륙 한복판에 누군가 빠른 속도로 추락한다. 그는 생애 처음 패배를 맛본 슈퍼맨(데이비드 코렌스웨트)이다. 메타 휴먼의 최강자인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리고자 보라비아와 자한푸르간의 전쟁에 개입해 참패를 맞이한 것이었다. 그의 행동은 본의 아니게 미국을 대표하는 꼴이 된다. 국제관계에 휘말린 슈퍼맨을 눈엣가시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메트로폴리스의 최대 기업인 루터코프를 운영하는 렉스 루터(니컬러스 홀트)다. 그는 슈퍼맨을 악으로 규정하고 미 국방부를 동원하여 그를 통제하려고 나선다. 이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했던 그는 자신의 용병들과 함께 남극에 위치한 슈퍼맨의 비밀 기지에 침투한다. 그곳에서 이들은 슈퍼맨의 부모가 남긴 영상 메시지를 보게 된다. 이들은 이 메시지의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고 충격에 빠진다. 메시지의 내용이 슈퍼맨에게 인간을 도우라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렉스는 방송을 통해 이를 폭로한다. 엄청난 크기의 괴물을 무찌른 후에 이 소식을 접한
[리뷰] 비상과 추락의 몸짓,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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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 등을 거쳐 대표적 비주얼리스트로 자리 잡은 리들리 스콧과 두 여성 무법자의 이야기를 들고 나타난 신인 작가 캘리 쿠리. 이들의 만남이 이토록 오랫동안 영화사에서 회자될 것임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93년 국내에 첫 개봉했던 <델마와 루이스>가 그로부터 30여년 만에 다시 관객을 찾는다. 이제는 여성 서사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델마와 루이스>는 여전히 세심하고도 풍성한 독해를 요청한다. 영화는 델마(지나 데이비스)의 집, 루이스(수전 서랜던)가 일하는 식당에서 시작해 창공을 가르는 선더버드 위의 두 여자로 마무리된다. <델마와 루이스> 는 이토록 상반된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는 여정에 관한 로드무비다. 두 인물이 자리를 바꿔가며 단독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비틀린 서부극이자 관찰과 애정이 뒤섞인 실패한 추격전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친구, 연인, 모녀, 사제 등 다양한
[리뷰] 재개봉 영화 <델마와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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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덥지근한 여름날, 소설가 니콜(산다 코드레아누)과 캠걸 루비(수헤일라 야쿠브)가 사는 아파트에 친구 엘리즈(노에미 메를랑)가 찾아온다. 화목한 저녁 식사 후 발코니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세 친구는 전부터 유심히 보던 맞은편 이웃집 남자의 초대로 흥겨운 밤을 보낸다. 아침이 밝고 그의 집을 다시 찾은 세 친구는 그곳에서 참혹한 시체로 변한 남자를 발견한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배우 노에미 메를랑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으로 호흡을 맞춘 감독 셀린 시아마가 각본에 공동 참여했다. 푹푹 찌는 폭염을 배경으로 그려낸 세 여성의 시체 은닉기는 살갗이 끈적이는 습도를 형상화한다. 이 꿉꿉함의 원천은 공기처럼 떠도는 가부장제와 강간 문화에서 비롯된다. 코믹과 호러를 넘나들며 경쾌하게 질주하는 영화의 직선적인 전개는 미묘한 불쾌감을 겪고 있던 여성들에게 통렬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리뷰] 살갗이 끈적이는 꿉꿉함, <발코니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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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경(한예리)과 수환(김설진)은 각자 파혼한 이후 깊은 슬픔을 견디고 있다. 중증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영경은 결국 국어 교사 일을 그만둔 상태이며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는 수환은 오랫동안 류머티즘을 앓아온 탓에 점점 움직이는 게 힘들어진다. 우연히 지인의 결혼식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사랑에 의지한 채 다가오는 죽음을 견딘다. <푸른 강은 흘러라>에 이어 강미자 감독이 17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권여선 작가의 단편 <봄밤>이 바탕이 됐다. 원작에 비해 간결하고 절제된 연출을 보여주되 인물들의 감정은 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영경과 수환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죽음이 아닌 서로의 부재다. 술에 취해 바닥에 쓰러진 영경과 병으로 인해 걸을 수 없는 수환의 처절한 몸부림은 대사 없이도 상대에게 닿고자 하는 둘의 간절함을 대변한다. 시를 반복해 읊듯 표현된 영경의 대사 또한 행간에 담긴 그의 감정들이 절절히 전해진다.
