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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과 함께 2019년 부커상을 수상했다. 부커상을 수상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한국에 소개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거나, 높은 확률로 아예 소개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 이 소설은, 2020년 즈음의 페미니즘을 ‘하나의 목소리’로 부르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페미니즘에도 주류와 비주류의 목소리가 존재하며, 여성이라고 모두 의견을 같이하지는 않으며, 때로 갈등하고 마찰한다. 흔히 페미니즘을 명명하고 운동을 시작하고 책(지금은 고전이라고 불리는)을 쓴 백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주목받았다면, 버나딘 에바리스토는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범주로 부차적으로 언급되던(페미니즘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비백인들의 페미니즘은 말미에 큰 흐름만 언급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삶과 목소리를 담아낸다.
여러 연령대의 흑인 여성의 삶을 중첩시키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씨네21 추천도서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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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아시는지. 연말연시를 맞이해 독자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좋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5권의 책 중 당신의 마음에 드는 책은 무엇인가.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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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저자 소개에 따르면 “문학적 사유와 인문적 정수로” 마흔 권의 책을 출간한 전경일의 관심사는 역사와 여행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마릴린 먼로가 등장한다는 <마릴린과 두 남자>, 루벤스 그림에 얽힌 사건을 풀어간다는 <조선남자>, 문익점과 토요타 자동차의 연관 관계를 밝혀냈다는 <더 씨드, 문익점의 목화씨는 어떻게 토요타 자동차가 되었을까?>를 비롯해 한국 남자의 판타지에 특히 관심을 갖고 책을 출판해온 것으로 보이는 전경일의 신간 <백 만년 동안 내리는 비> 역시 세계사 속 한국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쿠바 혁명의 주역으로 체 게바라와 친구가 된 한 남자. 그의 음악적 재능, 20세기 초 남미 대륙에 정착한 꼬레아노 후손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사랑과 혁명을 배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간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백 만년 동안 내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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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를 보도하는 언론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한국에서는 성범죄를 보도할 때 두손을 늑대처럼 앞으로 치켜든 성인 남자의 그림자가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피해자 위로 드리워진 모습을 수시로 새롭게 그려내곤 한다.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초점을 맞춘 선정적인 묘사도 드물지 않다. 읽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라는 좋은 핑계가 있기 때문에, 정보를 정확하게, 가해자에 초점을 맞춰 보도하라는 요구는 쉽게 무시된다. ‘166년간의 범죄 보도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뉴욕타임스 크라임>은 <뉴욕타임스>의 사건사고 보도 기사 중 사회적 파장이 컸던 글을 중심으로 암살, 강도, 납치, 대량 학살, 조직 폭력, 살인, 교도소, 연쇄 살인범, 성범죄 등을 다룬 글을 모은 책이다. 범죄라는 필터로 본 미국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변하지 않았는지를 보여주는 대기록이라는 점이 흥미를 끈다.
166년이나 되다 보니 링컨 대통령 사망 보도는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알리는지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뉴욕타임스 크라임> <성공할 사주 실패할 팔자>, 현대의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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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기술이 발달하기 전의 편지를 쓰는 목적을 크게 둘로 나누면 이렇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사랑에는 부모, 자식,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모두 포함되는 법이고, 일이라고 했을 때는 최초 발상부터 진척 상황, 곤란을 겪거나 좌초하는 일까지를 아우르게 되니, 알려진 인물(특히 창작자)이 남긴 편지들은 그래서 귀한 기록이 된다.
플로베르의 서한집에서는 <보바리 부인>을 얼마나 공들여 쓰고 고쳤는지에 대한 생생한 고백을 만날 수 있다. 아서 코넌 도일 서한집에서는 <바스커빌 가문의 개>의 발상을 얻고 취재를 위해 여행을 다녀온 경위를 알 수 있다. 동시에, 편지들은 훌륭한 작품 뒤의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니, 서한집이 작가 사후에 편찬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번에 나란히 출간된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은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들이 쓴 편지글을 모은 책들이다.
