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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룬다. 미국체조협회 여자 국가대표팀의 전담 의사였던 래리 나사르가 치료를 명목으
로 오랫동안 어린 10대 체조 선수들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던 사건은 왜 그렇게까지 오래 감춰질 수 있었는지, 왜 주변 어른들(특히 피해자의 코치와 보호자)은 알지 못했는지에 대해 말하며 인간이 타인을 대할 때 ‘신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세상 모두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도, 밤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도 다룬다. 말콤 글래드웰은 자살을 ‘결합’이라는 현상과 엮어 설명한다. 어떤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조건이 ‘결합’할 때 사건이 발생한다. 자살 역시 그런 사건 중 하나로, 특히 ‘방법’, ‘장소’와 잘 결합한다. (다른 다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더 많은 사람이 자살한다. 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타인의 해석>, 신뢰의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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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라…. 역전 앞이나 호화로운 럭셔리처럼 동어반복이다. 하지만 영미 문학의 진저브레드를 생강빵으로 번역해서 읽을 때 그것은 왠지 다른 맛, 다른 음식처럼 느껴진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그 다를 수밖에 없는 번역의 맛에 대해 번역가가 쓴 에세이다. <빨강 머리 앤> <작은 아씨들> <하이디> <소공녀> 등 지금의 2030 여성들이 어린 시절 읽었을 명작 소설 속 음식들에 대해 설명하는 요리책이나 에세이들이 여럿 출간됐다. 아마도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책 속 음식과 의복에 대해 이토록 할 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로망의 영역에 여전히 머물기 때문일 것이다. <빨강 머리 앤>에서 앤이 딸기술을 주스로 오인해 다이애나에게 대접한 후 다이애나 엄마로부터 앤과 절교하라는 말을 들은 에피소드를 읽고, 도대체 얼마나 달콤하기에 술인지도 모르고 두잔을 연거푸 마셨는지 그 맛이 너무 궁금했던 게
씨네21 추천도서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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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일제강점기 경상도 어진말에 사는 18살 버들이에게 중매가 들어온다. 훈장이었던 아버지가 의병으로 죽은 후 끼니를 걱정하며 살던 버들 애기씨에게 들어온 선 자리는 무려 태평양 건너 포와(지금의 하와이)의 낯선 사내다. “거 포와를 낙원이라 안 캅니꺼. 거 가기만 하면 팔자 피는 기라. 애기씨 거 가면 공부도 할 수 있습니더.” 재외동포와 사진만 교환하고 혼인하는 ‘사진 결혼’ 이건만 버들은 미국서 공부도 하고 영어도 배울 수 있다는 중매쟁이의 말에 혼례를 받아들인다. 혼인한 지 석달 만에 과부가 되어 집에만 갇혀 살던 버들의 친구 홍주, 무당 손녀라고 돌팔매질 당하던 송화까지, 세명의 소녀는 ‘여기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 포와를 향해 길을 떠난다. 부푼 꿈을 품고 이국땅에 도착했지만 이들이 마주한 것은 사진보다 서른살은 더 들어 뵈는 신랑감과 아시안을 향한 일상적 차별, 그리고 허리 펼 새 없이 이어지는 노동이다. 더구나 버들의 남편은 첫사랑을 잊지 못
씨네21 추천도서 <알로하, 나의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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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인문 시리즈인 ‘채석장’ 시리즈의 첫권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알렉산더 클루게의 글을 묶은 <'자본'에 대한 노트>다. 에이젠슈테인은 <율리시스>가 블룸씨의 하루를 다루듯, 영화 <자본>에서 한 사람의 하루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연상되는 사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이어 붙여 세계 전체를 그릴 참이었다. 이 대담한 생각은 구상만 남았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글은 에이젠슈테인의 구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한다. 해고당한 프랑크푸르트 노동자의 일화부터 미국 자본의 투자 일화까지 연상의 조각들을 모은다.
