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식주의자가 왜 돼지를 키운다는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공장제 축산 대신 ‘예의를 갖추어’ 동물을 키우는 일은 채식주의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귀촌하여 유기농 요구르트 목장에서 일하는 저자는 주변 지인들과 함께 ‘대안축산연구회’를 결성했다. 이론만 따지고 있을 수 없어 실전에 돌입하기 위해 근처 농업학교에서 새끼 돼지 세 마리를 분양받기로 한다.
그런데 돼지 키우기는 처음부터 맨땅에 헤딩하기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쑥쑥 크는 돼지를 붙잡아 우리에 데려오는 문제부터 돼지가 탈출하지 못하는 탁 트인 축사를 만드는 문제, 자연식 먹이 조달이며, 발정기 대처법, 살충제를 쓰지 않고 여름의 파리 떼를 처치하는 문제 등. 저자가 처음 알게 된 정보들이 많다. 돼지도 소처럼 풀을 먹는다. 돼지는 집에서 키우는 개처럼 영리해서 키우다 보면 정이 들게 된다. 그리고 동물을 잡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호주 같은 곳에서도 도축장 일은 기피 직업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축산업은 질소
씨네21 추천도서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
아나운서가 쓴 책은 많다. 그중 일부를 읽어본 소감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아나운서는 셀럽이 아니고 직장인이다”라는 것이다. 여전히 그 직업을 선망하는 청년이 많을 것이기에, 아나운서들이 낸 책에는 ‘어떻게 하면 아나운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송국 합격 필승 팁도 간략하게 들어 있다. 전종환 아나운서의 책에도 아나운서 시험 중 특히 면접 분야에서 유용한 팁을 접할 수 있는데, 이 책의 차별점 역시 바로 그 팁에 있다.
전종환은 아나운서 학원을 다니지 않았으며, MBC 최초로 재학 중 공채에 합격한 아나운서다. 잘난 척으로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는 ‘그래서 입사 후 너무 힘들었다’고 솔직히 밝힌다. 학원에서 기본 발성과 발음을 배우고, 지방 방송국이나 케이블에서 경력을 쌓고 신입으로 입사하는 ‘경력 같은 신입’이 다수인 세상에 그는 진짜 초짜 신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첫장 제목이 ‘이거 잘못 뽑은 것 같은데?’다. 그에게 방송 테스트를 시켜보던 선배가 한 말이다.
에
씨네21 추천도서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
-
크리스마스가 배경인 가장 유명한 픽션은 <크리스마스 캐럴>일 것이다. 욕심 많은 수전노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유령들을 만나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돌아보고 개과천선한다는, 찰스 디킨스의 그 소설 말이다. 이장욱의 신작 소설 <캐럴> 역시 크리스마스이브가 배경이다. 솔직히 주인공 윤호연은 약간 재수가 없는 인물이다. 자기 스스로도 ‘재수 없다고? 알고 있다’라고 할 정도다. 그는 부유하고 지적이며 곧잘 타인을 조종한다.
무엇보다 그가 재수가 없는 이유는, 자신이 보통의 천박한 부자들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점이다.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 투자 자문 컨설팅 회사 대표인 윤호연은 한강이 보이는 74평 고급 아파트로 퇴근한다. 중후한 분위기의 거실에서 바흐의 평균율을 듣는 중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다짜고짜 “나는 댁의 아내 선우의 전 남친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더니 “나는 지금 자, 자살할지도 모릅니다”라며 협박한다. 윤
씨네21 추천도서 <캐럴>
-
더울수록,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읽는 책 한권만큼 여행에 가까운 경험이 또 있을까. 소설부터 에세이까지 현재의 세계를 담은 신간 5권을 골라 소개한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6월의 책
-
-
“분더카머는 근대 초기 유럽의 지배층과 학자들이 자신의 저택에 온갖 진귀한 사물들을 수집하여 진열한 실내 공간을 지칭한다.” 분더카머는 16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성행했는데, 먼 거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멀리 있는 사람과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는 통신기술이 발전하기 전이었으므로, 분더카머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의 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낯선 나라의 글씨 역시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맥시멀리즘의 원칙을 따라 (거의) 빈 공간 없이 들어서 있다. 범주를 나누고 분류한 듯 보이지만 ‘야릇한 무계통의 혼돈’이 가득하다. “사실 모든 것이 잡동사니다.”
