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작가의 소설 <나인>이 새로운 표지의 리커버판으로 출간되었다.
“강한 힘을 가지면 그런 선함도 함께 깃드는 걸까. 아니면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기에 강한 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걸까. 인과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지모는 후자이기를 바랐다. 강한 힘을 가진다고 해서 선함이 무조건 깃드는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올바르게 쓰일 줄 모르는 힘은 재앙과 다르지 않았다.” 나인의 이모가 나인에 대해 생각하는 소설 후반부의 한 대목이다. 더 강한 힘을 가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믿는 세상에서, 천선란의 주인공(들)은 온전한 하나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기꺼이 다른 생명과 함께한다.
주인공 유나인은 고등학생이며, 미래와 현재라는 이름의 친구와 곧잘 어울린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셋은 어느 날 미래의 집에 가기로 하는데, 집 승강기에서 갑자기 엄마의 애인이 여자라고 툭 말을 꺼냈다. 나인은 자신이 이모랑 살고 부모 얼굴을 모른다고 고백해버렸고, 현재는 가끔 무서워서 누나랑 잔다고 말했다. 비밀이 없도록 하되 비밀이 생기거든 절대 들키지 말자는 셋의 약속은 위기에 처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인의 손톱 사이에 새싹이 자라고 신기루 같은 소년을 보기 시작했으니, 누구에게 말하기가 어렵다. 함께 사는 이모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깜짝 놀랄 사실을 전해들은 나인은, 식물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식물들의 목소리는 실종되었으나 단순 가출 처리된 학교 선배의 행방을 나인에게 알려준다.
총 3부로 이루어진 <나인>은 소설의 표현을 빌리면 나인이 듣고 싶어 하는 “안 외로워지는 이야기”다. 타인에 대한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마음을 다잡고 다잡아도 다가올 나의 비극을 막을 수 없다 해도, 어떤 일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삶의 ‘다음’ 순간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애쓰기를 멈추지 않기. 슬픔과 이별을 잘 배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인을 위하여, 그리고 이제는 없는 누군가를 위하여 격려와 애도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오로지 개인에 속하는 특별한 경험에서 오는 굳은 믿음은 때론 큰 슬픔이 된다. 천선란 작가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입덕작’으로도 훌륭한 작품.
여기 존재한다는 것
이 꽃이 처음 싹을 틔웠을 때는 이 세상이 지구였는지도 몰랐을 거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있는 힘껏 세상 밖으로 나와 봤겠지. 물을 머금지 못하는 흙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과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다른 씨앗들처럼 일찍이 삶을 포기했을 텐데, 땅에 있을 때부터 나인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밖에 하지 못해 기어코 세상에 나왔다.(3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