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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불변의 마케팅 클래식.’ <포지셔닝>의 야심찬 부제는 과장이 아니다. 포지셔닝은 잠재 고객의 마인드에 적절한 메시지를 주입하고 유지하는 전략이다. 4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잠재 고객의 마음에 확고한 자리(포지션)를 확립한다는 뜻의 포지셔닝은, 커뮤니케이션 과잉 시대에 더욱 힘을 발휘하는 가치가 되었다. <포지셔닝>은 실제 사례 분석에 공을 들였는데, 4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례 중 일부는 시효를 다했지만 원칙에는 흔들림이 없다.
개인 브랜딩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현대사회에서, <포지셔닝>의 조언을 참고하면 이렇다. 대중매체에서는 끊임없이 새롭고 신선한 얼굴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매체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은, “자신을 밝힐 준비가 완전히 갖춰질 때까지 무명성을 유지하다가 자신을 밝힐 때 한번에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홍보나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비자 마인드에 포지션을 확립하는 것이
씨네21 추천도서 <포지셔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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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그 시를 감싸고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시인의 사정, 시인이 쓴 다른 산문을 빌려와 함께 읽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백은선 시인이 그걸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백은선의 세 번째 시집 <도움받는 기분>을 읽기 전 우연찮게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를 먼저 읽었다. 시인은 산문집에서 자기 시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썼다. ‘나는 알레고리로 가득 찬 내 시가 징그럽고 무서워. 부릅뜬 눈들이 싫다. 더이상 읽고 싶지 않아졌다. 나는 내 시집 <가능세계>가 피해자의 거대한 진술서 같아서 진절머리나게 싫을 때가 있다.’(67쪽) 그가 세 번째 시집은 통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통독하지 못했다.
<도움받는 기분>(30쪽)을 읽다가는 한 10대 여성의 지옥도 속에 같이 사는 것 같아서 잠시 쉬어야 했고 <연결 지점>(34쪽)에서는 ‘꽃도 열매도 없이 오래 살자/ 누구의 꽃도 되지 않으
씨네21 추천도서 <도움받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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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물과 살고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잊지 못할 동물과의 몇몇 추억이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름도 붙여주고 친동생처럼 같이 놀았지만, 잠깐 대문이 열린 사이에 집을 나가 영영 만날 수 없게 된 개 복실이,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만났던 크고 무서운 개 누렁이, 등굣길 나만 보면 컹컹 짖어 학교까지 뜀박질하게 했던 슈퍼집 개 해피, 동네 대장이었지만 낮잠만은 꼭 우리 집 담장 아래서 잤던 치즈색 고양이, 학교 앞에서 천원 주고 사왔는데 쑥쑥 잘 자라서 금세 푸드덕거리며 닭이 됐던 병아리 두 마리.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조차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준 동물들’에 대한 기억이 이렇듯 애틋한데, 강원도 어두니골의 동물 친화적인 가정에서 자란 전순예 작가는 사랑하는 동물들이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
1945년생 작가는 최초의 기억이 자리 잡은 순간부터 닭, 오리, 개, 돼지, 소까지 다양한 집짐승들과 어울려 자랐고, 산골에 살다 보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엉이 두 마리가 길
씨네21 추천도서 <내가 사랑한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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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냉장고에 보관하면 절대 안된다! 마트에서 장을 본 식재료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쓸어 담는 저장강박증 환자에게는 신경 쓰이는 뉴스였다. 토마토와 호박, 감자는 냉장고보다는 상온에 보관하는 편이 재료 본연의 맛과 영양소를 유지할 수 있다니! 어디 이런 채소뿐인가. 바나나와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은 냉장고에 보관하면 저온 장애를 입어 상온에 두는 것보다 빨리 물러진다고 한다. 생선이든 고기든 냉동고에 넣는 순간 영원불멸한 생명 유지 장치를 단 것처럼 안심했건만 사실 식재료는 냉장고에 들어가면서 그 생명력을 잃어간다. 몇년 전 한 철학자가 칼럼에서 ‘냉장고는 자본주의를 대표하고 가족 건강, 이웃 공동체, 재래시장과 생태 등을 파괴하는 주범’이라 주장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가 왜 ‘냉장고와 대용량을 폐기하자’고 주장했는지 이해는 되지만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바쁜 현대인이 매일 동네 시장에 들러 소량의 장을 보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제로 웨이스트 키친>의 저
씨네21 추천도서 <제로 웨이스트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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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은 자기가 가던 길을 그냥 가지 않고 굳이 사람들 품을 파고든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소설가이자 강화도에서 공동체를 운영하는 지역운동가인 김중미 작가의 신작은 가난에 대한 이야기이자 10대에 대한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에 공장이 있었고 그 시절 조선인이 모여 살던 줄사택이 아직도 남아 있는 동네 ‘은강’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에는 가난한 ‘난장이’ 가족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 어떻게든 바꾸어 수익을 내고 명성을 얻고자 하는 집요한 흐름이 있다. 브랜드 아파트 단지를 지어서 땅값을 올리는 표준적인 한국식 개발 입장이 있는가 하면, 도시 재생 등의 이름으로 북카페나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고 사진 명소나 ‘쪽방체험관’ 같은 여행 코스를 만들자는 입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현재 살고 있는 주민들에겐 달갑지 않은 이야기다.
