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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서가는 묵직합니다. 밤이 길고, 생각은 많은 계절.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기에 사유와 즐거움을 고루 잡는 책들을 골랐습니다. <사랑을 위한 되풀이>는 바다가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들 것이고, <참선>은 명상과 참선에의 유혹을, <복수해 기억해>는 영화로 보고 싶다는 갈증을, <위험한 비유>는 현실이 이상한 세계로 바뀌는 느낌을 줄 것이고, <위대한 영화>는 하염없이 영화를 보는 밤과 낮을 꿈꾸게, 일러스트 에디션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시리즈 첫권을 새로 읽는 흥분을 되돌려줄 것입니다. 자, 당신은 어느 책부터 읽겠습니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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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비평가, 학자, 논픽션 작가 매기 넬슨의 <블루엣>은 파란색에 대한 사적 기록이다. 북포럼이 이 책을 ‘지난 20년간 출간된 최고의 책 10권’으로 꼽았다는데, 매기 넬슨의 경험과 생각을 파란색에 대한 세상의 시각과 맞닿게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블루엣>은 정말 읽어봐야 뭔지 알 수 있다. 파란색에 대한 이것저것을 논하는 짧은 240꼭지의 연작 에세이를 담은 파란 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으니.
파란 표지에 파란 본문 글씨. 32번 글. “내가 말하는 ‘희망’은 특별한 지향점이 있는 희망이 아니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가치가 있다는 의미 정도다. ‘저 밖에 있는/ 흐릿한 것들은 다 무엇이지?/ 나무? 글쎄, 나는 지겹구나,/ 저것들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영국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한편 이 책은 너무 지겨울 정도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무언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나 싶으면 자꾸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블루엣>, 아무튼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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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진 JTBC 기자가 쓴 에세이. 1년간 해외연수의 기회를 얻어 런던으로 떠난 길, ‘좋은 것들을 모아 더 행복해지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목표는 그림을 가까이 접하며 하루하루 충만하게 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런던을 여행하는 이라면 많은 미술관이야말로 런던을 런던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저자 조민진은 테이트모던미술관, 로열아카데미, 덜위치갤러리, 소더비 경매 같은 공간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당연히 그곳에서 조직되는 다양한 행사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테이트모던미술관이 2019년 여름 피에르 보나르 특별전을 앞두고 연 이벤트가 눈길을 끈다. ‘천천히 보기’ 이벤트다. 하나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최소한 30분 정도를 투자하라는 의도였다. 매슈 게일 테이트모던미술관 큐레이터는 <이브닝 스탠더드>와의 인터뷰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조사를 인용했다. 관람객이 그림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평균 28초에 불과하다는. 대부분 휴대폰으로 그림을 찍고 자
씨네21 추천도서 <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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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미술계의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였다. 그 전시와 ‘비슷한’ 흥분을 원하는 이라면 <현대 미술의 이단자들: 호크니, 프로이트, 베이컨 그리고 런던의 화가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호크니, 프로이트, 베이컨 그리고 런던의 화가들’이라는 부제처럼 1945년부터 1970년경에 이르는 동안 런던의 화가들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순간들을 짚어내는 이 책은 영국의 유명한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썼다. 마틴 게이퍼드는 이 책에서 다루는 루시안 프로이트와 데이비드 호크니의 초상화 모델이 되기도 한 인물이다. 이 책의 도입부는 현대미술에 대한 숱한 책들처럼 경매장 풍경이다. 2013년 11월12일 저녁,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 <루시안 프로이트에 관한 세개의 습작>이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 출품됐다. 1억4240만달러라는 낙찰액은 그 당시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그리고 2018년 11월15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데이비드
씨네21 추천도서 <현대 미술의 이단자들: 호크니, 프로이트, 베이컨 그리고 런던의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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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은 <뉴요커>가 온라인으로 발표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작가 크리스틴 루페니언이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 조회수가 450만건을 넘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몇번이나 클릭해서 소설을 읽은 내가 보탠 조회수도 들어 있으리라. 비채에서 출간한 <캣퍼슨>은 <한밤에 달리는 사람> <성냥갑 증후군>을 비롯해 12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캣퍼슨>은 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마고가 로버트를 만난 것은 가을학기가 끝나가던 어느 수요일 밤이었다.” 예술영화 전용극장의 매점에서 일하는 마고는 극장에 온 손님인 로버트가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말에 응하고 문자를 주고받다가 밖에서 만나게 된다. 늦은 시각 헤어지면서 로버트는 입술에 키스하는 대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고, 마고는 자신이 그에게 끌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캣퍼슨>은 ‘망한 데이트 후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씨네21 추천도서 <캣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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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지유와 재키가 팀을 탈퇴한다는 회사의 발표를 인터넷 기사로 알게 되었다.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제로캐럿 다섯명은 공동생활을 하는 숙소에 함께 있었다. (…) 그저 조금 조용한 아침이었다. 이상하게 대화가 없는 아침이었다. 무슨 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아침이었다. 다시 생각할수록 그랬다.”
