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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근화의 산문집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는 읽기와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그의 시 <창백한 푸른 점>의 “날 좀 사랑해줄래/ 드문드문 어두운 것도 같지만/ 크게 웃었다가 긴 침묵에 쌓이는 사람들과 함께/ 내가 먼저 아침을 맞이할게/ 널 위해 긴 문장을 썼다가 지웠지만/ 지구의 아들딸들을 위해/ 오늘은 시금치를 삶을게” 같은 언어의 살뜰함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혹은 아직 이근화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유혹적인 책이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쓴 글을 묶었다는데, 여러 작가들의 글을 읽어가는 구성이다. 필연적으로, 책과 읽는 행위에 대한 이근화식 주석이 된다. 이근화가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는 방식은 이렇다. “정치적 인간으로서 이해관계가 연관된 세계에 대해 논할 때 ‘협상 테이블에 사랑을 가져온다면, 직설적으로 말해 나는 그런 행동은 치명적인 짓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비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종의 자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삶을 구제하는 대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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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치즈와 구더기>를 잇는 <밤의 역사>는 미시사 저작물을 꾸준히 발표해온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책으로, 유럽 전 지역에 퍼져 있던 민간신앙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 민속적 기원을 들여다본다.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다른 책들처럼 오랫동안 붙들고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재미있는 <밤의 역사>는 코로나19의 세계에서 읽으며 더 눈길을 끄는 부분들이 있다. 재앙의 시대, 14세기 나병 환자와 관련한 음모론이 나도는 풍경을 보면 특히 그렇다. 나병, 흑사병은 타자를 배척하는 음모론으로 쉽게 진행되곤 했는데, 십자가 모독, 식인 행위, 동물로의 변신, 난교 파티, 주술 비행을 비한 ‘악마의 잔치’라는 음모 이미지는 마녀사냥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된다. <밤의 역사>에서는 인간이 공동체에 포함시키지 않은 인간을 벌해 공동체를 보호하겠다는 신념에 가득 찬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 결과 끔찍하게 죽음을 맞는 무수한 여자들
씨네21 추천도서 <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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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차례로 전달하며 마지막 순간에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게 하는 방법은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소설 <고백>은 여러 목소리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쌓아가며 마지막 반전까지 독자들을 집중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조각들>은 한 소녀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시골 마을에 사는 여자애가 대량의 도넛에 둘러싸여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퍼진다. 누구는 죽은 사람이 모델 같은 미소녀라고 하고, 누구는 학교에서 제일 뚱뚱한 학생이라고 한다. 미용외과 다치바나 뷰티클리닉의 원장 히사노는 비만 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아 오랜만에 만나는 옛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로 시작된 이야기는 초등학교 동창의 딸이 죽었다는 화제로 이어진다. 히사노는 옛 동창의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말은 제각각이고, 저마다 가
씨네21 추천도서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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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년에 한번 있는 가족 모임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성공한 이민자들인 거예요. 오지 못한 가족들에 비하면 말이죠. 살던 나라에서 다시 청소부, 택시기사, 가정부로 돌아간다 해도 할머니의 식탁에 앉아 있는 이 순간에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자화자찬이 끝나자 비밀들이 불려나왔습니다.” <레오니>의 화자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필리핀 마닐라까지 서른 일곱 시간을 비행해 떠나는 레오니다. 오년에 한번, 증조할머니가 소집하는 가족 모임을 위해 부모님과 쌍둥이인 뻬드로까지 네 가족이 여행을 떠났다. 어딘가의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친척들은 모처럼 집을 찾아 으스대기도 하고, 근심을 늘어놓기도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레오니는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고, 이날 밤의 기억을 수없이 되새김질하며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에디 혹은 애슐리>는 기상이변으로 시작해 노화도, 죽음도, 성장도 없는 세계에 인류가 갑자기 들어선 뒤의 상황을 그린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이 가능해지고 젠더는
씨네21 추천도서 <에디 혹은 애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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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졸업한 지 까마득한 나이지만, 여전히 제도권 교육을 뛰쳐나간 삶이 어떤지 잘 모른다. 아마도 그 삶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학교는 단순한 교육을 넘어서서 개인의 정체성에서 큰 몫을 담당한다. 뒤집어보면, 학교를 떠난다는 것 또한 큰 정체성이 된다는 말이리라. 이길보라 감독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는 말그대로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배움의 궤적을 몸으로 그려나가며 제 삶을 만드는 용기 있는 여정을 담았다. 어려서부터 ‘꼬맹이 통역사’로 청각장애인 부모님의 의사소통을 담당하여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겪은 이길보라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학교를 나가 동남아시아로 배낭여행을 떠난다. 이후 작업자로서의 경험을 계속 쌓아가는 한편 한국의 예술대학을 다녔지만 새롭고 자유로운 사유,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경험은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에서 얻게 된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운데 예술을 꿈꾸며 고민하는 독자라면 이길보라 감
