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중에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그림이 있다.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글쟁이도 요동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역겨움에 글을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때는 입으로 신체 안의 모든 기관을 다 토해내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본의 아니게 논객 노릇을 한 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그게 아예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토해놓을 지면을 갖고 있다는 게 어찌보면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면을 채우려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때로는 아무 견해없이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다보면 나중에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힘들어진다. 똑같은 글을 소재만 바꿔 고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글쓰기의 영도(零度)
-
택시 속 라디오에선 월드컵 D조에 편성된 앙골라가 사면초가의 입장이라는 축구해설가의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앙골라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한국도….” 택시기사 아저씨는 갑자기 말을 뚝 끊은 채 흘끔 눈치를 봤다. “한국도 16강 진출을 걱정해야 할 입장이죠”라고 말을 받아주자 그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아니 어떤 분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화를 내요. 무슨 매국노 취급을 해요.” 푸념을 하듯 말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에이, 솔직히 난 월드컵 관심없어요.”
차에서 내리며 생각해보니 그 아저씨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 초읽기에 돌입했는데 나 또한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이나 흥분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눈이 벌게라 새벽녘의 유럽 축구 생중계를 보고, 가끔씩 상암경기장에서 FC서울을 응원하며, 게임도 버전 4 때부터 접했던 위닝일레븐 시리즈만 플레이했으니, 축구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이
[오픈칼럼] 월드컵 신기루 유감
-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던 4400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빛과 함께 돌아온다. 수십년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오자 정부에서 조사를 시작한다. 정말로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던 것인지,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인지 등등. 결국 확실한 의도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4400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시작된다. 4400이 위험한 존재라면서 테러를 하는 사람도 나오고, 4400 역시 인간인지라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들도 있다. 어떻게 본다면 <4400>은 낯선 사회에 들어간 타인들에 관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차별과 편견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로. 설정에서 알 수 있듯 <4400>은 일종의 SF스릴러이지만, 의외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도 그런 이유다. 스펙터클한 사건도 거의 없고, 기발한 수수께끼가 연이어 던져지는 것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여운이
[B딱하게 보기] SF가 고발하는 위선적 사회, 드라마 <4400>
-
하나는 열심히 공부해 동경하던 명문 메이린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를 동경한 이유는 오직 하나, 걸어서 3분이면 등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이 유독 많은 하나는 등굣길에 반쯤 졸며 걷다가 차에 치인다. 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부잣집 도련님 이즈미는 오히려 고급차가 망가졌다며 하나에게 하키부에 나오라고 명령하고, 하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남자 하키부의 유일한 여자 부원이자 골키퍼가 된다. 시작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제멋대로 펼쳐지는데, 그게 <극락 청춘 하키부>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하키부라고는 해도 하키를 하는 데 관심이 없는 부잣집 도련님들은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헬키를 타고 놀러가거나 맛있는 음식이나 먹을 뿐이다. 하키부의 홍일점 하나는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여준다는 말에 침을 질질 흘리며 녹아내린다(눈에 커다란 별 모양이 그려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강아지 꼬리와 귀가 돋아나 살랑거리며 애교도 부린다). 현실적이기를 포기했으니 상상은 끝없이 이어진다.
막무가내 코믹 상상, <극락 청춘 하키부>
-
-
7월2일까지 | 소마미술관
회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사건은 사진의 발명과 추상회화의 탄생이다.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데에도 존재의 목적이 있었던 고전시대의 회화는 사진의 탄생으로 변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이후에 캔버스를 들고 밖으로 나가 빛을 머금은 풍경을 그리는 것이 가능했던 인상파 화가들이 색채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야, 작가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는 개인의 내면이나 생각, 정신세계에 붓을 맡기게 된다. 20세기 추상미술의 중요한 작가로 손꼽히는 파울 클레는 실제 존재하는 자연이나 인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배격하고 선과 형태 등 회화적 요소를 통해 삶을 재현했다. 서울올림픽미술관에서 새 단장을 하면서 재개관 전시로 파울 클레를 선택한 소마미술관은 작은 소품들을 포함하여 9천여점의 작품을 남긴 클레의 작품세계를 세 공간에 나누어 조명했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 안내하는 작품들은 비교적 초기작들이다. 풍경이나 인물 등 묘사하는 대상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클레의 느
삶을 보이게 하는 마지막 비밀, <파울 클레전-눈으로 마음으로>
-
이태원 밤마을 어언 10년. 외로운 주말 밤이면 밤마다 노구를 이끌고 황혼에서 새벽까지 밤마을을 다녔다. 친구들은 주말마다 출근도장을 찍는 나를 측은히 여겨서 “체력도 좋다”고 ‘야렸’지만, “체력으로 노냐, 정신력으로 버티지”라고 한번 더 ‘야리’면서 노련한 밤구두는 이태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얼마 전 밤마을 10년 만에 2번째 부킹을 받았다. 단골 ‘딴스홀’에서 웬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저…” 했다. 쭈뼛대는 태도로 미루어 목적이 분명했다. “저… 제 친구가 아저씨 좋아하는데요… 괜찮다고 그래서….” 허걱,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귀에 “아저씨∼ 아저씨∼”라는 말만 울렸다. 부킹을 받은 영광은 상처뿐인 영광으로 남았다. 아니, 아저씨, 아저씨라니! 젊은이가 무심코 던진 돌에 아저씨는 가슴에 멍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괜히 친구따라 강남 갔다 아니 홍대 갔다 봉변을 당했다. 물좋은 10대, 20대 언니오빠들 사이를 헤쳐 요즘 잘나간다는 클럽을 물어물
[이창] 나이가 죄인가요?
