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사랑하는 시 100선과 같은 묶음 시집에 꼭 수록되는 시인이 있다. 윤동주, 한용운도 있겠지만 정호승 역시 한국인의 서정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꼽힌다. 시인이 그리는 슬픔과 이별, 사랑은 각기 표현법도 무게도 질감도 다르지만 정호승 시인의 시를 생각하면 일단 ‘맑음’이 떠오른다. 그 천연의 아름다움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고민하다, 명석한 문학평론가들이 이미 정호승 시 기법을 분석한 바가 있어 여기에도 옮긴다.
“평론가 박덕규는 정호승 시인의 그러한 친숙한 표현 언어를 놀랍게도 ‘낯익게 하기’의 방법론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 표현법의 유효성에 대해 ‘우리의 표현 언어가 지나치게 낯설게 하기로 치달아오면서 난해성과 다의성만을 옹호해왔다는 점을 반성하는 자리에서 시와 독자와의 공동체적 인식을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독자들은 그의 ‘낯익게 하기’ 기법에서 한국 시의 원형질을 발견한다”고 김승희 평론가는 설명한다. 그러니까 낯선 단어를 쓰지 않고 낯익은 사람과 사물, 지명을 거론하며 시가 가닿을 수신자들이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끼도록 쓰는 것이 정호승 시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밤 구두 닦는 소년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 통을 메고 소년은 걸어간다(<구두 닦는 소년>),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고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기 위해 슬픔을 말하자(<슬픔을 위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자, 입양 가는 아이들, 데모를 하는 친구와 그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 비 오는 겨울 서울역에서 신문 파는 소녀…. 정호승의 시에는 밀려난 자의 슬픔이 아로새겨 있다. 얼마 전 복구된 ‘싸이월드’에 정호승의 시를 옮겨 적던 시절이 있었다. <슬픔이 기쁨에게>였다. 우리는 너무 오래 시를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1973년 등단한 정호승의 275편 대표작을 한권에 담은 시선집이다. 50년간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에 대해서도 시로 기록해온 시인의 대표 시를 만날 수 있다. 잊고 있었던 맑은 그리움이 시집 안에서 몽글몽글 피어난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대를 만나러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그대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아직 선로가
없어도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
푸른 바다의 길이 하늘의 길이 된 그날
세상의 모든 수평선이 사라지고
바다의 모든 물고기들이 통곡하고
세상의 모든 등대가 사라져도
나는 그대가 걸어가던 수평선이 아름다움이 되어
그대가 밝히던 등대의 밝은 불빛이 되어
오늘도 그대를 만나러 간다(364~3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