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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말하길 바야흐로 천하가 어지러워졌으니 아무래도 학문할 여가가 없을 듯하다고 했다. 이 말에, <채근담>에 나오는 말을 육세의의 <청유학안>에서 재인용해 답을 한다. “천하는 저절로 어지러워졌지만, 내 마음은 내 스스로 다잡는다. 사람은 세상에 난리가 나면 스스로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다고 말하면서, 혹은 할 일이 없음에 비분강개하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거나 혹은 미친 척하면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기는데, 이는 모두가 중용을 행하는 방도가 아니다.”
2월에는, 3월에는 나아지겠지 믿었다. 3월이 되니 4월 기약이 없고, 4월이 되니 상반기를 포기하게 된다. 코로나19 시대에 어떻게 살면 좋을까. 그나마 ‘하던 대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재택근무와 가정학습을 통해 모두가 알아간다. 세상의 돈은 많은 경우 사람들이 직접 만나야 돌고 도는 것이었다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확고하게 알게 된다.
중국의 출판사인 상무인서관에서 40여년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학문에 관하여>, 나아갈 바를 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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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내 감정’인데도, 그것은 오로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롯한,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일 때가 있다. 나는 리뷰 쓰기 수업을 할 때 ‘재미있다’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할 때가 있는데, 너무 많은 감정을 ‘재미있다’로 뭉뚱그려서다. 카체이싱 장면이 정말 도로 위에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든가, 보는 나도 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것 같다든가,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든가 하는 말을 구체적으로 하기 어려울 때, SNS에는 ‘헐 대박’, ‘존잼’ 이라고 적는다. 그 재미있음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사회에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 속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종종 실제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덮어버리거나 무시하며 살고 있다. <한겨레> 기자였던 김소민의 에세이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와 비평가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은 둔해지다 못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버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다소 곤란한 감정>, 감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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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잊히지 않는다. 다만 재해석될 뿐이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이 100권 출간을 기념해 5종의 책을 리커버해 선보였다. 워크룸의 디자인으로 갈아입은 표지가, 언제나 새롭게, 동시대성으로 읽히는 5종의 클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권의 책은, 을유세계문학전집에서만 볼 수 있는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 D. H. 로런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과,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안톤 체호프의 <체호프 희곡선>이다.
세계문학전집마다 개성이 있지만, 이번에 리커버로 선보인 책 중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은 고뇌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절창. 오에 겐자부로의 큰아들 히카리가 뇌 이상으로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탓에 버드가 결혼한 나이와 아이를 갖게 된 나이, 갓 태어난 아들의 뇌 이상
씨네21 추천도서 <을유세계문학전집 리커버 에디션 (한정판 5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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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문학인가? 그렇다. SF는 과학인가? 적어도 나는 확답을 못하겠다.” 한국 SF소설계에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배명훈이 처음으로 펴내는 에세이 <SF 작가입니다>가 출간되었다. 소설가 배명훈에게 영문을 모를 수사(‘발칙한 상상력’, ‘경계를 넘나드는’)를 붙이거나 헛다리 짚는 질문을 던진 적 있는 인터뷰어이자 책 리뷰어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은 나는, 이 책이 나와서 정말 반갑고 감사하다고 느낀다. SF를 창작하며, 오랫동안 ‘SF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반복해 답하며 살아왔을 배명훈 작가는, <SF 작가입니다>에서 여러 경험을 들려준다. 그간 발표한 소설들을 슬쩍슬쩍 홍보하기를 잊지 않으며, 소설이 현실이 된 사례들이나 함께 창작하는 동료들을 응원하며 노력하기 등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 SF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일단 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도궁금한 게 있다면 그때 질문해도 좋을 정도다.
일확
씨네21 추천도서 <SF 작가입니다>,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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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봄>의 원제는 ‘この世の春’로, ‘이승의 봄’이라고도 옮길 수 있다. 제목부터 어딘가 아련한 느낌이라는 뉘앙스를 전달받았다면, 이 소설의 분위기를 잘 떠올릴 수 있을 것. 일본 미스터리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가 데뷔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세상의 봄>에는 장점과 단점이 하나씩 있다. 장점은 정말 재미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일본 시대물이라서 신분이나 지명, 의복 등에 관련된 명사들이 익숙해지기 전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점이다. 기타미 번 6대 번주 기타미 시게오키가 26살의 나이에 중병으로 은거한다. 심지어 가신이 강제로 주군을 은거시키는 형태의 연금이다. 이혼하고 본가로 돌아온 다키는 아무래도 건강이 아닌 이유로 보이는 시게오키의 은거에 관심이 많다. 시게오키는 번주의 별저인 고코인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다키 역시 그곳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할복해 죽었다던 인물이 멀쩡하게 살아 있으며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쿠리야 일족의 미타마
씨네21 추천도서 <세상의 봄> 上·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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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로에서 지진의 흔적을 봤다. 금이 쩍 가고 주변이 울퉁불퉁 일그러진 모습. 아스팔트며 시멘트, 금속 같은 건 지구 껍데기의 일렁임 한번에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부림지구 벙커X>는 대지진이 일어나 완전히 부서져버린 부림지구라는 동네와 벙커를 떠나지 않는 이재민 이야기다.