-
작가는 예민한 맹수 같은 존재다. 철창 안에 가둬놓으면 며칠 안 가서 죽어버릴 정도로 예민하지만,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을 만났을 때는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존재. 트루먼 카포티가 그랬을 것이다. 1959년 11월, 카포티는 캔자스 홀컴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해사건을 다룬 기사를 읽고 흥미를 느껴, 어린 시절의 친구인 하퍼 리와 함께 취재를 간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존경받는 클러터 일가가 살해된 홀컴 사건을 보자마자, 카포티는 직감했을 것이다. 이 사건이 당대 미국사회의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그 집 식구들은 여기 사람들이 정말로 높이 평가하고 존중하는 가치를 대표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하다니… 그건 마치 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가는 거죠. 두려운 것도 두려운 거지만, 그보다는 좌절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아요.’
<인 콜드 블러드>를 통해 트루먼 카포티를 해명하다
혁명의 6
누구의 진실을 말하는가, <카포티>
-
<모노폴리>를 보고 기시감을 느꼈다. 대한민국 1% 클럽이라…. 앗, 이건 내가 몇년 전 운영했던 바로 그 클럽이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1%의 독특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만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내 주변 친구들을 규합해 만들었던 모임이었다. 몇년 전 <씨네21>에도 내가 고백했던 바, 회사 앞 술집과 홍익대 앞 삼겹살집을 전전하며 세계 평화를 논하던 우리와 비슷한 컨셉의 조직을 영화에서 만나다니 이렇게 반가울 데가….
<모노폴리>의 스타일과 어법 또한 우리 모임과 꽤나 유사한 구석이 많아 혹시 우리 클럽 중 한 멤버가 시나리오를 쓴 게 아닐까 크레딧을 뒤져봤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 컨셉에 딱 맞았던 건 럭셔리를 지향하는 이 영화의 스타일이었다. 절대 은근하지 않고 화끈하게 ‘나 럭셔리야’를 외치는 그 호방함이라니. 1% 클럽의 리더인 존(김성수)의 집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이 만나는 장소마다 번쩍번쩍 부티가
[투덜군 투덜양] 1% 클럽, 이렇게 반가울데가, <모노폴리>
-
만일 당신이 이 글을 노트북으로 읽고 계시다면 www.louvre.fr에 접속한 다음 뜨는 세개의 창 중에 맨 왼쪽에 있는 ‘da Vinch code sound walk’을 클릭하시라. 그러면 장 르노의 음성과 함께 장엄한 사운드트랙이 깔리면서 당신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앞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 그림의 주인공은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우아한 초상화이며, 회화 사상 가장 오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여인이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그 음성에는 몇 가지 비밀이 있다. 그건 이 글을 다 읽은 다음에 알려줄 생각이다.
우선 나쁜 소식.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독후감이라기보다는 다이제스트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만족스럽지도 않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댄 브라운의 소설을 읽지 못했다(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영화와 소설을 비교할 생각이 없으며, 이 글은 전적으로 영화만 보고 난 다음 영
처음부터 다빈치 코드는 없었다, <다빈치 코드>
-
출근시간 지하철역, 무심한 표정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간다. 3주 전 예전 직장을 다닐 때에는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탈 때면 행여 늦을까 마음을 졸이며 발을 재게 놀렸다. 출발 직전인 지하철에 간신히 올라탄 것도 수십 번.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안에서는 사람들의 체온으로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문을 향해 전진할 때면 발을 밟히거나 부대끼기 일쑤였고 조금 스쳤다는 이유로 옆 사람에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가방이나 옷자락이 문틈에 끼는 사고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기분 좋은 날도 있었다. 지하철역이 유난히 한산했던 어느 겨울. 추위에 몸을 떨며 4호선에 올라 신문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이 동작대교를 건너느라 지상으로 솟아올랐다. 창밖에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미몽 간에 어디선가 파도치는 소리를 들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한 파도 소리였다.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갈매기 한 마리 찾았을 리 만무했다. 귓가에
[칼럼있수다] 나만의 파도 소리
-
ME검색 <미션 임파서블3>에서 다리가 폭파되던데 진짜 다리인가요?
