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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펜상은 한국추리문학상의 최우수 단편 부문 상이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 황금펜상 수상작을 모은 이번 책은 한국 추리문학의 현주소를 알 수 있게 해준다. 2020년 수상작인 황세연의 <흉가>가 가장 먼저 소개된 뒤, 2007년 작품부터 수상한 해 순으로 수록되었다. 황세연, 조동신, 공민철 작가는 두번 수상했다.
이 책에 실린 추리 단편의 매력은 짧은 분량 안에서 반전을 맛보게 해주는 작품들이라는 데 있다. 있을 법한 사건들, 특히 사회면에서 본 뉴스를 연상시키는 이야기들이 뜻밖의 결말을 맞는 순간 느끼게 되는 즐거움이 있다. 박하익의 <무는 남자>(2010)는 단편집 <선암여고 탐정단: 방과 후의 미스터리>의 시작이 된 첫 번째 이야기다. 이후 JTBC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이 시리즈는 여학생들의 팔목을 깨물어 ‘무는 남자’로 알려진 사람과 맞닥뜨리면서 시작된다. 고등학생들이 생활 속 사건을 푸는 내용인가 싶을 무렵 드라마 <SKY
씨네21 추천도서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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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내 부모의 삶을 문장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가 존재하는 걸까. 독립 후 일을 시작하면서 아버지와는 20년 넘게 절연 상태였던 하루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뒤늦은 화해를 하고 그의 죽음 후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가 위인전을 써야 할 만큼 역사적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한 평범한 남자가 역시 평범한 아들을 낳고 살아간 기록, 삶이란 그저 우연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루키는 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중략)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 있을 뿐이 아닐까.”(93쪽)
그 우연이란 이런 것들이다. 하루키의 할아버지인 무라카미 벤시키는 교토의 주지승이었고, 둘째 아들인 지아키도 계승 후보였으나 장남이 절을 이어받았고 지금은 하루키의 사촌이 승계했다. 만약 하루키의 아버지가 절을
씨네21 추천도서 <고양이를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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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안주연 지음 / 창비 펴냄
<우리는 모두 자살 사별자입니다> 고선규 지음 / 창비 펴냄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전치 2주 정도만 다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것이 우울증이었는지, 번아웃이었는지, 둘 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번아웃인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찾아오는 일은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 창비의 ‘내 마음 돌보기’ 시리즈로 출간된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의 도입부를 보면 그렇다. 번아웃은 직업 또는 학업, 작업하는 일과 관련해 굉장한 소진과 냉소, 효능감 저하 등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일이 많고 피로한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상황 개선의 희망이 없고, 통제감을 느낄 수 없으며,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한다고 느낄 때 번아웃이 온다. 두뇌 번아웃과 감정 번아웃 두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고, 과도한 시뮬레이션이 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번아웃의 근본 원인은
씨네21 추천도서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우리는 모두 자살 사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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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는 ‘비대면 시대에 우리가 일하는 방법’이다. 2020년 드라마 속 주인공이 마스크를 챙겨 외출하는 장면을 보는 것마냥 시의적절하게 코로나19 시대의 업무 노하우가 담겨 있어 동시대적 감각으로 읽게 된다. 각기 직업이 다르지만 모두 프리랜서이거나 창작자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12명의 에세이에는 코로나19와 비대면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집순이라 자신을 소개하는 김영글 미술작가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만 있는 것이 괴롭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하다며, “자질이 빼어난 집순이에게, 코로나19 시대가 던져준 비대면의 삶은 그리 어려운 숙제가 아니”라고 성향을 고백하기도 한다. 사실 기술의 발달로 효율성이 높은 비대면 회의, 재택근무 등이 확대될 것이라는 미래 예측은 진작부터 있었다. 게다가 언제 은퇴당할지 모르는 직장에 목매기보다는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게 중시되는 시대다.
이 책의 필자들은 사무실이라는 공간에서 9to6라는 특정 시간에 일하지 않으며, 자
씨네21 추천도서 <매우 혼자인 사람들의 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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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에는 뜻 모를 소리가 종종 등장한다. 제목이 <울음소리>인 단편에서는, 상권 좋은 대형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서 어느 여자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자꾸 들려온다. 너무 애통해서 듣는 이도 흐느끼게 할 읊조림을 곱씹던 ‘나’는 과거 학교에서 온갖 괴롭힘을 받았으나 한번도 받아치지 못하고 참기만 하던 유년 시절의 착한 친구를 떠올린다. <서울 퍼즐-잠수교의 포효하는 남자>에는 관광객으로 가득한 분수대에 불쑥 나타나 팔을 위로 뻗은 채 포효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나’는 그 괴상한 소리 덩어리를 들으며 오지로 떠나 소수민족의 언어를 채집하던 동생을 생각한다.