<아카이브 취향>은 18세기 파리 형사사건 기록을 종일 읽는 역사가의 에세이다. 훼손된 종이 자료에다 구두점이 없고 알아보기 어렵게 쓴 글을 해석하는 답답한 시간. 하지만 경찰 문건 사이에 농담 가득한 개인적 편지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광장의 교통체증을 참지 못하고 진짜 칼을 빼든 인물이 사드 후작이었다는 뜻밖
씨네21 추천도서 <'자본'에 대한 노트>, <아카이브 취향>, <정크스페이스 |미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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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특별한 관문>은 명문대 졸업생일수록 소득이 수직 상승한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리고 하나 더, 명문대일수록 빈곤층 학생이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다. 이 책은 교육 수요자 말고 공급자, 즉 대학의 입장을 해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성이 있다. 대학은 다양한 계층의 학생을 선발하고 있다는 공정한 이미지를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수집단 우대정책 같은 건 말뿐이고, 빈곤층 출신 고학력자 학생들은 전체 입학자 가운데 극소수다. 현재 미국 대학은 4분의 1가량이 재정위기에 빠져 있는 가운데 미국 대학 순위를 높이려면 비용 지출을 늘려야 하는 형편이라, 대학 입학 사정관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등록금을 꼬박꼬박 내줄 부유한 집안의 고득점자 학생들을 찾는다.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도 아버지가 하버드대학교에 250만달러를 기부하여 입학했다 하니, 애초에 대학이 빈곤층 출신의 고학력 학생에게 문턱을 높인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빈곤층 출신의 명문대 입학생들은 부유
씨네21 추천도서 <인생의 특별한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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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예술원 명예교수이자 큐레이터, 작가인 토마스 기르스트가 쓴 <세상의 모든 시간>은 ‘느리게 사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초연결, 실시간 피드백의 시대에 누구나 ‘지금 당장’, ‘잠깐만’이라는 말로 시간을 쉼 없이 분절해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한 쉼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기르스트는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즉각적인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가장 대표적으로 SNS 서비스의 ‘좋아요’ 기능이다), “즉각적인 만족은 인간의 심오한 행복을 방해한다. 한 가지 강렬한 감각에 예민해질수록 다른 감각에는 무뎌지게 된다”. 이런 화두는 독특하거나 드문 것이 아니다. 느린 삶을 ‘어떻게’ 생활로 끌어들일지가 사유의 특이성을 반영하게 되는데, 기르스트는 큐레이터라는 전문성을 십분 발휘해 기원전 이집트의 조각상부터 보이저 1호에 실어보낸 LP레코드에 이르는 예술 작품들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간다. 예술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타임캡슐
씨네21 추천도서 <세상의 모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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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인파 사이에서 봄꽃이 한창 피고 졌다. 봄인데 하늘이 매일 맑다. 선거운동은 조용하게 마무리되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연휴가 다가오지만 여행을 꿈꾸기 어렵다. 코로나19 시대의 달라진 풍경 속에 시간이 흐른다. 시간을 붙잡아두려는 애달픈 마음으로 책을 쌓아두고 읽는다. 당신의 마음을 울린 책은 무엇인가.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4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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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사파리>를 쓴 래퍼이자 활동가이자 작가인 대런 맥가비는 이 책을 마무리하던 즈음 2017년 6월 14일 런던 서쪽에 위치한 고층아파트 그렌펠 타워 화재사건을 접했다. 그는 그렌펠의 주민들이 꾸준히 화재위험을 경고했으며, 그들이 화재 후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대해 의문을 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렌펠의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사실도. 빈곤의 풍경. 그는 “생각하고 말하고 글 쓰는 방식에서 나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내 어휘, 내가 평생토록 수집해온 말들을 전방위로 사용하려 한다”면서, 책 한권을 끝까지 읽을 수 없다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교과 과정이 내가 사는 동네나 내 경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가식적인 상층계급의 허튼소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 챕터는 스코틀랜드의 유일한 여성 전용 교도소 콘턴베일이다. 맥가비가 빈곤계층 백인 남성으로 느껴왔던 사회의 무관심에 더해 여성이라는 차별을 한겹 더 경험했을 사람들이 있는 곳이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가난 사파리>, 폭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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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뉴욕공공도서관(NYPL)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에는 리처드 도킨스를 필두로 수많은 지식인, 유명인이 등장하지만 모두가 이름 자막 없이 등장하고, 누구나 상황에 필요한 만큼의 분량을 받는다. 모두가 중요하다보니 3시간 26분이나 되는 이 다큐멘터리의 초반에는 도서관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용객으로 추정되는 이의 전화를 받는 장면이 있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질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원은 “유니콘은 상상의 산물입니다. 실재하는 동물이 아니라고요”라고 한다. 아니 그걸 물어봐야 안단 말인가 싶은 동시에, 그런 질문을 해도 된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뉴욕도서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은 75년 전부터 뉴욕공공도서관에서 기록으로 보관해온 이용자의 질문지 중에서 가장 특이하고 재미있고 엉뚱한 106가지를 모은 책이다. 뉴욕공공도서관은 정보와 자료의 무료 이용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곳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뉴욕도서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 답은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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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말하길 바야흐로 천하가 어지러워졌으니 아무래도 학문할 여가가 없을 듯하다고 했다. 이 말에, <채근담>에 나오는 말을 육세의의 <청유학안>에서 재인용해 답을 한다. “천하는 저절로 어지러워졌지만, 내 마음은 내 스스로 다잡는다. 사람은 세상에 난리가 나면 스스로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다고 말하면서, 혹은 할 일이 없음에 비분강개하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거나 혹은 미친 척하면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기는데, 이는 모두가 중용을 행하는 방도가 아니다.”
