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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접할 때, 우리는 자주 놀란다.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트릭이 하나 있는데, 그 질문들은 누구도 살아 있는 한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레프 톨스토이가 <참회록>을 쓰던 1880년 즈음은 그가 50살을 갓 넘겼을 때였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써 이미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답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참회록>에 따르면 젊은 날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을 지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생활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배우고자 했다. 그 목적은 도덕적 완성이었지만, 그것은 곧 일반적인 완성에 대한 욕망으로, “즉 자신과 신 앞에서가 아니라 남들 앞에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으로 바뀌어버렸다. 남들 앞에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은
<씨네21> 추천도서 -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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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작가의 <타인의 집>이 새 표지로 선을 보인다. 집값이 비싼 시대, 집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인간관계도 변한다. 이별을 눈앞에 두고 냉랭한 상태였던 어느 부부는 핀란드에서 어렵게 찾아온 에어비앤비 손님을 집에 들이면서 상처를 되짚어보게 된다(<사월의 눈>). 사이가 나빠도 꾹 참으며 창의적으로 돈을 아끼는 공동 공간도 있다. ‘나’가 면접까지 보며 어렵게 월세로 들어온 아파트는, 전세로 집을 빌린 사람이 세명의 월 세입자를 따로 받고 있다. 원래 집주인 눈만 속이면 전세 임차인은 월세로 돈을 벌고, 월세 임차인은 싼값에 역세권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괜찮은 구조다. 생활방식이 다르고 화장실 문제가 겹쳐 세입자끼리 불편한 관계가 문제이긴 하지만, 볕 잘 드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임동혁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 호사를 잠시나마 누릴 수 있다(<타인의 집>). 한편 미래의 집은 어떨까. <아리아드네 정원>은 노인 인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씨네21> 추천도서 - <타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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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굳이 개명한 남자가 있다. 원래 이름은 김슬기였고, 소주 한팩을 원샷한 다음 집에 있던 아빠를 따로 불러내어 커밍아웃했지만, 어릴 때부터 돌봐주던 할머니에게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풀숲을 돌아다니며 놀던 평화로운 소년의 세계는, 게이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 균열이 일어났다. 여자를 좋아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기도 했고, 같은 반 남자를 짝사랑하며 괴로워했다. 어쩌면 게이라는 핑계를 대고 직장-결혼-자식으로 이어지는 소위 ‘정상적인’ 삶에서 일찌감치 달아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했다. 25살에 고깃집 서빙 직원 생활을 그만두고 영화배우가 되자고, 집을 떠나 서울 은평구에 옥탑방을 구했다. 삐걱대는 삶을 대체 왜 계속 살아야 하나 고민할 때 고양이가 새로운 가족으로 왔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가족과 함께 일상의 모습을 담아 올리는 유튜버가 되었다.
구독자 약 20만명의 채널 김철수. 영상 속에는 밥을 먹기 바쁜 고양이도 있고, 평
<씨네21> 추천도서 - <보통 남자 김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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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예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영화는 그 탄생부터 기술의 예술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창작자와 그 시대의 새로운 기술이 결정적 도약의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음악은 어떨까. 145년의 오디오 역사를 다룬 기디언 슈워츠의 <Hi-Fi 오디오·라이프·디자인>에서 1950년대 재즈 신을 말하는 대목을 보자. “1950년대는 재즈 신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이다. 당시 재즈 아티스트들의 재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이 재즈 천재들은 높은 수준의 공학 기술이 담긴 45회전 LP음반이 없었다면 이내 잊혔을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레코딩 기술자 중 한 사람인 루디 반 겔더가 만든 음색은 ‘반 겔더 사운드’ , (유명한 재즈 레이블 이름을 딴) ‘블루 노트 사운드’라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과 《러브 슈프림》,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일즈》, 텔로니어스 멍크의 《멍크》 등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1950년대의 오디오가 하이엔드 절대 왕정이었
<씨네21> 추천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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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도 끝났고 입춘도 지났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기지개를 켜는 시점. 독서 목록에 추가할 6권의 책을 여기 소개한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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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개성 혹은 개인의 의지를 상징하는 단어로 쓰이곤 한다. 정치인은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하고, 시위에 나선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게 하겠다고 한다. 마치 모두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목소리 순례>를 쓴 사진가 사이토 하루미치는 선천적인 감음성 난청이다. 그는 유독 자주 혼나는 ㅅ발음을 피하려고 ㅅ이 들어간 단어를 기피했다. “깨끗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할수록 내 생각과 동떨어진 말이 나갔다. 내가 분열되어갔다.” 청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던 그는 농학교로 진학하면서 수어를 배우게 되었고, 수화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로 소통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청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발음이 어떻게 들릴지만을 신경 쓰던 시기의 기억이 마치 타인의 기억 같다면 수어를 사용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은 ‘나’의 일부로 선명하게 맥동한다는 것이다.