2020년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 단편 <소유의 문법>에도 자폐성 발달장애를 앓아 느닷없이 몇분이고 고함치기를 하다 쓰러지는 아이가 등장한다. 울음과 고함을 터트리는 일상의 이질적 존재를 우리는 곁에 두기도 하고, 혹은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인생이
씨네21 추천도서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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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수녀원에 가게 된 가난한 소녀가 전세계를 주름잡는 디자이너가 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환영할 것이다. 거듭된 출산과 육아로 건강을 해쳐 죽은 어머니 앞에서 ‘돈이 자유’임을 뼈아프게 깨달았다는 사연도. 외진 시골 출신의 샤넬은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한다. 노래와 춤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재빨리 의상 디자인으로 방향을 틀었고, 부유한 상류층 애인들과 어울리며 러시아에서 망명한 예술문화계 인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승마복, 요트 선원의 옷 등 전통적인 남성 분야의 의상이 샤넬의 손을 거쳐 여성의 의상에 도입되었고, 1920년대 ‘신여성’ 출현과 맞물려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렇게 샤넬은 스스로 브랜드가 되었다.
‘샤넬 넘버5’라는 향수의 이름처럼. 초창기 샤넬의 성공담에는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이야기적 쾌감이 있다. 유명 인사가 된 샤넬이 기댈 곳 없었던 불우한 유년 시절에 대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삭
씨네21 추천도서 <코코 샤넬: 세기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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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송년회와 연말을 결산하는 떠들썩한 행사들 대신 차분하게 한해를 돌아보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이 시기를 함께할 좋은 친구는 아마도 책이 아닐까. 책을 펴면 때로 다른 시간으로, 아주 먼 장소로 바로 떠날 수 있다. 부디 안전하고 건강하게, 책과 함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연말을 보내시기를.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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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의 액톨로지 시리즈 1권 <배우 이병헌>이 출간되었다. 지금까지 배우 이병헌의 커리어를 총망라한 책이다. 이병헌과의 인터뷰는 물론, 그와 협업한 업계(방송, 광고, 영화 등) 관계자들과의 폭넓은 인터뷰가 이 책을 만들었다.
연기한 주요 캐릭터에 대한 분석은 이병헌이 출연한 영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송강호, 전도연 배우와의 협업이나 김지운, 이주영 감독과 정두홍 무술감독, 손석우 BH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간의 이병헌을 말한다면, ‘Analysis’ 페이지는 이병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숫자 정보를 망라한다. 박스오피스 성적, 출연한 드라마의 TV 시청률, 광고 이미지 등에 대한 분석글이 이어진다. 백은하 배우연구자가 진행한 긴 인터뷰는 이병헌 배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귀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백은하배우연구소는 2019년부터 다음 세대 배우들을 매해 선정하는 ‘넥스트 액터’ 시리즈를 시작해 박정민, 고아성 배우에 대한 책을 펴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배우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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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만들기의 모든 것1, 2>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지음 / 이룸북 펴냄
<트라우마 사전>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지음 / 윌북 펴냄
최근 출판계에서 중요해 보이는 흐름 하나는 작법서 출간이다. 글쓰기 책의 인기야 꾸준했지만, 단순히 글쓰기가 아니라 웹툰과 웹소설, OTT 시리즈 등의 스토리를 위한 작법서 말이다. 디지털 플랫폼을 위한 작법서는 강조하는 포인트가 아예 다르다. 문장보다 캐릭터가 압도적인 중요도로 언급되며, 작법서라고는 하지만 많은 경우 설정집, 자료집, 키워드 모음집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책의 제목과 부제들만 살펴봐도 이런 경향은 쉽게 알 수 있다. 낸시 크레스의 <넷플릭스처럼 쓴다: SF·판타지·공포·서스펜스>, 댄 코볼트의 <장르 작가를 위한 과학 가이드: 과학적 진실성을 갖춘 SF, 판타지, 기타 장르소설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보라. 안젤라 애커만과 베카 푸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캐릭터 만들기의 모든 것1, 2> <트라우마 사전>, 생생한 캐릭터 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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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는 책을 읽는 어른들에게,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자고 말한다.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했고, 독서교실을 운영하며 아동·청소년들과 함께 책을 읽어온 김소영 작가는 어린이를 독서교실의 고객으로 응대하는 데 진심이고, 그 진심의 일환으로 어린이 고객들의 속내를 섣불리 짐작하는 대신 그들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존중이고 대화다. “책은 내가 어린이보다 많이 읽었을 텐데, 어떻게 된 게 매번 어린이한테 배운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린이라는 ‘타자’를 대하는 법에 대해 머리를 맞댄다. 