씨네21 추천도서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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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젊은 시절 작품을 보관할 공간이 여의치 않자 포장도 풀지 않은 작품 13점을 그러모아 “창고 피스”로 명명하여 정체성을 드러낸 미술가 양혜규는 다음 세대에 관심을 받을 작가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작가의 화두가 미래에도 유효할지 생명력을 언제나 따져봐야 한다고 냉철하게 말한다. 고통스럽고 불편하면서도 도전적인 여성 캐릭터를 평생 연기해온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자신이 연기한 역할에서 “작은 불꽃을 봤고, 이를 이야기의 중심에 세우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은 예술가 19인의 인터뷰를 담았다. 분량은 만만치 않으나 예술문화계의 슈퍼스타들이 포진해 있고 질문과 대답의 흐름이 자연스러워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심슨 가족>에서 골프공으로 건물 하나를 찌그러뜨린 역할로 등장한 바 있는 유명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 “언젠가 영화 투자를 받지 못하면 사진
씨네21 추천도서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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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장마뿐인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는 중이다. 2020년의 남은 시간을 차분하게 책과 함께 정리하고 싶은 당신을 위해 책 목록을 꾸렸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는 학교를 떠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배움의 궤적을 그리는 이길보라 감독의 에세이.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은 예술가 19인의 인터뷰를 담은 책으로, 예술가의 작품 이면의 생각을 읽게 해준다.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은 외모 콤플렉스와 그에 따른 편견이 망가뜨리는 것들을 바라보고, 김성중의 단편집 <에디 혹은 애슐리>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여러 채널을 관람한 기분이 들게 한다. 마지막으로 미시사 연구 방법의 개척자로 꼽히는 역사학계의 거장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밤의 역사>는 묵직한 즐거움을 안긴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8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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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종종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넨다. “너도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일을 시작해야지.”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지도 이제 10년이 넘어가는데 어르신들은 여전히 내가 하는 일의 쓸모를 궁금해한다. 매번 되돌아오는 질문을 마주하며 시간이 갈수록 곱씹게 된다. 영화비평을 ‘제대로’ 한다는 건 어떤 걸까.
이건 정답을 찾는 작업이 아니라는 걸 진즉에 간파한 사람이 있다. 1980년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을 통해 체험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밝은 방>은 영화의 형식과 이론 바깥에서 영화를 사유한다. 당연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감상들이 주를 이뤘다. 장 루이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는 그 기획의 두 번째 결과물이자 마지막 책이다(롤랑 바르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1970년대 프랑스영화계는 비평가들의 각축장이었다.
[BOOK]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평범에 저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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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의 SF 이야기>는 책 제목처럼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중심이 되어 엮은 SF소설과 영화에 대한 책이다. “SF는 가장 깊은 철학의 심연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르다”라는 제임스 카메론의 선언 같은 문장이 있는 서문은, 그가 왕복 2시간이 걸리던 고등학교 통학길에 SF소설을 탐독하던 시기부터 <터미네이터>를 만들던 시기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1977년, 어찌된 영문인지 <스타워즈>가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거두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이어 1982년, <E.T.>가 믿기 힘든 쾌거를 다시 이뤄냈다.” 이 책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인터뷰를 직접 진행하는데 인터뷰이로 나선 사람들은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크리스토퍼 놀란, 기예르모 델 토로, 리들리 스콧, 아놀드 슈워제네거다. 가장 첫 번째 인터뷰는 랜들 프레익스가 제임스 카메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포부가 큰 영화 제작자가 된 후론, SF를 훨씬 덜 읽고 그 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제임스 카메론의 SF 이야기>, SF라는 ‘사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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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가 쓴 추리소설. 역사 대하소설 같은 제목의 <빛의 전쟁>은 입자물리학을 전공하고 물리학 입문서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과학 서적들을 써온 물리학자 이종필의 첫 장편소설이다.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에 머리 없는 시체가 매달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고, 온 나라가 떠들썩해진다. 사방팔방이 CCTV에 새벽에도 오가는 차량이 많은 광화문에서 벌어진 일이니 금방 범인을 잡을 것 같지만, 확인된 CCTV 영상에서 시체가 든 자루를 이순신 동상 앞까지 배달한 것은 드론이다. 더 끔찍한 것은 자루 속에 든 시체의 목 위가 없으며 온몸에 목공 작업할 때 쓰는 타카핀이 수천개 이상 박혀 있다는 것이다. 엽기 잔혹 살인사건에 과학 전문 기자 영란과 물리학자 성환이 참여하고, 성환은 사건에 인공지능 알고리즘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이 사용됐을 거라고 추측한다. 살인사건을 강력부 형사와 물리학자, 과학 전문 기자가 함께 파