숲속 철근 덩어리로 감춰진 벙커 속에는 지진 생존자 10명이 산다. 짐작건대 행정 당국에선 부림지구 지진 생존자들이 오염된 상태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몸에 생체칩을 이식해서 당국의 감시를 받거나, 아니면 축축하고 답답한 벙커에 숨어있다 가끔 거리로 나가 생필품을 구해 사는 수밖에 없다. 벙커에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느닷없이 연기를 펼치곤 하는 청소년 혜나도 있고, 프랑스산 홍차와 쿠키를 그리워하는 우아한 노인 부부도 있고, 생활력이 강해 라면을 구해오고 자가전력기를 만드는 대장도 있다. 이들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벙커의 일상을 함께하는 한편,
씨네21 추천도서 <부림지구 벙커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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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며 지역이 봉쇄되는 일이 더이상 낯설지 않은 지금,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고전소설 목록에서 내려와 지금 이 시대를 말하는 소설이 된다. 194X년 알제리 해안에 있는 작은 도시 오랑에 중세를 뒤흔든 페스트가 돌아온다. 죽은 쥐 시체가 길바닥에 널리더니 이내 사람들이 피고름을 쏟아내고 구토와 고열에 시달리다 죽어간다.
“사실 재앙은 모두가 다 겪는 것인데도, 그것이 자기에게 닥치면 여간해서는 믿지 못하게 된다.” <페스트>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일상 자체가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세상의 풍경이 숨 막히도록 진득하게 펼쳐진다. 도시 전체가 격리되자 시민들은 마치 유배 생활을 하는 양 현재를 잃고 과거만을 반복적으로 회상하며 고독을 느낀다. 호텔은 텅텅 비고, 필름을 외부에서 받지 못하는 영화관은 같은 영화만 계속 틀어준다. 사람들은 출근을 할 때면 서로 등을 돌리고, 식당에 가면 식기를 꼼꼼히 소독하며, 여름이 와도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감정이 메말라 마
씨네21 추천도서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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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착실히 오는 중인데, 도무지 집 밖의 따뜻함을 즐기기 어려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실내 생활자들을 위해 책 5종을 소개한다. 말이 5종이지 총 11권에 달하는 책의 목록은, 요즘의 세상사를 떠올리게 하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로 시작해, 리커버로 다시 선보이는 을유세계문학전집 소설 5권,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배명훈의 연작소설집 <타워>와 에세이집 <SF 작가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세상의 봄>과 소설가 강영숙의 <부림지구 벙커X>다. 봄이 찾아온 창문을 열고,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3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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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유명한 여성으로 죽었다 자신의 상처를/ 부인하면서/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힘과 똑같은 근원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하면서.” 에이드리언 리치가 1974년 발표한 시 <힘>의 마지막 행이다. 이 시는 마리 퀴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또한 여성의 삶이 처한 문제를 뜻하는 것으로 읽힌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은 1974년부터 1977년까지 발표된 시를 묶은 것으로, 여성이라는 “생존자들”을 호명하는 작업이다. “나는 살면서 삶 이상을 원하며/ 굶주리는 다른 사람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나의 의지, 나의 사랑 속으로,/ 정신의 폭력주의자들의 십자 포화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딸과 자매들, 연인들의 뇌 속으로, 뚫고 들어온 헐벗음에/ 이름 지어 주고 싶다.”(<굶주림(오드리 로드에게)>) 아주 오랫동안,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는 페미니즘 그 자체로 이야기되고 있다. <공통 언어를 향한 꿈>은 특정 작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공통 언어를 향한 꿈>, 생존자 여성에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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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도 살인하는 공상을 한다. 연구자들은 살인에 대한 공상을 ‘살인관념’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정상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남성 중 79%, 여성 중 58%가 살인 공상을 해본 적이 있는데, “남성은 잘 모르는 사람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많이 한 반면 여성은 가족을 죽이는 상상을 더 많이 했다”. 살인 공상은 추상적 사고와 가상의 계획이 가능한 인간의 능력이 만든 부산물로, 머릿속 예행연습을 통해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거나 그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원치 않음을 알게 되는 사고실험이며, 결국은 살인을 막는 효과를 갖는다.
