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식당에서 주방보조원으로 일하다 병원 급식조리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병원은 급식사업이 외주업체로 넘어가며 비정규직 조리원들이 농성 중이다. 요리하기를 즐겼던 여자는 이제 요리 과정만 떠올려도 구역질이 난다. 치매 시어머니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본 50대 여자에게 남은 삶은 그저 주어졌기에 버텨야만 하는 것이다. 남자는 사업 실패 후 건설 현장 교통 관리원으로 일한다. 주머니 사정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아내와는 대화조차 끊겼다. 여동생이 돈을 꾸러왔지만 도와줄 수 없다. 늙다 못해 삭아버린 동생의 얼굴에서는 비애가 느껴진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잘못됐다. 201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손홍규 소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주인공 부부의 고단한 삶을 각자의 시선으로 비추다가 평행선 같은 두 사람이 어쩌다 사랑에 빠졌는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쁘지도 다정하지도, 이상형도 아닌 여자와 평생 해로할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먹은 찰나의 문장은 손홍규 소설의 전반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냉담하지 않고, 생은 슬픔의 연속이기에 모든 인물이 애틋하고 그래서 괜히 비감하다. 그럼에도 생을 직시하는 시선에서는 뭉근한 온기가 느껴진다.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에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소설 어디에라도 비정규직, 건설노동자, 이민자와 식당 노동자가 등장한다. 세태를 비판하는 시선과 함께 소설은 삶이 누구에게나 고된 것이고 공평하게 고통이 존재함을 주지한다. 소설집의 제목이 비롯된 <노 파사란>의 문장, “그의 일상은 그에게만 적대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는 자신에게만 눈을 부라리고 있는 하루를 넌지시 바라보았다”처럼. 일상은 평온하지 않고, 밥을 벌어먹는 일은 고되기만 하다. 고독과 비애와 균열만이 가득한 인생을, 그럼에도 왜 살아야 할까. 늙어가는 육신과 돌이킬 수 없는 인간성은 어디서 가치를 찾을까. 삶이 그렇듯 소설에도 정답은 없지만 작가는 이렇게 쓴다. “문학은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다. 소설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건 소설과 비슷해 보이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과 똑같은 소설”이라고. 비장한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살아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분노
내가 이 나이에 잉태할 수 있는 건 분노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옛사람들이 흔히 한이라고 불렀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이라는 말은 왠지 체념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여겨져. 나는 오래도록 체념해왔으니 체념이 다져지고 굳어져 생긴 한이라 하기에는 억울해. 그렇게 굳어지고 굳어진 체념이 더는 체념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왔을 뿐이야. 그러니 분노 말고 뭐가 더 있겠어. 그런데 대체 무얼 향한 누굴 향한 분노지. 내가 나 아닌 다른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수 있겠어. 결국 그건 나일 수밖에.(296쪽,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