윤경희의 책 <분더카머>는 놀랍게도, 저 설명대로 낯설고도 복잡한 책으로, 사물과 이미지, 텍스트를 포괄해 사유하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경이의 감각을 선물한다. 글에 매혹된 이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수집과 분류의 열망이 책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 <분더카머>다. 해석은 번쩍이며 지나
<분더카머> 호기심의 시간, 머릿속의 공간
-
장르소설은 언제나 ‘그렇다고 치고’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어떤 장르든 그렇다. 이른바 문단문학이 현실에 있음직한 인물과 이야기로 개연성을 따진다면, 장르문학은 ‘작품 속 세계관 설정상 충돌은 없는지’의 방식으로 개연성을 따진다. 용이 있는 세계, 인류가 화성에 사는 세계, 중세풍 복식을 한 북부대공이 회귀한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세계는 그래서 ‘말이 된다’.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는 천재적인 동시에 일상적 소통능력이 부족한 캐릭터를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복잡하고도 복잡한 밀실 사건 해결에 투입하곤 하는데, 순수한 퍼즐풀이의 재미와 그로 인한 현실감 부족은 신본격의 장점이자 단점인 셈. 1980~90년대를 풍미한 신본격 미스터리가 다시 부활한 것일까.
<마안갑의 살인>은 ‘2018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2018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2017 <주간 분슌>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제1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마안갑의 살인>, 가는 곳마다 사건이 생기는 체질
-
소설집 첫 번째 단편인 <자본주의의 적>을 몇줄 읽다 보면 ‘이거 자전소설인가?’ 하고 표지로 돌아가 작가 이름을 확인하게 된다. 첫장부터 ‘정지아, 하면 <빨치산의 딸>을 떠올리는 독자들이 대다수인 마당에’라고 시작하는데 소설을 쓴 작가 이름이 정지아다. 그의 첫 소설은 남로당 일원이었던 부모의 삶을 재구성한 <빨치산의 딸>이었고. 이름만 빌려온 게 아니라 문예창작과를 나와 띄엄띄엄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는 직업 설정 역시 작가의 것이 맞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뒤섞인 내용은 다음 소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서도 이어진다. 일찍이 신춘문예에 화려하게 등단하고 세권의 소설집을 냈으나 지금은 지리산에 살며 지역 대학에 가끔 강의를 나가는 문학박사 정지아 설정 역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작가 본인에게서 가져왔는지 헛갈린다.
그런데 실은 대단한 포부 없이 쫓기듯 낙향한 작가를 “진정한 소확행의 삶”으로 오해해 취재 오
씨네21 추천도서 <자본주의의 적>
-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고 큰 짐이 되지 않아서, 때로는 사람들을 광고판으로 쓸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티셔츠는 각광받는 홍보용 굿즈이자 기념품이다. 목 주변이 늘어나도록 입고도 애착이 남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티셔츠가 있고, 더이상 입지 않아도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이사할 때마다 옷장에 자리를 차지하는 티셔츠가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티셔츠는 그런 물건이다. 심지어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발견한 1달러짜리 ‘TONY TAKITANI’ 티셔츠가 소설 <토니 타키타니>의 영감을 제공했다니 그에게 티셔츠는 단순히 입고 버리는 물건에 그치지 않는 모양이다. 티셔츠를 좋아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잡지에 연재한 애착 티셔츠 이야기를 묶은 책 <무라카미T>가 출간됐다.
<무라카미T>는 티셔츠 이야기인 동시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글이다. 앞서 언급했듯, 티셔츠의 ‘도안’은 무언가를 알리기 위한 내용을 담을 때가 많으며 티셔
씨네21 추천도서 <무라카미T>
-
“느닷없이 나타난 독창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들.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진실을 포착한 기이한 신화들.”(<NPR>) 카먼 마리아 마차도 소설에 대한 극찬 중 눈여겨볼 것은 ‘이전에 없었던, 독창적’이라는 소개다.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가 출간됐을 때 미국 평론가들은 이 소설을 사이코 리얼리즘 혹은 SF나 판타지, 호러 중 무엇으로 분류하면 좋을지 몰라 헤맸다. 소설집 중 <현실의 여자들은 몸이 있다> 역시 아포칼립스와 판타지를 기반으로 몸이 투명해지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현실에서 여자들의 목소리는 쉽게 무시당하고, 폭행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이런 사건들은 흔해서 기사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도 몸이 점차 옅어지다가 형체가 사라지는 여자들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몸이 없는 여자들은 쇼핑몰에 걸린 싸구려 드레스에 꿰매어진다. 회화적이고 마술적인 마차도만의 형식은 다른 소설에서도 발견된다. 뚱뚱한 자기 몸
씨네21 추천도서 <그녀의 몸과 타인들의 파티>
-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고 있고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나 확진자가 폭증하는 나라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변이 바이러스들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바라기 어려우며 바이러스와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예측이 나오는 때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 삶의 방식은 어때야 할까. 특히 감염의 위험이 큰 도시 공간에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건축가 유현준의 신작 <공간의 미래: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는 이런 궁금증을 풀고자 한다.