은강에 사는 10대 이야기는 미래를 향한다. 지우는 안다. 동네에 서민 가정의
씨네21 추천도서 <곁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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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이야기는 소설이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부모가 같다고 해서 똑같이 살라는 법은 없으니, 둘이 어떤 인생의 궤적을 그려가는지 운명이 어떻게 다르게 흘러가는지 관심이 간다. <지문>에도 자매가 등장한다. 둘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가 이혼하면서 성도 달라지고 삶도 달라진다. 외모도 비슷하고 성격도 닮은 두 사람이 35살이 된 지금, 언니 윤의현은 전도유망한 영화사에 작품 판권을 파는 데 성공한 소설가이자 대학 강사로 살고 있으나 동생 오기현은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윤의현은 실종 신고를 하고, 얼마 뒤 오기현이 산속에서 변사자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제 윤의현이 할 일은 외롭게 살아온 동생이 왜 죽었는지, 혹시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면 범인이 누구인지 언니로서 정의롭게 밝혀내는 것이다.
<지문>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자료 조사가 꼼꼼하다는 점이다. 변사자 신원을 파악하는 과정이나 시체 부패 과정에 대한 설명,
씨네21 추천도서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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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소설가이자 강화도에서 공동체를 운영하는 지역운동가인 김중미 작가의 신작 <곁에 있다는 것>은 가난과 10대에 대한 이야기다. 이선영의 <지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가 이혼하면서 성도 달라지고 삶도 달라진 뒤 30대 중반의 나이가 된 두 자매를 주인공으로 한다.
60살에 글을 쓰기 시작해 2018년 첫책 <강원도의 맛>을 출간한 전순예 작가가 그려내는 어린 시절 어두니골과 마수리의 풍경을 담은 에세이 <내가 사랑한 동물들>, 최근 산문집을 출간한 시인 백은선의 세 번째 시집 <도움받는 기분>,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는 법’을 알려주는 친환경 식생활 책 <제로 웨이스트 키친>, 그리고 4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으로 선보이는 <포지셔닝>을 4월의 책으로 함께 소개한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4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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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인류학자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두 사람의 편지를 묶은 서간집이다. 2019년 4월부터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았고, 7월 6일까지 썼는데, 미야노 마키코는 7월 22일 책 출간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암 투병 중에 사망한 저자의 이 책에는 절박한 사유만이 보여주는 경지가 담겨 있지만, 의사로부터 이런저런 경고를 들으면서도 ‘평균수명’이라는 감각으로 사는 사람이 죽음을 앞둔 사람의 글을 읽고 슬픔, 감동, 교훈을 얻는 일은 일견 경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편지글을 읽다보면 이소노 마호는 계속해서 질문하고, 답장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심지어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업이 앞으로 좋아지리라는 감사의 말을 적었지만, 미야노 마키코는 그렇지 않다. 이소노 마호가 무례하다는 뜻이 아니라(책 후반부로 갈수록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편지를 주고받고 책을 마무리한 데 대해 독자로서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사려깊으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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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어떻게 여자들의 놀이터가 되었나>에 이어 또 한권의 흥미진진한 조애나 러스의 논픽션이 출간되었다. 근대 고딕소설에 대한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남편인 것 같다>와 더불어 조애나 러스의 문학 비평 3부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은 총 11가지의, 주류 예술계가 자신들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창작자들의 작품을 억압하는 언어들이 소개된다. 금지하기, 자기기만, 행위 주체성 부정하기, 행위 주체성 오염시키기, 이중 기준으로 평가하기, 잘못된 범주화, 고립시키기, 예외로 취급하기, 본보기 없애기, 회피하게 만들기, 미학적이지 않다고 보기.
‘금지하기’. 교육, 창작, 출판을 둘러싼 공식적인 금지가 사라진다고 비공식적인 금지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빈곤과 여가 시간 부족은 예술 활동을 방해하는 강력한 원인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많은 여성 작가들은 자기 재산을 갖기 어려운 제도하에 있었고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 여자가 썼을 리 없다는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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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가 동화적이라고 하면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뜻일 때가 많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이전의 동화들은 잔인하고 끔찍한 면모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 우리가 아는 동화는 악당이 어쩌고 괴물이 저쩌고 하다가 마법처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야 만다.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이야기를 통해 보는 장애에 대한 편견들>은 이런 동화적 엔딩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최소한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면 말이다.”