[리뷰] 오직 당신만이 이해할 나의 공백,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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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아이(진연비)는 대만 명문 제일여고에 입학했지만 학교 얘기가 나오면 움츠러든다. ‘짝퉁’ 소리를 듣는 야간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낮에 자신의 책상을 쓰는 주간반 학생 민(항첩여)과 친해지면서 학교생활에 적응해나간다. 공고하던 둘만의 세계는 머지않아 주야간반 사이의 신경전, 동급생 루커(구이태)를 향한 미묘한 감정이 겹치면서 균열이 생긴다. <우리들의 교복시절>은 10대 남녀가 등장하지만 익숙한 대만 로맨스영화의 길을 걷지 않는다. 삼각관계의 낭만 대신 치열한 입시제도와 수험생의 극심한 스트레스, 가난과 계급 문제, 재난 상황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진지하게 다룬다. 무엇보다 영화는 한 사람의 성장에 주목한다. 엄마의 기대나 사회적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하고 싶은 일을 찾았을 때 얼마나 빠르게,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공들여 묘사한다.
[리뷰] 어여쁜 청춘 연가가 아닌, 날것의 성장통, <우리들의 교복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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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의 공룡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인간-공룡 공존의 시대. 특수임무 요원 조라(스칼릿 조핸슨)는 거대 제약회사 대표 마틴(루퍼트 프렌드)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막대한 성공 보수를 줄 테니 신약 개발에 필요한 거대 공룡들의 유전자를 채취해달라는 것. 신약의 필요성에 공감한 조라는 팀원들과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쥬라기 월드> 트릴로지의 세계관을 잇되 오리지널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피가 진하게 흐른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별점을 가진다. 그러니까 제대로 무섭다. 사지가 굳고 눈물만 흐르는 등 인간이 근원적 공포와 마주했을 때의 신체 반응을 생생히 담아낸다. 친숙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부터 새롭게 등장한 작은 초식공룡 아퀼롭스까지.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공룡들의 향연은 <쥬라기> 시리즈에 기대하는 재미를 고스란히 충족시킨다.
[리뷰] 사육된 공포가 끝나고, 진짜 세계가 입을 벌린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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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입시전형을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지방 소도시 학교에서 전학 절차를 밟는 기준(이재준)은 서울 아닌 그 장소가 영 내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기준의 어머니(고서희)가 담임 선생님과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신발장에 둔 기준의 아디다스 운동화가 사라진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복도를 비추는 CCTV는 고장이 나버려 누가 운동화를 가져갔는지 알 수 없다. 기준만이 느끼고 있던 찜찜함은 운동화가 사라진 이후로 기준의 어머니와 선생님에게도 전염되듯 옮아간다.
장병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여름이 지나가면>은 13살 기준이 전학 간 학교에서 보내는 여름 한철을 담는다. 2017년 첫 단편영화 <맥북이면 다 되지요>로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국내경쟁 대상을 받은 장병기 감독은 2019년 <할머니의 외출>을 연출했다. 첫 번째 장편인 이 영화는 얼핏 보면 소년 시절의 한때를 다룬 성장영화로 보인다. 그러나 성장의 문턱에 선 아이들은 도둑질과 폭력,
[리뷰] 결핍도, 풍요도 모르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여름이 지나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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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7월 국내 최초 개봉 이후 세번의 재개봉을 거듭해왔으니, 벌써 네 번째 재개봉이다. 올해로 35살을 맞이한 영화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그린스크린과 VFX, AI와 XR 등 시각적 기술이 첨단화된 지금, 오히려 단출하고 정직한 고전영화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인 1940년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 사는 토토(살바토레 카시오)는 마을의 유일한 영화관인 시네마 천국을 자주 찾는다. 영화를 다 본 뒤 영사실을 방문하는 게 그의 루틴이다. 하지만 소년을 둘러싼 대부분의 어른은 영화를 향한 그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머니에 따르면 전쟁통에 영화는 사치스럽고, 영사 기사 알프레도(필립 누아레)는 영사 기사가 딱히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한다. <시네마 천국>은 토토의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따라 영화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의 순수한 사랑과 소명을 그린다. 죽음과 고통으로 얼룩진 전쟁의 참극 속에서도, 깊은
[리뷰] 재개봉 영화 <시네마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