사이토 하루미치는 ‘언어’와 ‘무용’이 융합하는 경계에서 수화의 아
목소리 체험하기 <목소리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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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한 고압산소 치료 시설에 큰불이 나 사망자가 발생한 뒤 1년이 지나 재판이 열린다. 재판이 열린 나흘간의 이야기를 다룬 <미라클 크리크>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앤지 김의 데뷔작이다. 앤지 김이 경험한 이민자로서의 삶, 병치레가 잦았던 자녀들, 변호사로 일하며 얻은 지식이 모두 합쳐진 작품인데, 주요 증인이자 사건에 깊이 연루된 사람들의 속내와 법정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며 진행된다. 일을 하는 한국인 이민자 유씨 가족이 정착한 작은 마을 미라클 크리크. 그들은 이곳에서 고압산소 치료 시설을 운영한다. 찾는 이들이 늘어나던 어느 날, 산소 탱크 폭발로 치료 중이던 자폐아 헨리와 다른 환자의 어머니인 킷이 사망했다. 시설 운영자인 유씨와 그의 딸을 비롯한 사상자도 발생했다. 이 화재의 원인이 의도적인 방화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사망한 헨리의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방화범으로 지목돼 재판을 받는다. 엘리자베스가 아들의 자폐증을 고치기 위해 했던 여러
씨네21 추천도서 - <미라클 크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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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두더지, 까마귀, 용을 비롯해 많은 동물 반려 로봇이 ‘켄투키’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켄투키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형 로봇을 구입해 ‘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돈을 주고 연결 암호 코드를 사 켄투키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켄투키를 ‘소유’한 쪽이 로봇을 네트워크와 연결하면 켄투키 ‘되기’를 선택한 전세계의 사람 중 하나와 매칭된다. 어느 쪽이든 상대를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켄투키의 작동은 ‘되기’를 선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반려 로봇을 소유한 쪽은 동물의 눈동자에 달린 카메라 렌즈 너머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알 도리가 없고, 반려 로봇이 되기를 선택한 쪽은 오로지 렌즈로 보이는 정보에 의지해 낯선 사람의 사적인 공간에서 지내게 된다. 사만타 슈웨블린은 초연결 시대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엿보기’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던 이들조차도, 외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의 삶과 연결된다는 사실에 매혹을 느낀다.
씨네21 추천도서 - <리틀 아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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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는 ‘아이 키우다 현타 온 엄마를 위한 대사들’. 방송 작가로, 특히 공중파 3사 영화 정보 프로그램을 모두 담당할 만큼 맹렬히 활동한 저자는 한때 노처녀를 위한 잡지까지 만들었으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 아이가 바로 ‘한방에’ 생기고 결혼을 하여 ‘한방이’를 낳았다. 사실 예상치 못한 결혼이라 시작부터 무서웠단다. 이때 도움이 된 영화가 “사람은 누구나 부조종사가 필요하지”라는 대사가 등장하는 <인 디 에어>. 태어난 아기가 산후조리원에서는 그렇게 효자로 손꼽히더니 집에 와서는 ‘등센서’가 작동해서 밤새 울어대는 바람에 성악설을 믿게 되었다는 대목에서는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다 생명의 의미와 육아가 주는 깨달음을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통해 살펴보는 기발한 발상도 웃음을 추가한다.
“모든 분야에서 꼰대들의 활약은 지칠 줄 모르지만 유독 결혼과 육아 분야에 있어선 ‘꼰대 오브 더 꼰대’가 지리멸렬하게 존재한다.” 임신 때는 출산의 고통과 노산의 위
씨네21 추천도서 - <육퇴한 밤, 혼자 보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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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라는 대상에 대해 한 가지 일관된 입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린 시절의 음주란 금기 혹은 터부를 과감히 깨는 모험이 된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사회가 술을 끝없이 허락하면 주량을 확인하고 또 자랑하며 재미를 구한다. 외로운 젊은이라면 술의 힘을 빌려 헛헛한 마음을 터놓을 힘을, 타인을 향한 애정을 고백할 힘을 빌린다. 내가 모르는 은밀한 이야기, 술잔과 함께 오고 가는 다정함을 놓칠까봐 새벽까지 술자리를 꾸역꾸역 쫓아다닌 경험이 많이들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서 혹은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서 술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술자리에서 성희롱이며 주사 등 좋지 못한 경험을 겪어 자연스레 술을 피하게 될 수도 있다.