이 책을 쓴 어맨다 레덕은 에세이와 소설을 쓰는 작가로, 가벼운 뇌성마비와 마비된 쪽 근육의 긴장이 증가하는 증상인 강직성편마비가 있다. 그가 유럽에서 기원한 동화와 거기 깃든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더불어 의료기록에 기반한 자신의 어린 시절도. 수많은 동화는 주인공이 다른 무언가로 바뀌는 장면을 보여주곤 한다. <신데렐라>에서 공주가 되는 재투성이 하녀가 대표적이다. 주인공은 사회가 만든 틀에 맞게 멋있어지고, 아름다워지고,
씨네21 추천도서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 이야기를 통해 보는 장애에 대한 편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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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수학과 과학을 포기하고 문과적 인간으로 살길을 찾아야 했던 사람에게 <코스모스>나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고전은 미지의 숙제처럼 느껴진다. 여느 집 책장에든 <코스모스> 한권쯤은 꽂혀 있지만, 그 책은 목차 이상 펼쳐지지도 못하고 깊숙이 잠들어 있다.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에 전공생도 어려워할 법한 두꺼운 고전이 이름을 올리고 있음에도 그 책을 제대로 독해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과학 전문 기자 강양구가 과학 고전을 쉽게 읽어주는 <강양구의 강한 과학-과학 고전 읽기>는 그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대학원생도 읽기 어려운 <이기적 유전자>가 ‘명문대 입학 필독서’로 고등학생에게 추천되는 현실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전 한권을 둘러싼 사정’을 따져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책이 등장할 때의 맥락과 이후에 덧붙은 다양한 해석,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우리에게 그 책이 왜 필요한지 등등.
<강양구의 강한
씨네21 추천도서 <강양구의 강한 과학– 과학 고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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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끝난 후 주인공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함께하던 세계가 갑자기 문을 닫은 후 홀로 밖으로 내쳐진 독자들은 후일담이 궁금하다. 특히 그 주인공이 어딘가 존재하는 사람처럼 생생하고, 외로운 아이들이라 제발 어디서든 잘 살아주길 응원했다면 더더욱. <두 번째 엔딩>은 독자들에게 크게 사랑받은 소설들의 뒷이야기를 엮은 소설집이다.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후 그 아이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지 다정히 안부를 전해주거나, 전작에서는 조명하지 않았던 미지의 인물을 통해 작중 세계관을 확장하는 식으로 소설에 뜨개실을 이어 붙였다.
학교 폭력으로 세상을 떠난 동생의 비밀을 찾아 나서는 언니의 이야기 <우아한 거짓말>(김려령), 감정이 고장난 소년이 사고로 가족을 잃은 후 다른 소년과 관계 맺으며 공감에 대해 알아가던 <아몬드>(손원평),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아 ‘이불 아기’로 불리던 아이가 성장하며 삶을 회복해가는 <유원>(백온유) 등 창
씨네21 추천도서 <두 번째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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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작법 책을 보면 시작을 최대한 강렬하게 제시하여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어야 한다는 설명이 종종 눈에 띈다. 강렬함의 정도로 따지면 <남남>은 100점 만점에 150점은 받을 만화다. 더운 여름날, 남자 친구와 다투고 집으로 돌아온 진희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위하는 엄마와 마주한다. 대체 이 난감한 상황이 어떻게 이어질까 궁금해서라도 이야기를 계속 봐야 할 것 같은, 포털사이트 다음의 인기 연재작 <남남>의 시작이다. 진희가 엄마에게 데이팅 앱을 소개해주고, 화면을 같이 넘기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자만추’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의 줄임말)를 본 엄마가 ‘자지 만지는 추남?’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SNS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설정만 놓고 보면 쉽게 웃기 어려운 만화일 수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어쩌다 진희를 임신한 엄마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맞고 살다가, 친구 민정의 도움을 받아 혼자 진희를 낳아 키웠다. 편모 가정에서 자란 진희의 오랜 친구
씨네21 추천도서 <남남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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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이며 의뢰인이며 다들 담배 피우는 곳을 찾고 또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물어보는 모습을 보니 과연 하드보일드가 돌아왔구나 싶다. 널리 알려진 대로 레이먼드 챈들러와 그의 탐정 필립 말로에게 깊이 빠진 하라 료는 도쿄를 배경으로 챈들러의 느낌을 고스란히 되살린, 혹은 챈들러를 뛰어넘었다는 평을 듣는 미스터리 걸작을 써왔다.
그리고 14년 만에 시리즈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이 도착했다.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듯, 탐정 사무소가 있는 빌딩은 이제 헐릴 때가 되었고 50살이 넘은 사와자키는 이사를 해야 한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속으로 벌어지고 뜻밖의 진실을 찾아가는 장르의 법칙은 여전히 성실히 지켜진다. 사와자키는 소소한 일거리를 해결하며 살다 모치즈키라는 의뢰인을 만나는데, 조사를 나갔다가 은행 강도 사건에 휘말린다. 촌극인 줄 알았던 강도 사건은 알고 보니 조직폭력단과 비자금 문제가 얽혀 있고, 어쩔 수 없이 경찰과도 마주해야 한다.
서로 볼 장 다 본
씨네21 추천도서 <지금부터의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