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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여름 냄새가 난다. 솜털이 날리는 덥고 건조한 시골의 여름, 건초 더미, 차갑고 묵직한 야외 수영장, 햇볕에 탄 피부의 감촉. 주인공 캐머런은 수영선수로 활동하는 10대 청소년으로, 몬태나에서 친구와 애인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레즈비언 정체성을 찾아간다. <이방인>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 또한 부모님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친구 아이린과 캐머런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인생 첫 키스를 나누며 짜릿한 순간을 보낸 그때, 부모님이 매해 찾아가던 퀘이커 호수에 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캐머런은 부모님의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들키지 않겠다고 안심하고 그런 자신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이 죄책감은 매 순간 캐머런을 따라다닌다.
사랑과 우정, 이별과 불안과 슬픔이 떠돌며 하나의 밧줄로 얽힌 여름의 시간은, 사랑했던 친구의 배신 혹은 고발로 인해 끝난다. 이 단절을 보며 레드클리프 홀의 퀴어 고전소설 <고독의 우
씨네21 추천도서 <사라지지 않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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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스페인 세비야 지방까지는 비행기로 스무 시간 남짓 걸린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도시가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도 비슷할까 싶어 답답하고도 반가우리라.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는 어려서부터 시골 마을 공동체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에 거부감을 느꼈고 뚱뚱한 외모를 가지고 놀려대는 남자아이들에게 분노했으며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주문을 외웠다. 좁은 현실을 확장시켜준 존재는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의 삐삐 같은 여성 캐릭터들이다. 홀로 책에 빠져 지낼 땐 은둔하면서도 자유로웠던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으며 저임금 노동과 가사노동 및 육아에 매인 주변 어른 여성들을 고찰했다.
장학금이라는 탈출버튼을 눌러 독일로 떠난 시절에는, 25살에 세계 일주를 해낸 여성 넬리 블라이를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갖가지 국적의 좌절한 학생들이 뛰어내려서 ‘자살자들의 기
씨네21 추천도서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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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바람이 흙먼지를 뿌리며 슬레이트 지붕을 엎는 골목. 가난의 풍경을 짊어지고 미래로 가겠다고 다짐하는 여자. 인터넷에서도 소문난 단편 <도둑맞은 가난>은 부자가 제 이력서에 가난 체험까지 집어넣겠다며 한칸 방 살기를 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들이 가난에 진저리치다 죽어버린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젊은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여름 아침의 억센 푸성귀’처럼 힘차고 청정한 구석을 발견하고서 가난을 소명 삼아 살기로 다짐했는데, 누군가는 그 가난을 한번 겪고 말 경험으로 치부하니 의미를 빼앗겨버려 치욕을 느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치욕 속에 분노하는 순간마저도 너무나 생생하게 활기를 뿜어내 매혹적이다. 미군기지에서 물건을 능숙하게 빼내 팔던 <공항에서 만난 사람>의 무대소 아줌마도 그렇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는 단번에 읽어내릴 만큼 재미있지만 독자를 쥐고 흔드는 힘이 워낙 강해 책을 덮고 쉬고 싶기도 한 박완서 작가의 단
씨네21 추천도서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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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다. <씨네21>이 2월에 추천하는 책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며 문제적이다. 과거에 알던 사람과 연락이 닿으며 한 시절의 기억을 통째로 소환하는 금희 작가의 소설 <천진 시절>이 보여주는 회고의 시간. 데뷔작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뒤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힘써온 아룬다티 로이의 오랜만의 신작 <지복의 성자>도 소개한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마크 웹 감독 연출로 드라마화가 결정된 J. D. 바커의 스릴러 소설 <네 번째 원숭이>. 시대가 흘러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읽히는 작가 박완서 중단편집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때로 유쾌하고 즐겁지만 여성의 삶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의 에세이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는 놓치기 아깝다. 에밀리 M. 댄포스의 <사라지지 않는 여름>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2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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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간 할리우드영화들은 최소한 한국영화보다는 다양성 측면에서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고들 한다. <겨울왕국>이 처음 개봉했던 때, 어린 소녀들이 공주 대신 왕이 되고 싶어 한다고, 그래서 ‘대관식’ 이벤트를 부모에게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엘사는 파괴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신의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고, 두 자매는 그렇게 남자를 얻는 대신 세상을 얻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엘사는 왕이 된다 해도 허리를 조인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을 한 모습이었다. 