씨네21 추천도서 <빛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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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은 예기치 못하게 어떤 날 필요한 사람을 찾아오는 것일까. 손보미 작가가 2020년 7월 둘쨋주 일주일 동안 일어난 연이은 뉴스들을 내다보고 장편 연재를 시작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신작 소설 <작은 동네>의 문장들은 지금 한국의 여자들에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딸이 방과 후 친구들과 단소 연습을 하는 것조차 허락지 않으며, 매일 학교에 데리러 오는 엄마. 아이는 그런 엄마 때문에 교실에서 소외된다 여기고 아빠 역시 “네 엄마는 너의 안전에 과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작은 동네에 실종된 소녀에 대한 소문이 떠돌자 다른 친구 하나가 “나도 모르는 아저씨들 차에 올라탔는데 아저씨들이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있었고 느낌이 이상해 도망쳤다” 소곤댄다.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야. 사랑하는 우리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딸을 껴안으며 속삭이는 엄마가 과민하다고,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된 여자는 남편의 회사 파티에서 배우 윤
씨네21 추천도서 <작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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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생명을 모방, 증강, 능가하는 방법으로서의 로봇이라는 아이디어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이 뒷받침되기 전, 그것도 그리스 신화에서 인공 생명 만들기와 자연 복제에 대한 온갖 아이디어가 탐색되었다는 주장이 <신과 로봇>이다. 스탠퍼드대학에서 고전 역사와 과학의 관계를 연구하는 에이드리엔 메이어는 이른바 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협업할 수 있는지의 사례를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 존재들은 이아손과 아르고 원정대, 정동 로봇 탈로스, 기술 마녀 메데이아, 천재 공예가 다이달로스, 불의 운반자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으며, 인공 생명을 창조하려는 (시대를 초월한) 충동의 초기 표현을 담아내는 그릇이 바로 신화다.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첫 단추는 바로 상상력이다. 가능한 테두리 내에서 반복하지 않고 없는 것을 만들어보는 일, 상상 속의 존재를 이야기 속에 구현하는 일. 그러니 <신과 로봇>
씨네21 추천도서 <신과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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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나태하게 살아도 됐을 것이다.” 여러 이유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면 마음에 담아둘 문장이다. 주인공 유원은 어린 시절 화재를 겪었다. 11층 아파트에 큰불이 난 것이다. 유원의 언니는 유원을 이불에 싸서 밖으로 던지고, 운 좋게 한 사내가 유원을 받아낸다. 이후 유원은 ‘11층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한 이불 아이’로 불리게 된다. 화재 자료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돌고 사람들은 호기심과 정의감에 한마디씩 댓글을 단다.
“아저씨를 망가뜨려 놓은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유원을 구한 아저씨는 크게 다쳤다. 사업도 계속 실패했다. 그는 유원의 집에 언제든 찾아와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고, 유원의 부모에게 돈을 빌린다. 그렇게 자신이 유원의 생명을 살린 사람임을 언제고 확인시킨다. 누군가의 삶을 희생한 덕분에 살아났다는 사실 앞에 유원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제대로 자라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다그친다. 어느 날, 유원은
씨네21 추천도서 <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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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흥종교 지도자가 말한다. 이제 신은 인간에게 더 정의로울 것을 요구한다고. 그래서 마땅히 죽어야 할 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려 제 뜻을 전한다고. 그런데 이 망상 같은 예언이 정말로 실현된다. 도심 한복판에 지옥에서 온 듯한 괴물이 나타나, 죽음을 고지받은 사람을 때려죽이고 불태워버린다. “신은 너무나 직설적으로 지옥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시연’ 순간은 2020년이란 시점에 어울리게 휴대폰 영상으로 촬영되어 온갖 곳으로 퍼져나가고 사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여느 사회파 장르물이 그러하듯 <지옥> 또한 사이비종교를 소재로 한국 사회를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이제부터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굳게 믿는 광신자들이 나타나 대낮에 비판자들에게 테러를 저지르고 다니는 한편, 자금이 사이비종교로 몰려드는 모습. 여기에 죽음 예고를 받은 당사자의 개인정보가 바로 털리고 ‘시연’ 상황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겠다며 방송국이 몰려드는 상황까지 한국적 지옥의 풍경
씨네21 추천도서 <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