<영롱보다 몽롱>에는 술에 대해 딱 떨어지는 문장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없을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다. 특히 필자가 여성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술과 술자리가 얼마나 매혹적이며 동시에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소상하게 다루어진다.
씨네21 추천도서 - <영롱보다 몽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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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처럼 쏟아지는 뉴스를 보지 않더라도, 이해관계를 가진 현대 사회 속 인간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 존재들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로 중시하는 가치도, 당대 사회에서 가장 위중하다 판단하는 문제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세대, 국가, 이념 불문하고 환경과 젠더가 동시대 가장 뜨거운 이슈였음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생태와 젠더를 주제로 기존 문학 작품들을 선별한 ‘해시태그 문학선’은 해당 주제들이 섬세하게 반영된 소설 13편과 시 140여편을 묶었다. <#생태_소설> <#생태_시> <#젠더_소설> <#젠더_시> 총 4권의 책이다. 작가들이 생태 또는 젠더를 주제로 청탁받아 새로 쓴 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부터 2020년까지 근래의 문학 중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추려낸 것이다. 덕분에 메시지만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독자는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딛어 함께 사유하고 상상하게 된다
씨네21 추천도서 - <해시태그 문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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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두고니의 <내 동생의 무덤>은 형사물과 법정물을 절묘하게 조합한 스릴러다. 1993년, 부모님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자 트레이시는 남자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러 가면서 동생 세라에게 꼭 고속도로로 운전해서 귀가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이후로 20년, 트레이시는 세라를 보지 못했다. 감쪽같이 사라진 세라 때문에 트레이시의 가족은 슬픔에 잠겼고, 부모님도 차례로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하며 동생과 가까이서 살고자 했던 트레이시의 소원 역시 물거품이 되어, 지금 트레이시는 고향을 떠나 강력반 형사로 일하고 있다. 세라의 사체가 20년 만에 발견되자, 트레이시는 고향으로 잠시 돌아와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자 한다. 세라를 살해한 범인으로 강간범 에드먼드 하우스가 이미 1급 살인 유죄판결을 받아 복역 중이지만 트레이시는 당시 실종 상태인 세라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기 위해 에드먼드 하우스가 누명을 썼다고 판단하고 그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한다. 진범을 찾기 위해서.
씨네21 추천도서 - <내 동생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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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혼이 나 덜덜 떨면서도, 그 모습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냉정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서 기억 속에 저장하는 내가 있었다. 어렴풋이 이것이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고 느끼면서.”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인 <긴 하루>의 작가 노트 중 이 부분에 공감할 창작자가 많을 것이다. 나쁜 일이 생기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겪으면 몹시 괴로워하는 당사자이면서도 자아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이건 나중에 글 소재가 되겠다’라고 남의 일처럼 바라볼 때가 있다. 한이 작가의 <긴 하루>는 치매에 걸려 집을 나간 어머니를 찾는 주인공의 시선이 소년 시절로 이동하며 가족의 비밀을 들춘다. 치매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방에 가두는 설정은 과거 모자가 살기 위해 공모했던 어떤 사건을 은유하고, 뒤이어 전모가 밝혀지면 독자도 기이한 가담자가 된다.
이번 황금펜상 수상작품집에는 어떠한 경향성 같은 것이 엿보인다. 사회면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아닌가 싶
씨네21 추천도서 -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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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결심으로 독서를 마음먹은 분들을 위한 책 리스트. 한국의 추리 단편소설들을 한데 묶은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술에 대한 다양한 에세이를 묶은 앤솔러지 <영롱보다 몽롱>, 생태와 젠더를 주제로 기존 문학 작품들을 선별한 ‘해시태그 문학선’, 공중파 3사 영화 정보 프로그램을 모두 담당했던 이력을 지닌 방송 작가의 육아와 영화 에세이 <육퇴한 밤, 혼자 보는 영화>, 변호사 출신인 작가들이 쓴 범죄 소설 <내 동생의 무덤>과 <미라클 크리크>, 곧 현실로 이루어질 듯한 SF 소설 <리틀 아이즈>를 소개한다.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월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