외양으로는 공주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엘사를 보여주는 방법은 어땠어야 하는가. “강한 얼굴 표정을 사용하든지 그런 표정과 아울러 다른 옷을 입게 하든지, 성적 매력과 무관한 변신 장면을 보여주든지 했어야 했다.” 현재의 상황은 페미니즘의 승리가 아니라, 혹시,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에서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를 인용해 말하는 것처럼 “반페미니스트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 21세기식 백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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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칠리아 성인은 음악을 수호하는데, 11월 22일이 축일이다. 이날은 벤저민 브리튼의 생일이기도 해서 그는 친구인 시인 W. H. 오든에게 시를 받은 뒤, 그 시에 매력적인 합창을 계속 붙여나가며 곡을 썼다. 브리튼은 연인인 테너 피터 피어스와 1939년 4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머무르며 활동을 이어갔다. 3년이 지나 영국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은 이들은 세관 검사관들이었다. 브리튼의 짐에 들어 있던 악보들을 암호로 간주해 압수했던 것이다. <성녀 체칠리아 찬가>는 그렇게 압수된 악보였다. 브리튼은 런던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곡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적기 시작했다. <성녀 체칠리아 찬가>는 그렇게 브리튼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이자 체칠리아 성인의 축일인 1942년 11월 22일에 <BBC>에서 처음으로 방송되었다. 하루에 클래식 한곡씩을 소개하는 <1일 1클래식 1기쁨>에 실린 11월 22일의 곡에 얽힌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1일 1클래식 1기쁨>, 1년 내내 발견의 기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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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세계문학전집 100번째 책은 <전쟁과 평화>다.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마다의 개성 혹은 주관이라면 첫 작품, (다른 출판사에 없는) 작품, 그리고 특별한 번호가 매겨지는 작품들에 있으리라. 토마스 만의 <마의 산>으로 1, 2권을 시작한 을유문화사 시리즈에서 돋보이는 선택이라면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W. G.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100번째 책은 ‘고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듯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세권이다. 아득할 정도로 묵직한(상권 860쪽, 중권 864쪽, 하권 852쪽) 세권의 책은 새해 계획으로 ‘고전소설읽기’에 도전한 이들을 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책을 펴자마자, (500쪽을 넘기는) 러시아 장편소설이라면 꽤 유용하게 쓰이는 ‘등장인물’ 소개가 두 페이지에 걸쳐 등장한다. 그리고 바실리 공작을 향한 말로 소설이 시작되니, “공작, 제노바와
씨네21 추천도서 <전쟁과 평화 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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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민정은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라는 알쏭달쏭 묘한 웃음을 자아내는 제목의 네 번째 시집으로 돌아왔다. 시마다 넘치는 현란한 말장난이 압도적이다. 삽 사는 얘기는 삽질로 넘어가고 엄살은 몸살과 나란히, 미국에서 온 시인 제이크가 감삼역은 감을 산다는 뜻이냐 묻자 이어지는 말은 달 감 단 감. 마는 “잘린 마 아니고 흰색 깐 마 아니고 안 잘린 마 맞고 흙색 마 맞는 다섯개의 장마”가 되니 그야말로 이런 시를 “마, 들어는 봤나 마”라고 묻는 것 같다.
기쁨 혹은 쓸쓸함과 고단함이 깃든 일상이 언어유희를 통해 혼잣말하듯, 대화하듯 술술 풀린다. 동료들이 나눠준 감자와 양파는 너무 반갑고 바지락 까서 파는 단골 할머니 가게가 문을 닫으니 줄자가 돌돌 풀리듯 과거의 진득한 상념들이 술술 풀려나 “삶에 더 삶아져봐야” 하나 생각한다. “유치원 아이”만 한 강아지를 간절히 찾는 전단지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나를 못 쓰게 하는
씨네21 추천도서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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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며 갖고 싶은 마음. 단단하면서도 둔감하지 않은 마음. 간호사 이라윤의 <무너지지 말고 무뎌지지도 말고>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경험을 담은 에세이다. 중환자실은 사경을 헤매거나 인공호흡기를 달고 진정제를 투여한 사람, 알코올중독으로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 등 의식이 명료하지 못한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위독한 환자들의 바이탈 사인을 확인해서 승압제며 강심제 같은 약을 쓰고 피검사를 하고 대변 기저귀를 갈아주는 한편 이들이 침대를 뛰쳐나가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나 주의하며 말상대가 되어주고 식사를 챙겨주니 근무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마음 급한 보호자들이 퍼붓는 질문세례를 처리하면서 혹여 민원이 들어오지는 않을까도 신경 써야한다. 그러다 위급한 상황, 예를 들어 환자에게 심정지가 닥치면 동료 간호사와 함께 다급히 흉부 압박에 기관 내삽관 준비를 하고 코드블루 방송을 내보내며 주치의에게 전화로 보고를 하는데, 이 처치를 거의 1분 내에 끝내야 한다.