2월에는, 3월에는 나아지겠지 믿었다. 3월이 되니 4월 기약이 없고, 4월이 되니 상반기를 포기하게 된다. 코로나19 시대에 어떻게 살면 좋을까. 그나마 ‘하던 대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재택근무와 가정학습을 통해 모두가 알아간다. 세상의 돈은 많은 경우 사람들이 직접 만나야 돌고 도는 것이었다는 것을 끔찍할 정도로 확고하게 알게 된다.
중국의 출판사인 상무인서관에서 40여년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학문에 관하여>, 나아갈 바를 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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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내 감정’인데도, 그것은 오로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롯한,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일 때가 있다. 나는 리뷰 쓰기 수업을 할 때 ‘재미있다’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할 때가 있는데, 너무 많은 감정을 ‘재미있다’로 뭉뚱그려서다. 카체이싱 장면이 정말 도로 위에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든가, 보는 나도 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것 같다든가,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든가 하는 말을 구체적으로 하기 어려울 때, SNS에는 ‘헐 대박’, ‘존잼’ 이라고 적는다. 그 재미있음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사회에서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 속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종종 실제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덮어버리거나 무시하며 살고 있다. <한겨레> 기자였던 김소민의 에세이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와 비평가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은 둔해지다 못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버린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다소 곤란한 감정>, 감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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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잊히지 않는다. 다만 재해석될 뿐이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이 100권 출간을 기념해 5종의 책을 리커버해 선보였다. 워크룸의 디자인으로 갈아입은 표지가, 언제나 새롭게, 동시대성으로 읽히는 5종의 클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5권의 책은, 을유세계문학전집에서만 볼 수 있는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 D. H. 로런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과,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안톤 체호프의 <체호프 희곡선>이다.
세계문학전집마다 개성이 있지만, 이번에 리커버로 선보인 책 중에서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은 고뇌하면서도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절창. 오에 겐자부로의 큰아들 히카리가 뇌 이상으로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 탓에 버드가 결혼한 나이와 아이를 갖게 된 나이, 갓 태어난 아들의 뇌 이상
씨네21 추천도서 <을유세계문학전집 리커버 에디션 (한정판 5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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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문학인가? 그렇다. SF는 과학인가? 적어도 나는 확답을 못하겠다.” 한국 SF소설계에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배명훈이 처음으로 펴내는 에세이 <SF 작가입니다>가 출간되었다. 소설가 배명훈에게 영문을 모를 수사(‘발칙한 상상력’, ‘경계를 넘나드는’)를 붙이거나 헛다리 짚는 질문을 던진 적 있는 인터뷰어이자 책 리뷰어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은 나는, 이 책이 나와서 정말 반갑고 감사하다고 느낀다. SF를 창작하며, 오랫동안 ‘SF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반복해 답하며 살아왔을 배명훈 작가는, <SF 작가입니다>에서 여러 경험을 들려준다. 그간 발표한 소설들을 슬쩍슬쩍 홍보하기를 잊지 않으며, 소설이 현실이 된 사례들이나 함께 창작하는 동료들을 응원하며 노력하기 등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 SF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일단 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도궁금한 게 있다면 그때 질문해도 좋을 정도다.
일확
씨네21 추천도서 <SF 작가입니다>,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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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봄>의 원제는 ‘この世の春’로, ‘이승의 봄’이라고도 옮길 수 있다. 제목부터 어딘가 아련한 느낌이라는 뉘앙스를 전달받았다면, 이 소설의 분위기를 잘 떠올릴 수 있을 것. 일본 미스터리 소설가 미야베 미유키가 데뷔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세상의 봄>에는 장점과 단점이 하나씩 있다. 장점은 정말 재미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일본 시대물이라서 신분이나 지명, 의복 등에 관련된 명사들이 익숙해지기 전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점이다. 기타미 번 6대 번주 기타미 시게오키가 26살의 나이에 중병으로 은거한다. 심지어 가신이 강제로 주군을 은거시키는 형태의 연금이다. 이혼하고 본가로 돌아온 다키는 아무래도 건강이 아닌 이유로 보이는 시게오키의 은거에 관심이 많다. 시게오키는 번주의 별저인 고코인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다키 역시 그곳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할복해 죽었다던 인물이 멀쩡하게 살아 있으며 다른 이름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쿠리야 일족의 미타마
씨네21 추천도서 <세상의 봄> 上·下