두 작가가 쓴 작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다자이 오사무 서한집>, 친애하는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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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방청이 취미예요.” 영화라도 보는 기분으로 재판 방청을 다니던 어느 여자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교도관으로 일하게 된 그는 출근 전에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시 재판 방청을 갔다가 다나카 유키노 사건을 접한다. 연립주택 화재 사건. 불에 탄 시신 세구가 나왔다. 임신 중이었던 이노우에 미카와 그의 쌍둥이 딸이 사망했다. 당일 저녁 체포된 사람이 바로 다나카 유키노였다. 애인이 변심해 새로 가정을 꾸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재판 과정을 통해 과거사가 천천히 끌려나온다.
<무죄의 죄>는 다나카 유키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방화 사건의 진상을 보여준다. 책을 읽는 사람은 사건의 가장 바깥쪽에 존재하는, 사건과 무관한 사람이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사건에 대한 정보로 시작해 점점 사건 관련한 내밀한 이야기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무죄의 죄>는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고, 독자와 서점 관계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2017년에 ‘역주행’
씨네21 추천도서 <무죄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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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코로나19가 퍼지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진 것 같다. 아이들이 학교에 매일 가지 않는 일상이 자연스럽고, 마스크와 거리두기가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떠밀리듯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면, 인류 자체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서 몇 천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의 이야기를 읽는 건 어떨까. 듀나 작가의 단편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은 바다를 떠다니는 거대군집 고래 위에서 생활하며 지구를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그린다. 그곳에서도 전염병은 돌고, 사람들은 격리당하는 가운데 탈출을 꿈꾼다. SF 앤솔러지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는 ‘우리에겐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살펴보는 일이 무척 필요하고 또 어느 정도 가능해진 만큼 적절한 시점에 출간된 책이다. 2020년의 세상이 흔들리는 모습을 피부로 감지하듯 가까이 관찰하는 단편들이 있는가 하면 초월적인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단편도 있다. 정소연 작가
씨네21 추천도서 <팬데믹:여섯 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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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돈 편집부의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은 책의 크기며 무게부터 인상적이다. ‘1490~1990년생 예술가들이 빚은 찬란한 500년의 역사’를 담았다는 소개에 걸맞게 크고 묵직하다. 한장 한장 넘기다보면 400여명의 여성 작가들 작품에 어떤 공통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부터 추상표현주의까지 성 정체성과 인종에 대한 탐구부터 개념미술과 환경설치미술까지 사실상 미술사의 모든 주제가 담겨 있다.
오히려 공통점이 있다면, 여성 작가들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교육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던 시절, 그림을 배워 작업하는 기회를 가지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콩스탕스 마리 샤르팡티에는 신고전주의 예술가 자크 루이 다비드 등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그녀의 훌륭한 회화는 다비드의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1915년생 엘리자베스 캐틀렛은 카네기 공과대학의 우수 장학금 수여자로 선정되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취소당했다. 현대로 오면, 한참 활동
씨네21 추천도서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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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해빠진 부르주아 니그로 부부는 아니다, 라고 로이는 설명하지만 이 부부에게 유성이 날아와 삶을 산산조각 내기 전까지 사실 이들은 그런 삶을 기대하는 흑인 부부였다. 남편 로이는 직장에서 나름 정력적으로 일하며 매해 연봉 상승을 기대하는 미래가 창창한 남자였고, 아내 셀레스철은 손바느질로 만든 고급 인형이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는 아티스트다. 인종차별으로 인한 갈등보다는 생각 차이로 인한 잦은 말다툼과 고부 갈등이 일상에서 가장 큰 고민이었던 날도 있었다. 결혼 1년차, 로이의 부모님을 방문한 이들은 밤이 깊어 근처 호텔에 묵고 다투게 된다.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로이의 느닷없는 고백에 셀레스철은 배신감을 느낀다. 다툼 후 잠시 방 밖으로 나온 로이는 몸이 불편한 중년 여성을 도와주게 되고, 그 선의가 부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로이는 강간 혐의를 받게 되고, 피해자 지목으로 법정에서 12년을 선고받는다. 