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가을, 부산 해운대. 영화지에서 마련한 차이밍량 감독과의 대담을 마친 나는 파라다이스 호텔을 나와 혼자 목적지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어. 어제는 ‘감독과 영화 보기’ 팀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영화를 보러갔다가 기요시 감독을 만나 인사까지 나눴는데. 이번엔 영화제 초반부터 운이 좋군. 중얼거리는 동안 호텔 앞 사거리 신호등 앞에 와 섰네. 가만 있자... 내가 어딜 가야 되는 거지? 어젯밤 숙취가 풀리지 않아서인지 선뜻 판단이 안서. 마지막 술자리를 벗어나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커피숖이 막 오픈하기에 진한 모닝 커피를 샀었지. 덕분에 나는 오후에 극장에서 감기는 눈을 뒤집어가며 영화를 보려고 사투를 해야 했어. 나중에 옆자리의 지인이 하는 말. “창피해서 죽을 뻔 했어요!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다구욧!”
대충 이쯤 생각하다보니 내가 당장 별로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어. 아직은 해가 바다에 걸쳐있으니 어두워질 때까지 뭘 하나. 그래. 아픈 속이나 달래자. 아주 큰 결단을 내린 나는 식당들 많은 골목으로 경쾌하게 들어갔어. 하지만 눈앞에 가득 들어오는 식당 간판들 속에서 나는 다시금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는데, 순간 왠지 친숙한 붉은 등이 아른거리며 나를 불렀어. 맞아. 작년에 영화제 폐막식 후에 <여자, 정혜> 팀들이 모여 파티를 했던 오뎅 바잖아. 그런데 이 시간에 오뎅 바? 너무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난 그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어. 역시 홀 안은 텅 비어있었고 단정하게 머리에 두건을 두른 미모의 아주머니가 오뎅 국물을 휘젓고 계시더라구. 난 주삣거리며 - 마치 술을 전혀 못한다는 표정으로 - 바 앞에 서서 뭔가 모티브를 찾고 있었어. 그때 그 미모의 아주머니 왈, 1년 만에 오셨네요?
아주머니는 정확하게 날 기억하고 계셨으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내게 설명해주실 정도였다니까. 하긴 우리가 그날 술을 좀 많이 마셨어야 말이지... 아무튼 난 괜히 오래된 기억의 한 자락을 잡은 것처럼 푸근한 마음이 되어 따끈한 오뎅 국물과 대포 한잔을 시켜놓고 내친 김에 추억에 젖어봤어. 1년 전 2004년의 폐막식 밤, 나와 함께 지지구 볶으며 영화를 완성해서 같이 부산에 내려온 피디, 연출부 그리고 제작부가 이 자리에 엉겨있었지. 빈 술병들이 탁자를 메우고 식은 오뎅 국물이 재탕 삼탕으로 데워지는데, 골목 쪽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토악질 소리도 예전처럼 고통스럽게 들리지 않았어. 술은 역시 기분 좋을 때 마셔야 해. 어느 새 대포 한잔이 비워졌네. 아주머니, 한잔만 더요.
두 번 째 잔. 어디까지 생각했었지? 그래. 기분 좋아서 마셨던 술. 그리고 갑자기 떠오르는 얼굴. 내가 앉아있는 바 테이블 저편 기둥 옆에 이젠 고인이 된 배우 이은주가 있었어. 평소 일면식이 없었던 그녀와 난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잠깐, 아주 잠깐 그녀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 그녀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어. 취기도 오르는데다가 어눌한 내 말주변으로 더 떠들어봐야 좋을 거 없다는 판단을 내린 거지. 어? 대포 잔이 또 비었네. 한잔 더... 하려다가 밖을 보니 서서히 날도 저물어가고해서 난 오뎅 바를 나섰어. 나오면서 아주머니에게 그랬어. 내년에 또 올게요. 난 한결 밝아진 붉은 등을 뒤로 하고 바닷가로 나갔어. 여기저기 밤을 향한 무리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더군. 난 생각했어. 내년에 또 와서 저 오뎅 바를 가볼까? 세 번째에도 영화를 들고 올 수 있을까? (이윤기 감독은 그의 바람처럼 <아주 특별한 손님>으로 올해도 영화제를 찾았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