웬걸, 진짜 다리겠나.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의 체사피크만 다리가 나오기는 하지만 거기서 다리 폭파시키면 큰일 난다. 폭파장면은 서부 캘리포니아 촬영현장에서 찍은 거다. 베벌리힐스에서 차로 한 시간 떨어진 곳이라는데 두달 동안 체사피크만 다리를 본떠 세트를 제작했다. 제작비 1억5천만달러가 넘는 블록버스터 대작들은 도로나 다리가 필요하면 만드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으로 만드는 것 같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서는 자동차 추격장면을 위해 240만달러를 들여 미국 캘리포니아 앨러미다 해군기지에 3.2km 길이의 고속도로를 만들었는가 하면, <터미네이터3>에서는 추격전에 나오는 한 장면을 위해 1km짜리 4차선 고속도로를 놓았다.
[영화지식검색] <미션 임파서블3>에서 폭파된 다리 진짜인가요?
-
시미즈 다카시 감독이 환생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 <환생>을 들고 왔다. 환생이란 어떤 존재가 죽은 뒤 다른 육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꼭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벌레나 동물, 식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다시 태어나 계속 생을 반복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데, 이는 ‘12연기설’(十二緣起說)로 설명된다. 참된 진실을 알지 못하는 미혹한 중생은 무수한 전생을 통해 축적된 업과 습관에 따라 다른 것과 접촉하고, 좋고 싫다는 판단을 내리고,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피하려 하면서 결국 유(有)하게-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유(有)하려는 욕구 때문에 중생은 다시 태어나, 늙고 병들어 다시 죽게 된다. 불교에서는 환생,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태어난다는 것은 고통의 시작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사(不死)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환생을 일컫는 것이
[배워봅시다] 환생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
<오멘>
1976년 만들어진 <오멘>은 이제 오컬트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사산한 아기 대신 입양되어 대사의 아들로 자라난 적그리스도의 이야기로, 인간세상에 온 악마 데미안의 유년 시절을 그렸다. 어둡고 힘있는 영상이 지구를 멸하러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가는 악마에 대한 묵시록적 공포에 무게를 더했다. 이후 데미안의 소년 시절, 성년과 죽음을 그린 두편의 시리즈가 더 제작되었다. <오멘4>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영화 한편이 더 있지만 이름의 인기를 빌린 아류작이다.
<오멘>
<오멘>의 2006년 버전 리메이크. 옛 영화에서 그레고리 펙과 리 레믹이 맡았던 자리를 리브 슈라이버와 줄리아 스타일스가 이어받아 젊은 대사 부부를 연기한다. 2000년 6번째 해, 6번째 달, 6번째 날, 6번째 시에 개봉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중. 데미안을 따라다니는 검은 개, 데미안의 생일 날 자살하는 유모, 2층 난간에서 떨어지는 대사 부인, 머리
[VS] 악마의 지식
-
<환생>의 영화감독 마쓰무라는 35년 전에 한 호텔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을 영화화하기 위해, 문제의 장소에 가게 된다. 그냥 ‘포기하고 말면’ 될 일일 텐데, 운명적인 이끌림 탓인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신념에 따라 움직이지만, 영화감독도 마찬가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난관을 극복하는 감독들도 있다. 그래서 꼽아봤다. 영화 속의 영화감독 베스트5!
5위는 <시몬>의 빅터 타란스키(알 파치노) 감독. 잘 나갈 때는 아카데미상도 탈 ‘뻔’했으나, 그것도 옛말. 신작에 캐스팅한 여배우가 중도 포기하자, 괴로워하던 그의 손에 우연히 들어온 건 사이버 배우를 만들 수 있는 CD-ROM. 이로써 완벽한 외모의 배우 시몬이 탄생! 그러나 존재하지도 않는 배우를 만들었으니 ‘뻥’이 뻥’을 낳는다. 뒷수습에 허둥지둥, 감독 체면 깎여 5위.
4위는 <인터뷰>의 은석(이정재). 사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그는 미
[Rank by Me] 영화 속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