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통일신라 시대의 장군 장보고의 사망에서 시작한다. 장보고를 따르다 일이 없어진 장희는 우연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멀끔한 얼굴의 서생 한수생을 구해주고, 청해진의 해체 이후 난장판이 되어버린 바다 위 해적의 세계로 휘말리고 만다. 이들은 돌덩이를 날려보내는 장치를 배에 싣고 다니는 서해 해적 대포고래에 잡히기도 하고, 신라를 무찌른 다음 멸망한 지 200년이 지난 백제를 다시 세우자는 허황된 꿈 아래 공주를 모시고 섬에 터를 잡은 해적을 만나기도 한다. 장희와 한수생은 잘 어울리는 콤비다. 평생 농사를 짓고 글만 읽으며 살아온 데다 임기응변과는 거리가 멀어도 신의를 지키는 우직한 한수생과, 돈이 우선이고 나만 살면 된다는 꾀 많은 생존주의자이면서도 ‘세상의 온 바다를 치마폭에’ 담던 포부가 있어 이기적이지만은 않은 장희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모험을 겪는다. 이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사람간의 연대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장희가 특유의 화술로 적의 허점을 찌르며 아쉬운 곳을 긁어, 가진 것 없어도 협상에 성공하는 모습은 매력 있다.
해적이 바다를 휩쓸고 다니며 서로 싸움을 벌이는 옛 시절 이야기지만,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또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구심점 없이 혼란스러운 사회적 분위기는 무척 현대적이다. 인도 천축국이니 서라벌이니 좋은 곳에 가서 쾌락을 누리자는 선동에 금세 넘어가 농사일을 내려놓고 미래를 버리는 마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노름꾼에게 재산을 털리거나 농사가 망해 노비 신세가 되기 직전에 정부와 싸울 것을 다짐하고 해적에 가담한 병사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혼란 속에서 거짓 섞인 환상을 전파하여 여러 사람을 끌고 다니며 제 욕심을 채우는 사기꾼도 있다. 장희는 이 혼란 속에서 거짓말을 하고 계략을 꾸미며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애쓰다가 서라벌과 서해에서 ‘공주 해적’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막판에 모두가 열심히 믿고 또 믿었던 환상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며 냉혹한 현실이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벌어지는 아수라장은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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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세상이니 결국 썩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