“안녕하세요, 제로캐럿입니다.” 다 같이 인사한 뒤, 순서를 따라 계속 인사한다. “제로캐럿의 다인입니다”라는 식으로.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아이돌그룹식 인사. <라스트 러브>의 주인공들도 그렇게 제시된다. 조우리 작가의 <라스트 러브>는 데뷔 5년이 되어 첫 단독 콘서트를 하고 계약해지로 그룹 해체를 경험한 제로캐럿 멤버들의 이야기다. 3년차이던 때 5명 중 2명이 탈퇴했고, 새로 멤버가 하나 들어왔고, 팬들은 싫어했고, 어쨌든 도합 5년이 지나자 소속사는 인기 많은 멤버만 남기기로 한다. 아이돌 관련 뉴스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어떤 패턴. <라스트
씨네21 추천도서 <라스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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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유르착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라는 부제처럼 언어와 예술, 유머, 대중문화, 뉴스, 정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소비에트연방의 마지막 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제목만큼이나 도입부가 의미심장한데, “소비에트연방에서 무언가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고사하고요. 누구도 그걸 기대하지 않았어요. 어른이건 아이건 말이에요. 모든 게 영원할 거라는 완전한 인상이 있었죠.”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초 사이에 태어나,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 사이에 성년을 맞은 사람들은 ‘침체기의 아이들’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이전 세대의 정체성이 혁명, 전쟁, 스탈린의 숙청 등의 사건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세대의 정체성이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를 둘러싸고 형성되었다면, 소비에트 마지막 세대의 정체성은 브레즈네프 시기의 규범화되고 불변하며 만연한
씨네21 추천도서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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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릴 때마다 평균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이다. 바깥에서 시간 보내기보다는 실내에서 활동하기가 더 좋은 계절이 왔다. 이런 때 읽을 만한 책 5권을 모았다. 미술, 음악, 영화에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모여 세계의 시간을 재구성한다. 장르도, 분량도, 국가도 다양한 이야기들을 고루 골랐으니, 원하시는 대로 골라 읽으시기를.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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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옆집을 집요하게 엿보고 있다. 아동심리상담사로 활동했던 애나는 이제 광장공포증 때문에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지내고, 유일한 외부 활동은 채팅 상담이다. 건너편 집에 러셀 가족이 이사 오자, 애나는 옆집을 습관적으로 엿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애나는 함께 먹어서는 안 되는 약과 와인을 들이켜고 스릴러영화를 보다 말고 또 카메라를 들어 옆집을 훔쳐보는데, 옆집 여자 배에 뭔가 꽂혀 있고 블라우스가 적갈색으로 물든다. 애나는 바로 신고하는데,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서는 옆집에 아무 일도 없었다며 애나가 만취해서 걸었던 신고 전화를 들려준다. 애나는 옆집 아이가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본 게 맞음을 확신한다.