씨네21 추천도서 <무너지지 말고 무뎌지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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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가 크리스마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은 아직 여름이 한창일 때였다. 양 사나이도, 일을 맡기러 온 사내도 여름용 양털 옷 속에서 땀을 흠뻑 흘렸다. 한더위에 양 사나이로 살아가기란 매우 괴로운 노릇이다.” 에어컨을 살 형편도 되지 않는 양 사나이. 그에게 의뢰가 하나 들어온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성(聖) 양 어르신님을 추모하는 음악을 작곡해달라고. 심지어 양 어르신님이 돌아가신 지 2500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까지는 넉달 반이 남았다. 양 사나이는 자신만만하게 의뢰에 응했다. 가난한 작곡가 양 사나이는 낮에 근처 도넛 가게에서 일하느라 바빴다. 밤에 피아노를 두드려보려고 하면 일층에 사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쫓아와 문을 콩콩콩 두들겼다. 그리고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나흘 뒤로 다가왔다. 약속한 음악은 한 소절도 만들지 못했다. 양 사나이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사람은 양 박사였다. 그는 양 사나이가 작곡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고 한다
씨네21 추천도서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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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 끝나면 죽음이 온다. 곡이 다시 시작되면 다시 살아나는가. 그저 곡이 끝날 때마다 한번의 죽음이 온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살아 있다. 복잡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침묵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시간을 분절해 감각하는 방법으로 음악을 택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천희란의 소설 <자동 피아노>는 20여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는 숫자로만 명명되어 있지만, 챕터마다 피아노곡이 한곡식 매칭되었다. 여기에는 줄거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으며, 다만 곡이 하나 시작되면 생각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생각이 어디로 굴러가는지를,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 쪽은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곡이 끝나면 (아마도) 한번 죽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죽일 수 있는 대상이라고는 나밖에 없으니까.” “휴식이란 겨우, 불안한 나의 뒷모습에 액자를 씌우고 잠시 바라보는 일.”
챕터별로 매칭된 피아노곡을 듣는 것은 <자동 피아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씨네21 추천도서 <자동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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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겨울, 아직은 기나긴 밤. 설 연휴 기간 중 당신에게 기나긴 겨울밤을 채워줄 이야기를 선물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묵직하면서도 의미 있는 선택이 될 테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되살려주리라. 제목부터 인상적인 김민정 시인의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그리고 천희란의 소설 <자동 피아노>는 당신에게 불안이 될까 위안이 될까 궁금하다. 중 환자실 간호사 이라윤의 <무너지지 말고 무뎌지지도 말고>는 어쩌면 당신의 고민에 함께하리라.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1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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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슨 커리의 <리추얼>이라는 책이 있다. 소설가, 시인, 화가, 작곡가, 철학자들의 창작 관련 생활습관을 다루었다. 메이슨 커리는 <리추얼>의 후속작으로 <예술하는 습관>을 발표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리추얼>에서 소개했던 161명 가운데 여성은 단 27명뿐이었다고. 커리가 이번에는 여성 예술가들의 창작 리추얼을 다루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도리스 레싱이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쓴 비결은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는 내 친구와 비슷해 보인다. 레싱은 아이가 없었다면 1950년대 소호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리라고 했다. 술을 마시며 예술을 논하는 대신 레싱은 아들을 돌보면서 글 쓸 시간을 낼 수 있게 삶을 조율했다. 조율이라면 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이가 일어나는 새벽 5시에 시작하는 일과다. 진짜 자신의 하루가 시작하려면 아이가 학교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루 종일 레싱은 일하다 말다를 반복한다. <킨>을 쓴 옥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예술하는 습관>, 창작의 비결을 물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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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러고 있을까?” 십몇년 전에 야구장에서 친구가 물었다. 그러면 좋겠다고 답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회사 동료들과는 30년 뒤에 만나도 영화 이야기를 나누리라. 나는, 바라기는, 시력이 허용하는 한 좋은 책에 대해 세상에 말하며 살고 싶다. “이제 철들어야지”라는 말을 들을 법한 일만 바라고 있다. 쓰루타니 가오리의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같은 취미를 공유하게 된 두 사람의 일을 그린다. 75살 이치노이 유키 할머니는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그림체에 홀려 집어든 BL만화에 홀딱 빠진다. 할머니의 BL 생활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 사야마 우라라. 이 두 사람의 우정을 그린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는 2019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 만화 부문 1위를 했다.
BL이라는 말이 낯선 분들을 위해 부연하면 보이스 러브(Boys Love)의 줄임말로, 남성간의 사랑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3>, 좋아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