심리학자로 특히 범죄심리에 대한 연구를 해온 줄리아 쇼는 <우리 안의 악마>라는 책에서,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다룬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뿐 누구나 생각해보았을 법한 끔찍한 공상이 있었을 것이다. 분노에 휩싸여 상상했던 어떤 장면들, 혹은 이룰 생각을 하지 못했던 성적 판타지.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우리 안의 악마>, 악을 말할 때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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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게 문제입니다.” 어도비의 커뮤니티 부문 부사장이자 핀터레스트, 우버 등 여러 기업의 투자자이자 자문가라는 스콧 벨스키의 한결같은 주문이라고 한다. 아이디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과 달리, 나 역시 이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이디어는 실현 불가능하다면 (거의) 아무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환경 탓을 하기 시작한다. 회의만 많고 발전이 없는 조직의 모든 구성원은 이런 ‘남 탓’에 능하다. 댄 애리얼리, 그레첸 루빈, 세스 고딘을 비롯한 베스트셀러 저자들의 글을 모은 <루틴의 힘>은 환경에 매달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방법론으로서의 루틴을 손보자는 제안을 담았다. 생각하며 일하지 않으면 일하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많은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자기 계발의 논리이기는 하지만,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루틴의 힘>, 시간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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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룬다티 로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사회운동가라는 맥락에서 언급되었다. <자본주의: 유령 이야기>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고, <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는 인도의 정치 상황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아룬다티 로이는 소설가이면서 르포르타주를 쓰는 논픽션 작가였고, 사회운동가였다. 2014년 <타임>에서 아룬다티 로이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한 일은 놀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7년에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지복의 성자>. 도입부는,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사랑하게 된 이유인 동물과 식물이 가득한 공간에 우리를 부려놓는다.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새벽이면 까마귀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박쥐들을 맞이했다. 해질녘엔 반대로 했다. 새벽과 저녁 사이엔 그녀의 높은 가지들에 흐릿한 형태
씨네21 추천도서 <지복의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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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사람의 소지품을 형사들이 살핀다. 세탁소 영수증, 회중시계, 다양한 동전으로 총 75센트가 있다. 희생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고, 지문 감식으로 신원을 확인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형사들은 회중시계를 보며 나이가 많은 사람일지 모르겠다고 추론한다. 시계를 열어보자 이상한 점이 있다. “3시14분에 멈춰 있는데? 사고 시각이 아니잖아.”사건 현장에 불려나온 샘은 궁금해하던 것을 시체 주머니에 있던 노트에서 알아낸다. “안녕하신가, 친구여. 나는 도둑이자 살인자이자 납치범이라네”로 시작하는 일종의 기나긴 편지. 시체의 정체는 연쇄살인마였다.
<네 번째 원숭이>는 ‘네 마리 원숭이 킬러’(줄여서 4MK)라고 불리는 연쇄살인범의 편지와 그를 5년간 추적해온 시카고 경찰국의 4MK전담반 형사 샘 포터를 비롯한 수사진의 상황을 번갈아 보여준다. 연쇄살인마 4MK는 희생자의 귀, 눈, 혀를 적출해 가족에게 보내며 마지막에는 시체를 공공장소에 전시한다.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한
씨네21 추천도서 <네 번째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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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떠나온다는 것은 많은 경우 그곳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장소와 주변의 사람이 바뀌면 ‘나’라는 존재도 바뀐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니까, 가끔 스스로의 변화를 잘 모른다. 그러다 그 장소, 그 사람을 만나면서 시간을 되돌리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금희의 <천진 시절>은 그런 소설이다. 주인공 이름은 상아다. 상아라는 이름은 중국 신화에서 온 이름이다. 상아는 명사수 후예의 아내로, 혼자 불사약을 먹고 남편을 떠나 영생을 얻었다. <천진 시절> 속 상아는 운명적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고, 불사약 같은 것은 얻지도 못한다. 상아는 그저 집에서, 고향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기 위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무군을 따라나선다. 부모님은 상아를 그냥 남자와 떠나게 두지 못해 약혼을 시키고, 약혼자와 함께 타지인 천진에 도착하니 일자리를 소개해준 무군의 누나는 둘을 위해 침대 하나짜리 방을 얻어놓았다.
씨네21 추천도서 <천진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