로이는 흑인이었고,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씨네21 추천도서 <미국식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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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를 묻는다는 뜻이기도 한 ‘문안’동은 10년 전 재개발이 이뤄져 아파트가 몇채 들어서고, 재개발에 포함이 안된 아랫동네는 다세대주택과 상점, 쪽방촌이 어지럽게 뒤섞인… 특수하다면 특수하고 흔하다면 흔한 동네다. <안녕 커뮤니티>는 시아버지에게 은근슬쩍 반말을 하는 필리핀 며느리와 괴팍해 보이지만 정감 가는 덕수 영감, 세봉김밥의 세봉 여사, 아파트 사는 김경욱 여사와 권위적인 그의 남편, 폐지를 줍는 미스터리한 분례씨 등등 골목의 주민들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30년 지기 노인들이 물고 뜯으며 싸우는 신명 나는 도입부는 사진관 박씨가 고독사하는 장면에서야 묵직한 본색을 드러낸다. 죽을 때 죽더라도 혼자 외롭지 않게 서로 안부를 챙겨주자며 덕수 영감이 ‘문안동 연락망’을 만들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냉정한 도시에서 안부를 챙기는 따뜻한 공동체의 이야기, 라고 설명하면 이 만화에 대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개다. 덕수 영감은 “밖에서 보믄 우리가 서로 애껴주고 보듬어주고 무
씨네21 추천도서 <안녕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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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책장은 유독 풍성하다. 파이돈 편집부에서 펴낸 <위대한 여성 예술가들>, 김초엽, 듀나, 정소연, 김이환, 배명훈, 이종산 작가가 참여한 소설집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 다드래기 작가의 만화 <안녕 커뮤니티>, 타야리 존스의 장편소설 <미국식 결혼>, 그리고 하야미 가즈마사의 범죄소설 <무죄의 죄>. 마음에 가는 책을 정해 읽어보시길.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0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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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는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쓰지 못한다. 아마도 시나리오대로 찍는다면, 그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시나리오 대신 다큐멘터리 현장을 이끄는 것은 자료조사, 기다림, 상호신뢰다. <길 위에서> <노무현입니다> <김군>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큐하는 마음>을 쓴 양희 작가는 다큐멘터리 작업이 “함께하기 위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며 책을 시작한다.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순 없어도 지금 함께할 수는 있으니까, 팽목항에서, 밀양의 철탑 아래서, 폭탄이 떨어지는 분쟁지역에서 카메라를 들고 자리를 지킨다. 짧게는 몇달이지만, 많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5년, 10년 동안 하나의 이야기 옆을 지킨다. 그리고 감독과 관객의 마음이 맞아떨어지면, 관객도 함께하겠다는 마음에 동참하게 된다. 다큐하는 힘은 거기에 있다.
<다큐하는 마음>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유통되어 평가받기까지 아홉개의 분야를 택해 그 분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다큐하는 마음>, 함께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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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라인 냅을 읽을 때면 늘 신기하다. 나와 이렇게 (안 좋은 의미에서) 비슷한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신기해하리라는 생각을 하면 아득한 연결감에 즐겁기도 하고 감탄하게도 된다.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캐럴라인 냅과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서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알기 때문에’ 연락을 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그래서 친구가 아닌 사람들보다 머나먼 사이로 지냈을테지. <명랑한 은둔자>는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다.
하지만 또한 많은 것들이 다르다. “나는 중상층 가정에서 자랐고, 사립 중등학교를 다녔고, 아이비리그 대학을 다녔다. 예뻤고, 인기가 좋았고, 성적이 올 에이였고, 학업 우수상을 많이 탔다.” 하지만 캐럴라인 냅은 자신에게 생기는 모든 좋은 일들이 모두 외부적 요인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이거나 행운이거나. “내 마음속에서 나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다.” 캐럴라인 냅은 평균보다 훨씬 뛰어난 재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명랑한 은둔자>, 벗어나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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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온화한 인상을 받았을 때, 그 이유를 떠올려보면 그림의 색채, 인물의 미소 띤 표정, 둥근 턱 모양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데즈먼드 모리스는 미술 작품이 관람객에게 어떠한 인상을 남겼다면 거기에 작품 속 인물의 포즈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성을 ‘털 없는 원숭이’로 규정하고 본성과 진화 과정을 분석한 데즈먼드 모리스의 책 <털 없는 원숭이>는 진화생물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이번에는 인간의 포즈를 9가지로 나누어 미술 작품 속 자세들을 설명하고 그 뒤에 숨은 사실들까지 아울러 책으로 묶었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나는 나의 예전 저서 <맨워칭>(1977)에서, 몸짓언어라는 주제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말에만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연구할 때 훨씬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음을 말했다”며 새 책에서는 몸짓에 사회적인 기능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도 참견 영상을 보면 매니
씨네21 추천도서 <포즈의 예술사: 작품 속에 담긴 몸짓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