머리는 어른끼리가 아니라 어린이와 어른이 맞대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누구나’ ‘한때’ 어린이였다는 사실에 있다. 어떤 어른은 자신이 애정으로 돌봄받지 못한 데 대해 세상 모든 어린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고, 어떤 어른은 여전히 자기 안의 어린이를 이해받고자 애를 쓰는 듯 보인다. 또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어린이라는 세계>,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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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병석에 있는 사람이, 부모의 병세를 기록한 책을 꺼내 드는 것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다. 처음부터 울 준비를 하고 (코를 아무리 풀어도 살이 짓무르지 않는 보드라운 각 티슈 상비) 독서를 시작했다. <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말기암 판정 후 1년간 와병 생활을 한 어머니의 마지막을 인문학자 아들이 기록한 책이다.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저하증을 진단받은 저자의 어머니는 호스피스 병동 여러 곳을 전전했고, 저자는 1년 동안 휴업하고 간병인이자 관찰자로서 어머니의 ‘말’들을 채집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향정신성 약물을 투여받고 정신이 맑지 않았던 어머니의 말들은 대부분 혼몽하고 정체가 불명하다. 짤막한 한두줄에 그치는 어머니의 발화를 아들이 길게 풀어서 해석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병석에서 툭툭 하는 어머니의 말들은 맥락은 없지만 의미가 없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어머니의 생과 결부하여 독해하면 된다. 환자를 간병해본 사람은 환자의 말
씨네21 추천도서 <엄마의 마지막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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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 선술집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두명의 피해자는 서로 접점이 없어 보이는 수의사와 폐기물 처리업자. 범인이 어설픈 영어로 “머니, 머니”를 외쳤다는 목격자 증언에 따라 이 사건은 외국인에 의한 강도 살인으로 단정되어 초동수사가 진행되고 이내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주위로부터 탐문 수사, 신변 조사의 달인, 사냥개 같은 형사라는 평가를 받는 경시청 수사1과 다가와에게 이 사건이 재배속된다. 수사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 형사지만 승진하기보다는 현장에 남아 미해결 사건을 전담하는 계속수사반에서 일하는 다가와는 늘 하던 대로 상점가를 발로 뛰며 탐문 수사에 임한다. 한편 지방 상권을 잠식하고 정재계를 이용해 몸집을 불려 경제 생태계를 망가트리는 대형 쇼핑몰 옥스마트의 비리를 조사하는 쓰루타 기자의 에피소드 역시 살인 사건과는 다른 방면에서 전개된다.
이렇게 형사의 살인 사건, 기자의 산업 비리라는 서로 다른 사건이 별도의 것처럼 전개되지만 ‘소’라는 접점을 만나며 두 이야기는 새
씨네21 추천도서 <비틀거리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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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만한 날들을 위해>에는 정신과를 다니며 우울증약을 처방받는 한편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주부로서 언제나 빈틈없이 일했고 남들 앞에서는 모자람 없어 보이는 신도시의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의 잦은 외도와 원정 성매매로 내면이 망가진 상태다. 운전은 그런 그녀가 제 삶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은 수단이다.
박완서 작가의 기념비적 단편 <꿈꾸는 인큐베이터>에서도 운전이 여성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비추는 도구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으리라. <꿈꾸는 인큐베이터>와 <기만한 날들을 위해> 사이에는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기혼 여성의 삶은 여전히 답답해 숨이 턱 막힌다. 아마도 중산층 4인 가족으로 대표되는 신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같지는 않다. 기혼 여성의 변화를 촉구하는 존재로, 딸이 대표하는 젊은 여성 세대가 새롭게 등장했다.
씨네21 추천도서 <잃어버린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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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체 인구의 대다수가 사는 동안 어느 시점에는 폭력적인 범죄를 경험한다.” 이 문장은 미국에만 해당되지 않기에 <몸은 기억한다-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개정판)은 놓칠 수 없는 책이다. 외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와 정보를 담고 있는 이 고전은, 트라우마가 하나의 정신 질환으로 인정받기까지의 지난한 역사적 과정부터 트라우마와 뇌 및 신체가 실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과학적 근거를 설명하며, 약물 말고 어떤 대안적 치료가 있는지 살핀다.
뇌의 화재경보기 역할을 하는 편도체는 위협을 먼저 감지하여 스트레스 호르몬 시스템을 가동한다. 한편 전두엽은 감시탑 역할을 한다. 위협이 실제로 위험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생하면 편도체는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지 못하며, 전두엽과의 균형이 깨진다. 또 감각을 인지하는 뇌 영역의 활동이 정지되기도 한다. 그 결과 외상에 시달리는 환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맞서 방어를 취하는 상태로
씨네21 추천도서 <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