책에서는 제한된 시공간을 권력의 문제로 본다. 교회에서 매주 예배를 보고 모임을 여는 일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권력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사 윗선에서 재택근무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경우도, 원래의 권력이 더는 제힘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회사에서 자율좌석제를 실행하면 말단 사원 중에서도 꺼리는 경우가 있는
씨네21 추천도서 <공간의 미래: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
-
중독은 감각으로 오는 것 같다. 짜릿한 해방감. 원래의 나에서 벗어나는 듯한 기분. 매혹과 구원. 그렇게 술에 빠지고 또 마약에 빠진다. 그런데 중독은 왜 시작되는 걸까? 심각한 알코올중독 상태였다가 서서히 중독에서 벗어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쓴 저자 레슬리 제이미슨은 여러 갈래를 살펴나간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 학창 시절 잘난 친구들에게 무시당한 경험이나 아버지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기억들이 원인일 수 있다. 글쓰기에 탐닉한 저자처럼 예술가 범주에 속한 경우에는, 알코올중독 자체가 창조의 원동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레이먼드 카버나 존 치버 같은 영문학의 신화가 이를 부채질한다. 술에 취해 땅에 구르고 유치장에 갇힐지언정 근사한 작품을 써낸 작가들처럼 술을 통해 예술가로 거듭나리라는 소망.
하지만 이 신화가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저자는 놓치지 않는다. 술에 취한 여성은 ‘돌봄’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시 술에 취해 살았
씨네21 추천도서 <리커버링: 중독에서 회복까지 그 여정의 기록>
-
창간 기념 특대호와 블록버스터영화, 영화제를 중심으로 셈하는 <씨네21>의 5월은 분주합니다. 4권 동안 쉬지 않고 만든 창간 기념 특대호 마지막 권은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 스페셜과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수상이라는 반가운 소식으로 마무리됐고, 전주국제영화제도 새로운 영화들을 우리 앞에 부지런히 소개했습니다.
여름 블록버스터와 칸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앞두고 한숨 돌리는 5월 말의 책읽기는 그래서 때로 가볍고 때로 묵직합니다. 한권씩 만나보세요.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
2021년 4월 20일, 전직 경찰인 데릭 쇼빈에 대한 유죄 평결이 속보로 보도되었다. 그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눌러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평결은 폭력 사태를 막아냈다는 분석을 얻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만일 1991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찰들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면 LA폭동이 일어났을까 궁금해진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스테프 차의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LA폭동으로부터 28년이 지난 2019년을 무대로 한다. 두순자라는 한인이 자신의 가게에서 라타샤 할린스라는 10대 여성을 강도로 오인해 권총 살해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2019년. 그레이스 박은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경찰 폭력에 사망한 흑인 관련 언급을 일절 하지 않는 어머니 이본에 대해 의아한 감정을 느낀다. 어느 날 그레이스는 어머니와 함께 있다가 난데없는 총격 사건을 경험하고, 어머니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
-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는 1974년 11월 말, 파리에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로테 아이스너의 병세가 위중해 곧 죽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비평가이자 헤어초크의 다큐멘터리 <파타 모르가나>의 내레이터이기도 했던 로테 아이스너의 회복을 위해, 걸어서 가면 로테 아이스너가 살아 있으리라는 확신을 품고, 헤어초크는 뮌헨에서 파리까지 혼자 도보 순례를 했다. 그 여정의 기록이 바로 <얼음 속을 걷다>이다. 11월 23일부터 12월 14일까지의 기록과 그 이후의 글이 실렸다.
이것은 마치 헤어초크의 미발표 영화를 글로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짐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무작정 나선 여정은 “오늘밤은 어디서 자야 할까?”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헤어초크의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유용할 영화감독의 내면일기, 풍경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의 과정이다.
“또 눈, 진눈깨비, 눈, 진눈깨비… 천지창조를 저주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흠뻑 젖은 채 사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얼음 속을 걷다>, 순례의 목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