<우먼 인 윈도>는 옆집 사람을 훔쳐보는 주인공이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는 점에서 히치콕 감독의 <이창>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과 많은 면에서 닮았다. 이상적인 삶을 박탈당한
씨네21 추천도서 <우먼 인 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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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4일 월요일. (끔찍한, 이라는 형용사를 쓰고 이내 줄로 그어버린 뒤)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문장으로 <이제야 언니에게>는 시작된다. 비 내리는 월요일 저녁, 18살 소녀 이제야는 동생 제니, 사촌동생 승호와 자주 가던 아지트에서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날 이후 제야의 시간은 멈춰버린다. 가만히 있는다면 동생마저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제야는 놀랍도록 의연하고 침착한 태도로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찾아가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하지만, 돌아오는 건 가장 가까운 이들의 2차 가해다. “네 잘못도 있다”고 말하는 큰아버지, “손해는 너만 볼 것”이라 말하는 큰어머니, “우리 모두 그 비슷한 일 한번씩은 겪고 살았”으며 “너만 대수롭지 않다고 마음먹으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할머니의 반응이야말로 상처 입은 소녀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수년 전 나쁜 짓을 당하고도 살던 곳을 떠나야 했던 친구 은비처럼, “소문 속 그 여자애”가 된 제야는 엄마의 30년지
씨네21 추천도서 <이제야 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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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는 것을 구태여 말하고자 하는 것. 세상 모든 이야기는 그 부질없는 작업을 향한 고달픈 몸부림에 가깝다. 한편으론 작가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답은 의외로 그 허망하고 애처로운 작업에 얼마나, 어떤 식으로 매달리는가에 달린건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음에도 굳이 말하고 싶어지는 것, 아니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걸 발견할 수 있는지가 작가의 색깔을 결정짓는다. 윤해서 작가의 <0인칭의 자리>는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탐색해나가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카메라 속 어머니의 눈에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발견한 남자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것을 찾아다닌다. 남자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눈빛을 프레임에 담아내는 작업을 통해 어린 시절 자신이 갈구했던 눈빛의 비밀을 탐구한다. 하지만 윤해서 작가는 그 지난한 과정을 정돈된 설명과 가지런한 사건의 연속으로 풀어내지 않는다. 이야기는 정체를 알기 힘든 화자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에
씨네21 추천도서 <0인칭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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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김진향. 자야. 연인이었던 시인 백석이 지어준 이름 자야로 알려졌지만, 기생으로는 김진향으로 불린 여성의 본명은 김영한이었다. 그가 쓴 <내 사랑 백석>의 저자 이름은 ‘김자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1995년 처음 출간되었는데, 북한에 있던 백석이 사망한 일이 1996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가 시주한 서울 성북동 부지에 길상사가 문을 연 것이 1997년,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99년이다. 다분히 예스러운 문장으로 쓰인 이 회고록은 자유결혼은 꿈조차 꾸지 못하던 시대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기생으로 살았던 이의 만남과 이별을 담았다. 고풍스러운 문어체로 쓰인 책인데, 읽다 보면 곳곳에서 감정의 격동을 느끼게 된다. 불가역적인 이별이 분단이라는 역사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한몫하리라. 둘이 함께한 시간이 이별의 시간보다 아주 짧았다는 점 역시.
<정본 백석 소설·수필>은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백석의 1930년부터 42년 사이
씨네21 추천도서 <내 사랑 백석>, <정본 백석 소설·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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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개들> 25주년을 맞아 출간된 <타란티노: 시네마 아트북>.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말에 따르면 “나에게 쿠엔틴 타란티노 캐릭터를 집필하라면, 떠들썩하면서도 사랑스럽고 여린 캐릭터를,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못할 정도로 여린 캐릭터를 만들어낼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캐릭터는 정신 나간 인간 말종이 될 거예요.” 이 책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세계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담겼다. 예를 들어 머리말 첫 문장. “쿠엔틴 타란티노가 시나리오를 쓸 때 맨 처음에 하는 일은 문구점에서 검정색과 빨간색 사인펜 여러 자루와 250페이지 분량의 공책을 사는 것이다. 그는 레스토랑, 술집, 카페 같은 공공장소는 물론 스테이션왜건의 뒷좌석 등 집이 아닌 곳이면 어디서건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타란티노: 시네마 아트북>은 타란티노의 어린 시절과 시나리오들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저수지의 개들>와 <펄프 픽션>으로 시작하는
씨네21 추천도서 <타란티노: 시네마 아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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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사는 받을 사람이 없어진 뒤에야 절박해진다. 독서하기엔 바깥 날씨가 너무 좋은, 야외활동을 부르는 계절이라 독서의 계절이라 불린다는 가을의 끝을 잡고, 영화와 책 속의 죽음을, 뉴스 속의 죽음을 떠올린다. 예술의 사유만으로는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르나, 그것이 주는 즐거움과 숙고의 힘은 결국 우리가 다음 날을 살게 하리라.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예술세계를 집대성한 <타란티노: 시네마 아트북>부터 시인 백석의 산문과 소설을 묶은 <정본 백석 소설·수필>,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자야가 쓴 회고담 <내 사랑 백석>, 제목부터 소설 독법을 새롭게 제시하는 듯한 윤해서의 소설 <0인칭의 자리>, ‘이제야’라는 말이 만시지탄의 부사로, 동시에 누군가의 이름으로 깊은 울림을 갖는 최진영의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 그리고 길리언 플린, 스티븐 킹, 루이즈 페니 같은 소설가들의 찬사 속에 <뉴욕타임스> 베스트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0월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